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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보령 성주사지(史蹟, 保寧 聖住寺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1. 10. 19:19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성주사지 석등(聖住寺址 石燈)

     

    통일신라 말기에 세운 석등이다.

    지붕돌(屋蓋石, 옥개석)에 비해 등불을 두는 화사석(火舍石)과

    받침 기둥(竿石, 간석)이 가늘게 만들어졌으며, 팔각형 지붕돌 위의 상륜부가 파손되었다.

    높이는 220cm이고 재료는 화강암이며, 파괴되었던 것을 근래 수습하였다.

     

     

     

     

    보물,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五層石塔)

     

    화강암으로 된 이 석탑은 성주사의 불탑으로 만들어진 것이며,

    2중 기단(二重 基壇) 위에 세운 5층 석탑으로 전체 높이는 634cm이다.

    기단부와 옥개석(屋蓋石), 탑신석(塔身石)이 완만하게 균형을 이루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점점 좁아져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경쾌한 모습을 이루고 있다.

    1층 몸돌에 사리공(舍利空)이 있으며 기단부와 1층 몸돌 사이에 굄돌이 있는 것이 특징이다.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의 전형적 석탑 양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것인데,

    이 석탑은 2중 기단 위에 5층 석탑이 올려져 있다.

    이는 이곳이 옛 백제(百濟)의 영역이었으므로 백제탑과 신라탑의 양식이 혼합된 것으로 보거나,

    이 시기에 나타난 다양한 탑 양식 가운데 하나로 보기도 한다.

    현재는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진 상태이다.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성주사지 석계단(聖住寺址 石階段)

     

    통일신라 때 만들어진 것으로 성주사의 금당에 오르는 돌계단이다.

    이 계단 양쪽에는 사자상을 조각하여 세워 놓았는데 그 조각 수법이 뛰어났다.

    그러나 1986년 도난당하고, 현재의 것은 사진을 기초로 복원한 것이다.

     

     

     

     

    금당지 불대좌(金堂址 佛臺座)

     

    오행으로 중앙을 상징하는 황색 또는 금부처님을 상징하여

    고려 초까지는 불전을 금당(金堂)으로 불렀던 것으로 추측된다.

    이후 법당(法堂)이라는 명칭이 쓰였는데, 법당이라는 의미 속에는

    영원한 자유와 진리로 충만한 법의 집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역시 부처님을 모신 전각의 통칭이다. 절의 본당으로 본존불을 모신 건물이다.

     

     

     

     

    보물, 보령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中央 三層石塔)

     

    ​성주사지 금당지 뒤의 3기의 석탑 중 가운데에 있는 탑이다.

    신라는 삼국을 통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상징하려고

    초기에는 튼튼하고 높은 2중 기단(二重 基壇)을 가진 거대한 3층 석탑을 만들었는데,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러서는 3층 석탑의 규모가 작아진다.

    이 석탑은 규모만 축소되었을 뿐 형식은 2중 기단 위에

    3층 석탑을 세우는 통일신라 말기의 석탑 양식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재료는 반려암(斑糲岩)이며, 높이가 410cm이고, 상륜부(相輪部)가 없어졌다.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으며 날카로운 윤곽의 지붕돌이 특징이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藥師如來) 사리탑(舍利塔) 중의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보물,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東 三層石塔)

     

    ​보령 성주사지 동 삼층석탑은 금당(金堂) 터 뒤에 3기의 석탑 중 동쪽에 있는 탑이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사적기(聖住寺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藥師如來) 사리탑(舍利塔) 중의 하나로 추정된다.

    석탑은 중앙 삼층석탑을 중심으로 양 옆에 동 삼층석탑과 서 삼층석탑이 나란히 서 있다.

    국내에는 이와 같은 가람배치는 이례적인 것인데 발굴조사 결과,

    금당 앞에 오층석탑을 세워 1 탑 1 금당 형식의 가람배치를 조성한 후 뒤에

    석탑 3개를 다른 곳에서 옮겨와 추가로 배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이 탑은 2중 기단 위에 세워진 삼층석탑으로 면석(面石)과 몸돌(碑身)에는 기둥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8세기)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1층 몸돌에는 문 그림을 새기고 그 안에 자물쇠와 고리를 도드라지게 새겼는데,

    이는 몸돌 안에 있는 사리공(舍利空)에 부처의 유골이 모셔져 있다는 것을 상징한다.

    이 탑은 상륜부(相輪部)는 없지만 균형 잡힌 비례와 체감,

    우수한 조형성을 갖추고 있어 문화재적 가치가 높다.

