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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청와대 국민 품으로
    국내 나들이/관광지(觀光地)로 2022. 6. 8. 19:05

    청와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청와대로 1 (세종로)

     

    경복궁역(서울 지하철 3호선) 4번 출구

    청와대 가는 길

     
     
     
     

    경복궁역 4번 출구에서 청와대 입구까지 1km (도보 약 15분)

     
     
     
     

    김정희 본가터(金正喜 本家址)

     

    추사(秋史) 김정희(1786~1856)는 조선 말기의 이름 높은 학자이자 서예가, 화가이다.

    이곳은 그의 증조부인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과

    화순옹주(和順翁主) 때부터 경주김씨 본가가 있던 터이다.

    2014년 11월

    위치 : 서울특별시 종로구 적선동 8-4

     
     
     
     

    迎秋門(영추문)


    경복궁의 서쪽문인 영추문은 ‘가을을 맞이한다(迎秋)’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과 대비되는 개념의 이름으로 서쪽 방위의 개념에 맞게 지어졌다.

    이 문은 주로 문무백관이 출입하던 곳으로,

    특히 서쪽 궐내각사(闕內各司)에 근무하던 신하들이 많이 이용하였다.

    임진왜란 때 소실됐다가 조선 후기 고종의 집권 시기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다시 지어졌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때인 1926년 전차 노선이 만들어진 뒤 석축(石築)이 무너지면서 철거됐고,

    현재의 문은 1975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된 것이다.

    연추문(延秋門)이라고도 불린다.

    송강 정철(鄭澈,1536~1593)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의

    “연추문 드리다라 경회남문 바라보며 하직하고 물러나니”라는 표현에도 등장했다.

     
     
     
     

    인왕산(仁王山)

     

    조선 개국 초기에 서산(西山)이라고 하다가 세종 때부터 인왕산이라 불렀다.

    인왕이란 불법을 수호하는 금강신(金剛神)의 이름인데,

    조선왕조를 수호하려는 뜻에서 산의 이름을 개칭하였다고 한다.

    서울의 진산(鎭山) 중 하나이다.

    일제강점기에 인왕산의 표기를 인왕산(仁旺山)이라 하였으나,

    1995년 본래 지명인 인왕산(仁王山)으로 환원되었다.

    경치가 아름다워 서울시민들의 유원지였으나

    군사 상의 이유로 출입이 통제되었지만 1993년부터 개방되었다.

    인왕산은 조선시대의 명산으로 숭앙되었으며,

    조선 초기에 도성을 세울 때 북악(北岳)을 주산(主山), 남산(南山)을 안산(案山),

    낙산(駱山)과 인왕산을 좌우 용호(龍虎)로 삼아 궁궐을 조성하였다.

     

     
     
     

    청와대 영빈관(靑瓦臺 迎賓館)

     

    이 터는 원래 경복궁(景福宮)의 후원(後苑)으로서 1893년(고종 30) 이곳에 경농재(慶農齋)를 짓고,

    그 집 앞을 팔도를 상징하는 의미로 8등분(等分)하여 황제(皇帝)께서 친히 농사를 지으면서

    각 도의 농형(農形)의 풍흉(豊凶)을 살피시던 팔도 배미였다.

    이 자리에 청와대 영빈관을 지은 지 20년 후인 1998년 10월 주변에 산재해 있던

    노후 건물들을 정비하기 시작하여 2000년 6월에 이곳을 새롭게 단장하였다.

    여기에 때마침 평양에서 열린 첫 남북정상회담(2000.6.13~15)이 평화통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민족의 염원을 담아 옛 궁궐 정전(正殿) 앞뜰의 삼도(三道, 御道 및 左右 步廊)와

    전 국토를 상징하는 8개 권역을 표시하여 새로운 한 마당을 만들었다.

     

     
     
     

    청와대 영빈관은 대규모 회의와 외국 국빈들을 위한 공식 행사를 열었던 건물이다.

    외국의 대통령이나 수상이 방문했을 때 우리나라를 알리는 각종 민속공연과 만찬 등이

    베풀어지는 행사장으로 쓰이거나 회의와 연회를 위한 장소로도 사용되었다.

    2층에도 1층과 똑같은 홀이 있는데 1층은 접견장으로, 2층은 만찬장으로 이용하고 있다.

    영빈관은 18개의 돌기둥이 건물 전체를 떠받들고 있는 웅장한 형태이며,

    특히 앞의 돌기둥 4개는 화강암을 통째로 이음새 없이 만들어 2층까지 뻗어 있으며,

    높이가 13m에 둘레가 3m인 기둥이며 내부는 무궁화·월계수·태극무늬가 형상화되어 있다.

