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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신촌캠퍼스일상생활속에서/사람사는 현장 2021. 10. 9. 19:17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1885년 한국 최초의 서양식 왕립병원으로 설립된
제중원(광혜원으로 개원했으나 2주 후 고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개칭됨)을 모태로
1899년 한국 최초의 정규 의학교인 제중원이 설립되었다.
1904년 근대식 세브란스 병원이 준공되었고, 1909년 사립 세브란스의학교로,
1913년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교로 교명을 바꾸었다.
1917년 4월 H.G. 언더우드가 사립 연희전문학교로 인가를 받았고,
그해 5월 O.R. 에비슨이 재단법인 사립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로 설립인가를 받았다.
1922년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었고,
1923년 연희전문학교로 교명을 바꾸고 다시 설립인가를 받았다.
사립 연희전문학교는 1923년 연희전문학교로,
일제강점기인 1942년 아사히 의학전문학교로 강제로 개칭되었다가,
1944년 세브란스 연합의학전문학교로 교명을 복구했다.
1946년 연희대학교로 승격되었고,
1957년 1월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해 연세대학교로 출발했다.
1978년 10월 의과대학 원주분교로 출발했으며,
1981년 원주분교가 원주대학으로 승격되었다.
2010년 인천 송도에 국제캠퍼스를 개교했다.
2015년 창립 130주년을 맞아 노벨상 수상자들을 초청해 ‘연세노벨포럼’을 개최했고,
개교 130주년을 맞아 명문사학으로서의 연세대학교의 세계적 위상을
재정립하기 위한 ‘제3의 창학’비전을 발표했다.
2017년 고려대학교와의 양교 공동강의를 최초로 개설했다.
2019년 원주캠퍼스의 명칭을 미래캠퍼스로 변경했다.
2021년 기준 신촌·국제캠퍼스는 문과대학과 상경대학, 경영대학, 이과대학, 공과대학,
생명시스템대학, 신과대학, 사회과학대학, 법과대학, 음악대학, 생활과학대학, 교육과학대학,
학부대학, 언더우드국제대학, 약학대학, 글로벌 인재대학을 설치·운영하고 있다.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외에 연합신학대학원·경영전문대학원·국제학대학원·
정보대학원·커뮤니케이션대학원·사회복지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 등의 전문대학원,
교육대학원·행정대학원·공학대학원·언론홍보대학원·법무대학원·
생활환경대학원·경제대학원 등의 특수대학원이 있다.
미래캠퍼스에는 인문예술대학·정경대학·과학기술대학·보건과학대학·
동아시아국제학부·글로벌엘리트학부·원주의과대학 등이 있다.
대학원은 일반대학원 외에 정경/창업대학원·보건환경대학원 등의 특수대학원이 있다.
부속기관으로는 대학교회와 대학언론사, 대학출판문화원,
체육위원회, 김대중도서관, 삼애교회 등이 있다.
부속교육기관으로는 언어연구교육원·어린이생활지도연구원·
미래교육원·국제교육원·사회교육개발원 등 다수의 연구소가 있다.
신촌캠퍼스 :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로 50 (신촌동)
미래캠퍼스 : 강원도 원주시 흥업면 연세대길 1 (매지리)
국제캠퍼스 : 인천광역시 연수구 송도과학로 85 (송도동)
세브란스병원(Severance Hospital)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인접 부지에 증축과 이전을 위한 종합병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2만 평의 부지에 공사비 65억 환을 들여, 1954년 착공하였다.
중간에 자금이 부족해 2년간 공사가 중단되기도 했으며, 1962년 완공하였다.
중구의 세브란스병원과 연세대학교 부속 의과대학을 부지 내로 흡수하였다.
4층 건물 3동과 나머지 2동으로 구성되었다.
병원 시설로는 병상시설 및 입원실과 진료소를 갖추었고,
의료인 교육 시설로 의과대학과 간호원 기숙사가 함께 존재하였다.
연세대학교 공학원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The Truth Shall Make You Free. John 8:32
2000 연세대학교 타임캡슐(Time Capsule)
우리는 이곳에 새천년 첫해 연세의 모습과 창립 115년의 역사를 소중히 담았습니다.
2085년 5월 창립 200돌을 맞아 옛 모습을 되돌아보며
이 민족을 이끌고 세계에 우뚝 서는 연세로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2000년 5월 13일
연세대학교 총장 김병수
박물관
한열이를 살려내라!
이한열 동산
이곳은 한국사에 민주주의의 한 획을 그은 1987년 6월 민중 항쟁의 불씨가 된
이한열 열사의 추모비가 위치한 이한열 동산이다.
이한열 열사는 1966년 8월 29일 전남 화순군에서 출생했다.