    일제강점기부터 옆에 있는 탑은 관리대상 문화재로 등록되었고,

    이어 보물로 지정되어 관리되었던 것과 달리, 이 탑은 문화재로 지정이 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문화재 지정에 누락되었다가 1973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고,

    2019년에는 보물로 지정되었다.

    * 금당(金堂) : 절의 본당, 본존상을 모신 법당, 대웅전(大雄殿)

     

     

     

     

    보물, 보령 성주사지 서 삼층석탑(保寧 聖住寺址 西 三層石塔)

    ​성주사지 금당지(金堂址) 뒤에 3기의 석탑 중 서쪽에 있는 탑이다.

    이중 기단(二重 基壇) 위에 만들어진 삼층석탑으로

    면석(面石)과 탑신석(塔身石)에는 우주(隅柱)와 탱주(撐柱)가,

    지붕돌에는 4단의 층급 받침이 새겨져 있는 등,

    통일신라 말기(9세기)의 전형적인 삼층석탑 양식을 띠고 있다.

    화강암으로 되었으며, 높이는 443cm이다.

    이탑은 지붕돌에 작은 구멍이 있는데. 이는 불교 행사 때 금동판이나

    기타 장식품 등을 매달아 탑의 화려한 모습을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현재 상륜부가 없어졌다.

    이 탑은 승탑(浮屠, 부도)으로 추정되었으나 성주사 사적기(聖住寺 事蹟記)에 적힌 바에 따르면

    정광(定光)·가섭(迦葉)·약사여래(藥師如來) 사리탑(舍利塔) 중의 하나이며,

    발굴조사 결과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으로 밝혀졌다.

    * 우주(隅柱) : 건물의 모퉁이에 세운 기둥

    * 탱주(撐柱) : 쓰러지지 않도록 받치는 기둥

     

     

     

     

    충청남도 문화재자료, 성주사지 석불입상(聖住寺址 石佛立像)

     

    이 불상의 얼굴 모양은 타원형인데 심하게 풍화되어 원래의 모습을 알기 어렵다.

    왼쪽 귀는 없어지고 코는 시멘트로 보수해 전체적인 인상이 일그러졌다.

    오른손을 내리고 왼손을 들어 배에 대고 있는 형태이며 손은 없어졌다.

    입고 있는 법의(法衣)는 양어깨를 모두 덮었으며,

    어깨에서 배까지는 유(U) 자 보양의 무늬를, 양팔 등에는 계단식 무늬를 표현하고 있다.

    고려 후기부터 조선시대 사이에 민불(民佛)로 만들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소박한 모습을 한 불상이다.

    * 민불(民佛) : 권위적인 모습을 모두 배제하여 친밀감이 느껴지는 불상.

     

     
     
     

    국보, 보령 성주사지 낭혜화상탑비(保寧 聖住寺址 郎慧和尙塔碑)

     

    통일신라 말기 성주사에 머무르면서 선문 구산(禪門九山) 중

    성주 산문을 일으킨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를 기리기 위하여

    최치원(崔致遠)이 왕명에 따라 지은 비석으로, 10세기 초에 세워졌다.

    이 비석에는 5,120여 자의 긴 비문이 새겨져 있는데,

    최치원의 화려한 문장을 최인연(崔仁渷)이 해서체로 쓴 것이다.

    내용은 무염대사의 성장과 출가, 중국에 유학하여 공부하는 과정,

    귀국하여 성주사를 일으키고 불법을 전하는 과정 등이 기록되어 있어

    신라 선종사(禪宗史)와 당시의 신분제도 연구 등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남포오석(藍浦烏石)이 재료인 이 비석은 1천여 년의 풍상(風霜)을 견디며

    고스란히 남아 있어 남포오석의 뛰어난 품질을 보여준다.

    이 비는 최치원의 명문장과 완벽한 보존 상태, 뛰어난 조각술

    그리고 웅장한 크기 등이 어우러져 통일신라 말기의

    우리나라 고승 탑비들 중에서 최고의 비로 인정받고 있다.​

     
     
     
     

    석조 부재(石造 部材)

     

    2009년 백제문화재연구원에서 2009년 성주사지 발굴조사를 통해

    수백여 점의 소조불편, 자기류, 명문 기와 등 건물지 2동과 구들, 석조시설, 담장열 등이 출토됐다.

     
     
     
     

    성주사 비(聖住寺 碑)

     

    통일신라 하대 한림랑(翰林郎) 김립지(金立之)가 지은 성주사 비는 사찰의 내력을

    기록한 사비(寺碑)로써 성주사의 연혁과 규모 등을 알 수 있는 소중한 자료로 평가된다.

