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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弘巖 羅喆) 선생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21. 12. 11. 19:12

    나철(羅喆, 1863~1916)

     

    본명은 인영(寅永). 호는 홍암(弘巖). 관향은 나주.

    29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를 거쳐 33세 때 징세서장의 발령을 받았다.

    그러나 곧 사퇴하고, 구국운동에 뛰어들었다가 실패한 후 민족종교운동을 시작하였다.

    그가 중창한 대종교에는 다른 민족종교와는 달리 식자층들이 많이 끼어 있었고,

    또 민족정신을 보존하기 위해 국조를 신앙대상으로 삼았다고 볼 수 있다.

    그는 1904년 오기오(吳基鎬:1865~1916)· 이기(李沂:1814~1909) 등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과 유신회를 조직했다.

    그후 기울어져가는 국권을 세우기 위하여 일본에 건너간 그는

    "동양평화를 위해 한·청·일 3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해서는 선린의

    교의로서 부조하자"는 내용을 일본 정계에 전달하고, 3일간 금식 농성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을사조약의 체결 소식을 듣고 귀국하여 조약체결에 협조한 매국노를 저격하려다 실패했다.

    한편 그가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을 때

    서울역 근처에서 백전이라는 노인으로부터 후에 대종교의 경전이 된

    〈삼일신고 三一神誥〉와 〈신사기 神事紀〉를 전해 받은 바 있었고,

    1908년 도쿄[東京]의 한 여관에서 두일백이라는 노인을 만나

    대종교의 중창에 직접적인 계기가 된 단군교포명서를 받았다.

    그해 12월 도쿄의 어느 여관에서 이기호·정훈모 등과 함께 두일백으로부터 영계를 받았다.

    정치적 구국운동에 대한 좌절로 민족종교운동으로 방향을 돌린 나철은 마침내

    1909년 1월 15일 단군대황조신위를 모시고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교를 선포하였다.

    이날을 대종교에서는 중광절이라고 한다.

    당시 그와 함께 활약하던 인물들은 유신회 인물들이거나 호남 출신의 식자층 우국지사들이었다.

    그래서 서민층 중심인 동학이나 증산교에 비하여 대종교를 양반종교라고도 한다.

    교주인 도사교에 추대된 그는 밀계와 오대종지를 발표하여 교리를 정비하고

    교단조직을 개편함으로써 교세 확장에 주력하던 중, 당시 서울 북부지사교를 맡고 있던

    정훈모의 친일행위로 교단 내 내분과 예상되는 일제탄압에 대처하기 위해

    1910년 8월 교명을 단군교에서 대종교로 개칭하였다.

    그 뒤 일제의 종교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국외교포로 교단을 유지하고자

    만주 북간도 삼도구에 지사를 설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에도 힘을 기울여 1911년에 신리대전을 간행했다.

    1914년에는 교단본부를 백두산 북쪽에 있는 청파호 부근으로 이전하고

    만주를 무대로 교세확장에 주력하여 30만 교인을 확보했으나

    일제는 1915년 10월 '종교통제안'을 공포하여 대종교에 대한 탄압을 노골화하였다.

    교단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 그는 1916년 8월 15일 구월산의 삼성단에서

    일제에 대한 항의표시로 49세의 나이로 순교 조천했다.

    자료 출처 : 다음 백과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 선생

     
     
     

    독립운동의 아버지 홍암 나철(弘巖 羅喆) 선생

     

    홍암 나철 선생은 전라남도 보성(寶城) 출신으로 구한말에 29세로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승정원가주서(承政院假注書)와 승문원권지부정자(承文院權知副正字)를 역임하였다.

    일본의 침략이 점차 심해지자, 관직을 사임하고 지사(志士)들을 모아

    1904년 유신회(維新會)라는 비밀 단체를 조직하여 구국운동을 시작하였다.

    을사조약체결 직전인 1905년 6월 오기호(吳基鎬)․ 이기(李沂)․ 홍필주(洪弼周) 등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동양 평화를 위하여 한․일․청 삼국은 상호 친선 동맹을 맺고

    한국에 대하여는 선진의 교의로써 부조(扶助)하라.”는 의견서를 일본의 정객들에게

    제시하였으나 응답이 없자 일본의 궁성 앞에서 3일간 단식투쟁을 하였다.

    그러던 중 이토(伊藤博文)가 조선과 새로운 협약을 체결한다는 소식이 각 신문에 발표되자,

    나라 안에 있는 매국노들을 모두 제거해야 국정을 바로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단도(短刀) 두 자루를 사서 품에 넣고 귀국하였다.

    1906년, 일본의 반성을 다시 한번 촉구하기 위해 도일(渡日)하여

    당시 이토와 대립관계에 있던 오카모토․ 도야마 등을 만나 협조를 구하였으나

    별 효과를 얻지 못하고, 귀국길에 폭탄이 장치된 선물상자를 구입하여

    을사오적을 살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였다.

    1907년 1월부터 암살 계획을 구체적으로 추진하여 3월 25일을 거사일로 정하고

    오적의 주살을 시도하였으나 서창보(徐彰輔) 등이 붙잡히고 사건의 전모가 탄로 되자,

    동지들의 고문을 덜기 위해 오기호․ 최인식(崔寅植) 등과 함께 평리원(平理院)에 자수하여

    10년의 유배형을 받고 무안군 지도(智島)에 유배되었다가 고종의 특사로 그 해에 풀려났다.

    1908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외교적인 통로에 의한 구국운동을 계속하였으나 소득 없이 귀국하였다.

    이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이 민족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절실하게 느끼시던 나철 선생은

    “하늘과 땅과 사람이 하나요, 모든 것은 하나에서 나와 하나로 돌아가니,

    세상에 났으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다가 다시 하나로 돌아가는 것이 우주의 이치”라는

    민족의 경전인 천부경(天符經)과 삼일신고(三一神誥)에 뿌리를 둔

    홍익인간 제세이화의 단군사상을 자각하게 된다.

    곧바로 몇몇 동지들과 뜻을 모아 서울 재동에서 제천의식을 거행한 뒤

    단군의 뜻과 사상을 펼치기 시작하니 그 정신은 급속히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당황한 일제는 1915년 종교통제안(宗敎統制案)을 공포하고 나철 선생의 조직을

    불법으로 규정하여 탄압하니 이로 말미암아 조직의 존폐위기에 봉착하게 된다.

    1916년 8월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이 나라와 민족의 안녕과

    평화를 위한 기도를 마친 뒤 폐식법(閉息法)으로 숨을 거두게 된다.

    그 유해는 일제의 탄압을 피해 활동하던 만주 화룡현 청파호(靑波湖)에 안장되어 있다.

     

    홍암 나철 선생께서 선도수련 최고의 경지인 폐식법으로 돌아가시면서

    민족에게 남기고 가신 예언시가 있다.

    鳥鷄七七 日落東天 黑狼紅猿 分邦南北(조계칠칠 일락동천 흑랑홍원 분방남북)
    狼道猿敎 滅土破國 赤靑兩陽 焚蕩世界(낭도원교 멸토파국 적청양양 분탕세계)
    天山白陽 旭日昇天 食飮赤靑 弘益理化(천산백양 욱일승천 식음적청 홍익이화)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문화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 자유의 극한 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한민족의 밝달도가 하늘 높이 떠올라

    공산, 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교천지산길 284-88 (지산리) 한민족 역사문화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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