광주 동산초등학교와 동산중학교, 진흥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1986년 연세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 동아리 만화사랑에서 활동했다.
1987년 6월 9일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과
6.10 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참석한다.
시위 도중 연세대 정문 앞에서 경찰이 SY44 최루탄을 수평으로 발사, 이에 피격당해 쓰러진다.
세브란스로 옮겨졌지만 1987년 7월 5일, 27일 동안의 투병 끝에 민주의 꽃으로 산화한다.
지금까지도 이한열 열사가 외치던 민주주의는 실질적 의미에서 충분히 이뤄졌다고 할 수 없다.
민중이 자신의 삶의 진정한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우리는 6.10 항쟁과 7,8,9 노동자 대투쟁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겨야 한다.
개인의 발전이 공동체의 발전이 되고, 공동체의 발전이 다시 개인의 발전이 되는,
모든 민중이 모든 소외로부터 해방되는 세상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민주주의의 모습이다.
실천으로서 그러한 민주주의를 이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금 여기
다시 이한열 열사를 기리는 의미가 될 것이다.
故 이한열 열사 21주기 추모제 기획단
광혜원(廣惠院)
광혜원은 일반 백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1885년 4월 10일에 세워진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병원으로 큰 은혜를 입은 집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문호를 개방한 이후로 조선은 의료 시설을 근대화할 계획을 세우고
일본에 사절단을 보내 서양식 병원을 탐색하였다.
마침 미국에서 온 선교사 호러스 뉴턴 알렌(Horace Newton Allen, 1858~1932)이
갑신정변 우정국 사건에서 부상을 입은 명성황후의 조카 민영익(閔泳翊)을
서양의술로 살리면서 서양식 국립병원을 설립하고자 속도를 내게 되었다.
고종은 알렌의 병원 설립 건의를 받아들여 1885년에 서울 재동에 광혜원을 설치하였고,
같은 해에 제중원(濟衆院)이라는 이름으로 바꾸었다.
근대식 병원의 도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서양 의학의 도움으로 병을 치료할 수 있었다.
이 목조 한옥은 광혜원을 실제 크기 그대로 복원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식 병원이자 연세학원의 연원(淵源)이 되는 기관으로서
연세인의 의술 발전을 꽃피운 산실이 되었다.
광혜원은 처음에 재동에 있는 홍영식의 저택을 사용하였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원래 건물의 형식조차 찾을 수 없게 되자
1985년 5월 연세대학교 창립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복원사업이 추진되어 마침내 1987년 4월 10일에 봉헌하기에 이르렀다.
이로써 우리나라 현대의학의 발상지를 보존하고 기념할 수 있게 되었다.
옛 수경원의 정자각
수경원(綏慶園)은 조선 왕조 제21대 영조(英祖)의 후궁인 영빈 이씨(1696~1764)의 원묘이다.
영빈 이씨는 1남 6녀를 두었는데 그 외아들이 사도세자(思悼世子)이다.
1764년 6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영조가 친히 ‘의열(義烈)’이라 시호(諡號)를 내렸고,
묘호는 의열묘(義烈墓)가 되었다.
대한제국 광무 3년(1899) 사도세자의 4대손인 고종(高宗)은
사도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영빈 이씨의 묘를 수경원으로 승격하였다.
수경원은 1970년 경기도 고양시 서오릉으로 옮겨가고 1974년 대학교회(루스채플)가 들어섰다.
무덤 속에서 3개의 석함(石函)과 두 벌의 지석(誌石), 한 벌의 명기(明器)가 출토되었다.
왕릉이나 원에는 제례를 올리는 장소인 정자각(丁字閣)과
비를 보호하는 비각(碑閣)이 있는데 현재 뜰 안에 보존되어 있다.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
일제강점기에 경성부 대현정(大峴町)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 세워졌었던 기념탑이다.
이 기념탑은 지금은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교정에 남아 있다.
1928년, 연희전문학교의 창설자인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를
기념하기 위하여 교직원과 사회 인사의 기부로 동상을 교정에 세웠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말기, 신동아(神東亞)의 지도자를 양성하는 반도학원에
개인의 공로는 적국의 동상을 둘 수 없다는 이사회의 의결로
초대 언더우드 교장의 동상을 없애기로 하였다.
이에 1942년 4월 24일 윤치호(尹致昊, 1865~1945)와 직원과
학생대표자가 모인 가운데 흥아유신기념탑을 동상을 철거한 자리에 세웠다.
기념탑의 전면에는 경건하게 배례하는 신동아(神東亞)의 성지로 조성했다.