    조각조각 파손된 비편이 1960년대 이후 차례로 발견돼 현재는 10여 조각이 수습됐으며,

    동국대 박물관 등에 보존돼 있다.

    비석의 머릿돌과 받침돌은 국립 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는데

    이를 통해 신라인의 정교한 조각 솜씨를 볼 수 있다.

     
     
     
     

    사적, 보령 성주사지(史蹟, 保寧 聖住寺址)

    성주사는 백제시대에 오합사(烏合寺)라는 이름으로 세워진 절로

    전사(戰死)한 영령들을 위로하기 위한, 국가 차원의 호국 사찰이었다.

    백제 멸망 후 폐허가 되었다가 통일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선종 불교를 공부하고 돌아온

    무염대사(無染大師, 801~888)가 머무르면서(847~) 다시 크게 일으켰고

    신라 문성왕(文聖王, ?~857)이 성주사(聖住寺)라고 이름을 바꾸었다.

    통일신라 말기에 유행한 선종(禪宗)은 어려운 불경(佛經)을 모르더라도

    수양(修養)을 잘하기만 하면 마음속에 있는 불성을 깨달을 수 있다고 하는 불교 종파이다.

    그리하여 많은 백성의 지지를 받아 크게 유행하였고,

    선종 불교의 큰 중심지 절이 전국에 9개가 세워졌는데 이를 구산선문(九山禪門)이라고 한다.

    이 전국 구산선문 중의 하나가 성주산문이며, 그 중심지가 성주사이다.

    특히 성주산문은 구산선문 중에서도 가장 규모가 컸고 많은 승려를

    배출한 최대의 산문이었으며, 무염대사는 당시 최고의 선종 승려였다.

    성주사는 조선시대에 임진왜란을 겪으며 쇠퇴하다가 17세기 말 이후 폐사되었고,

    지금은 그 터와 많은 유물이 남아 있어 옛 성주사의 모습을 짐작하게 된다.

    발굴조사 결과 중문 – 석등 – 오층석탑 – 금당의 불대좌 – 강당으로 이어지는

    1탑 1금당 가람배치(伽藍配置)에, 오른쪽은 삼천불전지(三千佛殿址),

    왼쪽은 다른 불전지의 평면구성을 하고 있다.

    이터에는 국보인 대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大朗慧和尙 白月葆光塔碑)를 비롯하여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충실히 반영한 1개의 오층석탑과 3개의 삼층석탑이 남아있다.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3 성주사지

     

     

    ※ 구산선문(九山禪門)

    신라 말기부터 고려 초기까지인 9~10세기 당나라에 들어가 구법 선승들이

    중국 달마(達磨)의 선법을 이어받아 그 문풍을 지켜 온 아홉 산문으로

    구산선문이 나타나기까지 당시 신라 말기에는

    왕실과 중앙 귀족의 절대적인 후원을 받으며 유행했다.

    육조 혜능(六朝 慧能)의 남종선(南宗禪)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구산선문은

    직지인심(直旨人心), 견성성불(見性成佛), 교외별전(敎外別傳)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혁신적인 선사상을 과감하게 표명했다.

    구산선문은 수도 경주와 멀리 떨어진 산간 오지에 산문을 개산함으로써

    지방호족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게 됐다.

    또, 신분 고하를 묻지 않고 생산 노동에 나선 선종 본래의 사원 노동과

    선승들의 드높은 수도 정신은 일반 민중들의 광범위한 지지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구산선문의 전개는 신라 중기시대 교학 불교의 한계를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사상체계로 선을 정립시키는 역사적인 원동력이 됐다는 점에서

    한국불교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가지산문(迦智山門) - 전남 장흥 보림사(寶林寺) 도의국사(道義國師)

    실상산문(實相山門) - 전북 남원 실상사(實相寺) 홍척국사(洪陟國師)

    동리산문(桐裏山門) - 전남 곡성 태안사(泰安寺) 혜철국사(慧徹國師)

    희양산문(曦陽山門) - 경북 문경 봉암사(鳳巖寺) 도헌국사(道憲國師)

    봉림산문(鳳林山門) - 경남 창원 봉림사(鳳林寺) 현욱국사(玄昱國師)

    성주산문(聖住山門) - 충남 보령 성주사(聖住寺) 무염국사(無染國師)

    사굴산문(闍崛山門) - 강원 강릉 굴산사(崛山寺) 범일국사(梵日國師)

    사자산문(師子山門) - 강원 영월 법흥사(法興寺) 도윤국사(道允國師)

    수미산문(須彌山門) - 황해 해주 광조사(廣照寺) 이엄국사(利嚴國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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