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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천주교인 순교지, 해미읍성(海美邑城)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11. 5. 19:11

    진남문(鎭南門)

     

    해미읍성 진남문은 황명 홍치 4년(皇明 弘治 4年) 신해년(辛亥年, 1491년)에

    화강암 홍예문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읍성 중앙 남문에 조성한 문이다.

     

     

     

    진남문 받침돌의 皇明弘治四年辛亥造(황명홍치사년신해조)

     

    진남문 문루 아래 받침돌에 '皇明弘治四年辛亥造'라고 글씨가 새겨져 있다.

    황명 홍치는 명나라 효종의 연호인 홍치를 의미하는데

    1491년(성종 22)에 진남문이 중수되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縣監 兼 營將 朴公民煥茂功威德碑(현감 겸 영장 박민환무공위덕비)

     

    1849년에 건립한 비석으로 비좌(碑座) 위에 하나의 돌로 비신과 이수(螭首)를 만들었는데,

    이수 전면에는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두고 싸우는 형상이고 위는 둥글게 귀접이를 했다.

     

     

     

    左營樓堞 重修碑(좌영누첩 중수비)

     

    중수비 내용에는 주요 문들이 모두 무너지고 훼손되자,

    1847년 그해 겨울부터 공사를 시작하여 이듬해 2월에는 남문의 기와 4만 장을 바꾸고

    4월에는 남문 성돌에 회를 발라 그림을 그리고 기와를 운반하게 했다.

    또한 5월에는 동문 공사를 하고 7월에는 서문 공사를 시작했고,

    8월 중순에는 진남문을 낙성하기도 했다. 이어 9월에 공사가 끝나게 되었다.

    읍성 중수 과정에 동원된 인원은 수백 명인데 공사 중 다친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고 한다.

    한편 비를 세울 당시 감독한 사람은 이장보(李章輔), 지덕홍(池德弘), 정언복(鄭彦福),

    김영신(金永信), 신대운(申大運), 김계갑(金啓甲)이며,

    목수는 김해성(金海成), 석수는 서일관(徐日觀)이 담당했다고 비문에 기록되어 있다.

     

     

     

    방문 설명(榜文 說明)

     

    左記 容貌疤記者 今日 婦女子暴行及 財物掠奪者 特徵

    身長六尺 眉溱 鼻中 右目下刺傷痕 素顔 申告者褒賞三兩 海美縣監

    (좌기 용모파기자 금일 부녀자폭행급 재물약탈자

    특징 신장육척 미진 비중 우목하자상흔 소안 신고자포상삼량 해미현감)

     

    좌측의 수배자는 오늘 부녀자를 폭행하고 재물을 빼앗은 자로

    용모와 신체적 특징은 키는 육척에 눈썹이 진하며 코는 중간 크기이고

    오른쪽 눈 아래 칼 등에 의한 흉터가 있고 얼굴은 하얗다.

    신고자에게는 포상으로 삼량을 준다. 해미현감

     

     

    左記 容貌疤記者 前胥吏 公金橫領及 還穀隱匿脫漏者 特徵

    身長五尺半 鼻大鼻左側占 下脣厚 申告者褒賞五兩 海美縣監

    (좌기 용모파기자 전서리 공금횡령급 환곡은닉탈루자

    특징 신장오척반 비대비좌측점 하순후 신고자포상오량 해미현감)

     

    좌측의 수배자는 이전의 서리로 공금을 가로채고 추수기 곡식을 감추어

    장부에 누락시킨자로 용모와 신체적 특징은 키는 오척반에

    코가 크고 그 왼쪽에 점이 있으며 아랫입술이 두껍다.

    신고자에게는 포상으로 오냥을 준다. 해미현감

     

     

     

    천주교인 순교지 해미읍성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천주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70년부터 100여 년간 수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國事犯)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을 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金震厚, 1738~1814)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해미읍성은 조선 말기 고종 때인 1790년경부터 1886년까지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 등

    수 천 명에 이르는 신도들이 사학죄인(邪學罪人)으로 몰려

    온갖 고문 끝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던 곳이기도 하다.

     

     

     

    해미읍성(海美邑城) - 사적

     

    해미읍성은 조선 성종 22년(1491년) 해미현 읍성으로 새로 쌓은 석성이다.

    둘레 1,800m, 성 높이 5m, 성 안 넓이 6만 4350㎡으로 사적 제11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아있는 읍성 가운데 원형이 가장 잘 보존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1579년 10월 병영 군관으로 부임하여 약 10개월 동안 근무한 곳이기도 하다.

    효종 때에 북벌책을 내세우면서 전국의 병영이 강화되자 충청도에도 호서 병영이

    다섯 곳으로 늘어났는데, 그 가운데 선임 병영인 호서좌영을 해미읍성에 두었다.

    그래서 해미읍성에는 동헌과 객사 중심인 다른 읍성들과 달리 병영이 설치되었다.

    1847년 현감 겸 영장이던 박민환이 성곽을 크게 개축했는데,

    지금 남아있는 성곽이 바로 이때 고쳐 쌓은 것이다.

    해미읍성이 역사적으로 크게 의미를 갖는 것은 흥선대원군 때 천주교인을 박해한 현장이기 때문이다.

    충청도 바닷가에는 천주교인들이 많이 살았는데, 이 일대에서 붙잡힌 천주교인들은

    모두 호서좌영이 있던 해미읍성으로 끌려와 심문을 받다가 처형되었으므로,

    해미읍성은 천주교의 순교성지이기도 하다.

    해미읍성은 성곽이 완전하게 남아있는 대표적인 읍성이다.

    1973년부터 1981년까지 읍성 안에 무질서하게 들어섰던

    학교와 민가들을 철거하고 성곽을 보수했으며,

    1997년부터 10년 동안 객사와 관아 건물들을 복원하였다.

     

    충청남도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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