기념탑은 정방형의 기단석 위에 정방형의 사면체로 중대석의 탑신부 상단에
사각뿔형의 전면에 조선총독부 미나미 지로(南次郞, みなみじろう) 총독의 휘필로
‘흥아유신기념탑’(興亞維新記念塔)이라고 각자(刻字)하였다.
기념탑의 측면에는 쇼와(昭和) 16년(1941년) 12월 8일이 새겨져 있는데,
이 날짜는 1941년 12월 7일에 일본제국 해군이
하와이 진주만 공습을 개시한 일시와 무관하지 않다.
해방 이후 흥아유신기념탑을 철거하고,
1948년에 존 토마스 언더우드의 동상을 다시 세웠으나
한국전쟁 때 파괴되어 1955년에 다시 동상을 세워서 지금에 이른다.
흥아유신기념탑은 연세대학교 신촌캠퍼스 수경원(綏慶園)이 있었던 터 뒤쪽
‘연세 역사의 뜰’에 첨탑부가 현존해 있다.
출처 : 위키백과
故 노수석 열사 추모공간
노수석(魯秀碩)은 1976년 전라도 광주에서 태어나
1995년 법관의 꿈을 품고 이곳 연세대학교에 입학하였다.
법대 풍물패 천둥에서 민족과 민중을 가슴에 품게 된 그는
1996년 3월 29일 대선자금 공개와 국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서총련 궐기대회에 참가하여 종로에서 평화시위를 하던 중
경찰의 폭력진압에 의해 사망하였다.
약자를 위해 정의를 실현하고자 했던 뜻은 채 이루지 못했으나
그의 희생은 우리의 삶에 불씨가 되어 살아 있다.
노수석은 1999년 연세대학교 명예졸업장을 받았으며,
2003년 국가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았다.
10주기를 맞아 그를 아끼던 교수, 학생, 동문, 지인들의 정성을 모아
그의 마지막 체온이 남아있는 이 공간에 스물한 살 그의 흔적을 남긴다.
‘역사는 강이 되어 흐르고 너는 먼저 강이 되었으니’
2006년 3월 29일 노수석 열사 추모사업회
작품 10년 전으로 가다. 작가 이진준(1974~)
백양로(白楊路)의 유래
연세대학교의 상징인 백양로에는 백양나무(은백양)가 가로수로 심겨 있었다.
1915년 YMCA(기독교 청년회)에서 개교했던 연희전문학교가 1917년 신촌에 교정을 조성하면서
화학과 교수 밀러의 지도로 학생들이 진입로에 은백양나무를 심었다.
1968년 12월, 백양로를 포장하면서 수명을 다한 은백양나무 대신
은행나무를 심어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이곳에 백양로를 무성하게 덮었던 은백양나무를 몇 그루 심어 백양로의 역사를 기억하고자 한다.
연세대학교의 상징, 독수리 상
독수리는 연세대학교, 부산대학교, 부산 경성대학교의 상징이다.
특히 연세대의 상징으로 유명해서 '신촌 독수리'로 불린다.
그러나 라이벌 관계인 고려대학교에서는 ‘신촌 참새’라고 부른다.
또한, 고려대는 '안암골 호랑이'로 불리는데, 연세대도 이를 ‘안암골 고양이’라 부른다.
학생회관
중앙도서관
용재 백낙준 박사 상(庸齊 白樂濬 博士 像)
여기 모신 이 어른은 1957년 연희대학교와 세브란스 의과대학을 통합하여
연세대학교로 다시 세운 초대 총장 백낙준 박사이시다.
교육과 학문 민족 봉사와 자유정신의 구현에 뜻을 두시고 일생동안
연세와 민족을 붙들고 키운 연세의 정신적 주지시며 민족교육의 스승이시며
겨레의 지도자시고 하나님의 종이시다.
일찍이 연세를 국학연구의 발상지로 민족교육의 터전으로
진리 자유의 전당으로 힘써 이끄시며
연세는 연세인의 연세요, 한민족의 연세요, 세계의 연세임을 밝히시고
연세의 맡기어진 하늘의 사명을 일깨워 주시다.
그러기에 용재 선생에게 있어서 연세는 사랑이요 생명이시니
여기 연세인과 함께 영원히 계시다.
백양관
뉴욕에 있는 우리 겨레로부터 붙여줌. 1927
DONATED BY KOREAN FRIENDS IN NEWYORK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언더우드 뜰
언더우드 동상
미국 선교사(Horace Grant Underwood), 한국 이름은 원두우(元杜尤)
이 동상은 에취 지 언더우드 박사라
쥬강생 천팔백팔십오년 사월에 박사ㅡ 이십오의 장년으로 걸음을
이 땅에 옮겨 삼십삼 년 동안 선교의 공적이 널리 사방에 퍼지고
큰 학교론 연희전문이 이루히니 그럴사 박사 ㅡ 늙으시도다.
