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보물,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2. 5. 23. 19:05

    보물, 남지기로회도(南池耆老會圖)

     

    이기룡(李起龍), 1629년, 비단에 색, 116.7×72.4cm, 서울대학교박물관

     

    장맛비가 그쳤다. 처마 위로 맑은 하늘이 드러나고 가벼운 바람이 배롱나무꽃을 뒤흔든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청량함이다. 오늘 중요한 모임이 있는 줄 알고 천기까지 도와주는 듯하다.

    1629년(인조 7) 6월 5일, 12명의 기로(耆老)들이 남대문 밖 홍첨추(洪僉樞)의 집에 모이기로 했다.

    기로는 60세 이상의 노인을 뜻한다.

     

    연지를 감상하기 위해 모인 12명의 기로

    12명의 기로는 이인기(李麟奇), 윤동로(尹東老), 이유간(李惟侃), 이호민(李好閔), 이권(李勸),

    홍사효(洪思斅), 강인(姜絪), 이귀(李貴), 서성(徐渻), 강담(姜紞), 유순익(柳舜翼), 심론(沈惀) 등이다.

    이 중 68세인 심론을 제외하고 모두 70세가 넘었다. 안타깝게도 유순익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했다.

    12명은 임진왜란(1592), 정유재란(1597), 계축옥사(1613), 인조반정(1623), 이괄의 난(1624),

    정묘호란(1627) 등 끊임없이 발생한 국가적 재난에 적극적으로 대처해 큰 공을 세운 중신들이다.

    기로들이 오늘 첨추벼슬을 한 홍사효의 집에 모인 이유는 단순하다.

    그의 집에서 남대문 밖 에 있는 연지(蓮池)가 보이기 때문이다.

    연지는 불기운이 있는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누르고자 나라에서 만든 관지(官池)다.

    한성부에는 동지, 서지, 남지, 어의동지, 경모궁지 등 5개의 연지가 있었는데

    서지와 남지는 특히 연꽃이 유명했다.

    홍사효의 집은 남지를 관람할 수 있는 최고의 ‘뷰포인트’였다.

    남지는 오랜 장마로 물이 가득 찼고 해가 뜨니 활짝 핀 연꽃에서 향기가 흘러나온다.

    어릴 적부터 친했던 반가운 얼굴들을 보는데 날씨까지 받쳐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마음이 흡족해진 기로들은 시녀들의 시중을 받으며 느긋하게 앉아 있다.

    좌석은 관직순이 아니라 나이순으로 배치했다.

    궐내에서 주최한 공식적인 행사가 아니라 사적 모임이니 장유유서를 따르기 위함이다.

    모임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었다.

    이귀가 이 모임을 그림으로 그려 각자의 집에 한 장씩 보관하자고 했다.

    이귀의 제안에 모두가 한마음으로 찬성했다. 참석하지 못한 유순익의 그림도 제작하기로 했다.

    그렇게 해서 전부 12점의 그림을 제작되었고 현재는 5점만이 현존한다.

    그중 서울대박물관 소장본에만 유일하게 ‘이기룡사(李起龍寫)’라는 관지가 적혀 있어

    1629년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울대박물관소장본을 살펴보면 상단에 전서체로 ‘남지기로회도’라는 제목이 적혀 있고,

    제목 아래에 기로회 장면을 그렸다. 그림 아래 하단부에는 행서체의 지문(識文)과

    해서체의 좌목(座目)이 단을 이루어 배치되었고 양옆에는 해서체로 서문을 적었다.

    기로회 장면을 그린 그림은 건물과 연지를 동일한 비중으로 안배했다.

    연지 앞쪽에는 양 옆에 버드나무를 세워 운치를 더했으며 불필요한 공간은 구름으로 덮었다.

    그림 하단에는 남대문을 2층 지붕만 보이게 그려 이곳이 남지임을 암시하였다.

    기로회가 열리는 구체적인 장소가 강조되는 이런 구도는 인물은 작게 그리고

    배경 전체를 압축해서 보여주던 조선 전기의 양식과는 차이가 보인다.

     

    귀한 벗들과 보내는 소중한 시간

    많은 학자들이 이 작품을 보고, 지배층 문인들이 과거에 함께 근무했던 동료들을

    다시 만난 기념으로 계회 장면을 그려 후손들에게 전해주었다는 데 초점을 맞춘다.

    혹은 자손들이 부모의 강녕을 기리고자 축수의 의미로 제작했다고도 해석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러나 그것만이 전부는 아닐 것이다.

    무엇보다도 계회에 참석한 기로들의 마음이 가장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혹시 이런 느낌은 아니었을까. 이백(李白)은 「봄날 밤 도리원 연회에서 지은 시문의 서」에서

    ‘무릇 천지는 만물이 쉬어가는 여관이요/ 시간은 긴 세월을 지나가는 나그네라/

    부평초 같은 인생 꿈 같은데 즐긴다 한들 얼마나 되리’라고 탄식했다.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 구절이 별로 마음에 와닿지 않을 것이다.

    나이가 들면 다르다. 남지기로회에 참석한 기로들은 한 사람을 제외하고 모두 70이 넘었다.

    그들 모두 언제 떠날지 모르는 여생을 보내고 있다. 사람들은 그들을 고위 관직을 거친

    국로(國老)라고 부러워하지만 죽음을 목전에 둔 노인들에게 과거의 영화는 허망할 뿐이다.

    당장 내일이라도 아니 오늘 밤에라도 숟가락을 든 채 인생이라는 여관을 떠날 수도 있는

    나그네의 심정일 것이다. 그래서 기로들은 모두가 한결같은 심정으로 연꽃을 감상했을 것이다.

    오늘 본 연꽃을 내년에도 다시 볼 수 있을까. 이번 모임이 마지막일 수도 있으니

    눈앞에 앉아있는 벗들이 어찌 귀하고 소중하지 않겠는가.

    <남지기로회도>는 지금은 떠나고 없지만 당시를 치열하게 살았던

    12명의 노인들의 생을 한 장의 그림으로 생생하게 증언한다.

    삶은 이렇게 소중하고 아름다운 거라고 강변하면서 말이다.

    이런 시간을 지금 우리가 살고 있으니 잘 살아야겠다.

    - 조정육(미술평론가)

     

    * 문화재청 월간지 ‘문화재사랑’ 2022년 5월호(210호)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