신학문학의 높은 학위는 박사 ㅡ 이를 빌어 무거움이 아니라
얼굴로 좇아 얼른 살피기 어려우나 이렇듯이 연세보다 지나 쇠함을 볼 때
누구든지 고심으로 조선 민중의 믿음과 슬픔을 돕는 그의 평생을 생각할지로다.
베푼 바 날로 늘어감을 따라 우리의 사모 ㅡ 갈수록 깊으매 적은 힘을 모아
부은 구리로소 방불함을 찾으려 함이라
뉘박사의 일생을 오십칠 세라 하더뇨 박사 ㅡ 의연히 여기 게시도다.
천구백이십칠년 십월 삼십일
조선인동지 일동
언더우드관(Underwood館) - 사적 제276호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1921년 짓기 시작해 1924년 완공된 연면적 2,700㎡의 근대식 4층 건물이다.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고 원두우(故 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를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언더우드관이라 하였다.
설립자인 언더우드 목사의 장남 원한경(元漢慶, Horace Horton Underwood, 1890~1951) 교수가
초석을 놓았고, 공사 감독은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을 감독한 화학과 교수 밀러(E.H.Miller)가 맡았다.
당시 문학관이라 불리었으며, 본래는 강의동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대학본부로 쓰이고 있다.
이 건물은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 양식의 웅장한 석조건물이며,
스팀슨관과 아펜젤러관이 건물 양쪽으로 인접하여 건물군이 ‘ㄷ’ 자 모양을 이루고 있다.
건물의 중앙부에는 1개 층의 탑옥(塔屋)이 솟아 있다.
현재에는 대학본부 건물로 총장실을 비롯한 중요 행정부서가 있다.
스팀슨관(Stimson館) - 사적 제275호
연세대학교에 최초로 세워진 건물로서,
1919년에 착공하여 1920년에 완공된 연면적 1,150㎡의 근대식 2층 건물이다.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의 설립자언더우드(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 목사가
고향인 미국으로 돌아가서 항구적인 학교 건축을 위해 미국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던
찰스 스팀슨(C.M.Stimson)의 기부금을 얻어놓고 세상을 떠난 뒤,
후임 교장인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이 그 기부금으로 건립한 것이다.
미망인인 언더우드(L.H.Underwood) 부인이 초석을 놓았고,
당시 화학과 교수인 밀러(E.H.Miller)가 공사를 감독하였다.
설계자는 알 수 없으나 당시 미국인 건축가들이
우리나라에 와서 설계와 기본계획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이 건축물은 근처 산간에서 나온 운모 편암(雲母片巖)과 화강석을 주재료로 하여 만든
석조건물로서 건축양식은 준고딕 양식이며 튜더(Tudor)풍의 아치형 입구를 가지고 있다.
아펜젤러관(Appenzeller館) - 사적 제277호
이 건물은 연세대학교의 전신인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에서
1924년에 완공된 연면적 1,656㎡의 근대식 3층 건물이다.
미국 매사추세츠주 피츠필드시의 기부금을 가지고 지어졌다.
연희전문학교의 설립자인 고 원두우(故 元杜尤, 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함께
한국에 와서 선교활동을 한 아펜젤러(Henry Gerhart Appenzeller, 1858~1902)를
기념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아펜젤러관이라 하였다.
아펜젤러관의 초석은 미북 감리교단의 웰치(H.E.Welch)가 놓았고,
공사감독은 화학과 교수 밀러(E.H.Miller)가 맡았다.
당시 이 건물은 이학관(理學館)으로 자연과학계의 강의동으로 쓰였으며
지금은 사회복지대학원에서 사용하고 있다.
언더우드관과 스팀스관과 마찬가지로 중앙 현관문이 튜더(Tudor)풍의
아치로 되어 있는 준고딕 양식의 단아한 석조건물이다.
연희관(延禧館) - 비지정 문화재
연희관은 1956년 10월에 미 제5공군과 연세대학교에 의해서 지어진
건평 423.80평, 연건평 2,014.65평의 방대한 건물로
현재 사회과학대학과 행정대학원이 사용하고 있다.
특히 이 연희관은 이 건물을 세우는데 도와준 미국의 원조, 협력 정신을 체득하여
세계평화와 자유, 정의의 실현을 위하고 과학 교육으로 문화 창조,
진리의 거화(巨火)를 밝힌 선배들의 유풍선양(遺風宣揚)을 기념하고
진리 자유의 정신을 구현하기 위해 쓰이고 있다.
연희관이라 부르게 된 것은 1957년 “연희(延禧)”와 “세브란스(Severance)”가 통합될 때
“연희”란 이름을 남기기 위해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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