     

     
     
     

    대통령 집무실, 청와대 본관(靑瓦臺 本館)

     

    1층에는 영부인의 집무실과 접견실, 무궁화실, 인왕실이 있고,

    1층 별채에는 충무실, 세종실이 있으며, 2층에는 대통령의 집무실과 접견실, 백악실, 집현실이 있다.

    본관 앞에는 넓은 잔디 마당이 있는데, 대통령이 참석하는 야외 행사에 주로 사용된다.

    국빈 환영식이 대부분 여기서 진행된다.
    본관이 완공된 노태우 정부 시절부터 대통령 집무실이 위치한 본관과

    비서실이 위치한 여민관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어 대통령과 비서관 사이의

    소통에 문제가 있다는 주장이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옛 궁궐 양식에 대입해 보면, 전면 9칸에 지붕 처마 끝에는 잡상이 11개가 올려져 있다.

    황제의 격에 맞는 건축이다.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의 정전, 근정전은 전면 5칸에 처마에는 잡상 9개를 올렸다.

     

     

     

     

     

    靑瓦臺(청와대)의 이 터전은 高麗朝(고려조)의 離宮(이궁)으로

    朝鮮朝(조선조) 景福宮(경복궁)의 後苑(후원)으로

    千年(천년)에 걸친 歷史(역사)의 숨결이 깃든 곳이다.

    日帝(일제)가 우리의 옛 건물들을 헐고 이곳에 지은 總督(총독)의 집을

    國家元首(국가원수)가 建國(건국) 이후 이제껏 써왔다.

    盧泰愚 大統領(노태우 대통령)은 1988년 12월 27일 民族文化(민족문화)의 傳統(전통)을 잇고

    드높아진 나라의 位相(위상)에 어울리는 靑瓦臺(청와대)를 新築(신축)토록 하였다.

    官邸(관저)가 1990년 10월 25일 完工(완공)되고 本館(본관)이 1991년 9월 4일 준공되니

    天下(천하)에 으뜸가는 福地(복지) 위에 겨레의 앞날을 무한히 밝혀 줄

    靑瓦臺(청와대)가 새로 지어졌다.

     

     
     
     

    청와대 구본관 터

     

     

     

     

    天下第一福地(천하제일복지)

     

    경무대(景武臺, 구 본관) 터

    삼각산(三角山)의 정기를 이어받아 북악(北岳)을 거쳐 경복궁(景福宮) 쪽으로 길게 뻗어 내린 이곳은

    일찍이 명당으로 알려져 고려 숙종 9년(1104년) 왕실의 이궁(離宮)이 자리 잡았던 곳이다.

    조선 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後苑)으로 왕궁을 지키기 위한 수궁(守宮)과 융문당(隆文堂),

    융무당(隆武堂), 경농재(慶農齋), 벽화실(碧華室), 오운각(五雲閣) 등 총 232간(間)의 건물과

    임금이 친히 논을 일궈 농사가 국사의 근본임을 일깨운 8배미의 논이 있었다.

    이 가운데 융문당과 융무당이 있던 높은 터를 경무대(景武臺)라 불렀다.

    예로부터 천하제일복지(天下第一福地)라고 알려졌던 이곳 명당 터에

    일제(日帝)는 1939년 7월 총독 관사(總督館舍)를 건립하여

    우리의 민족정기 단절을 획책(劃策)함으로써 이 건물은 경복궁 내의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청사와 더불어 외세 침탈의 상징이 되었다.

    총독 관사는 해방 후 1948년 3월까지 미군정(美軍政) 사령관 숙소로 사용되었으며,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에는 초대 이승만 대통령 등 역대 대통령들의 집무실 및

    관저로 이용되었으나 1990년 10월 관저를 건축했고

    다음 해 9월에는 본관 건물을 새로 지어 옮김에 따라 빈집으로 남게 되었다.

    1993년 11월 민족정기를 바로 잡고 국민들의 자긍심을 되살리기 위해

    구 총독 관사 건물을 철거한 후 옛 지형 그대로 복원해

    원래 이 터의 이름을 따라 경무대(구 본관) 터라 하였다.

     
     
     
     

    절병통(節餠桶)

     

    구 본관터에 놓여있는 절병통은 1983년 구 본관 남쪽에 현관을 지으면서

    현관 기와지붕에 올렸던 장식이다.

    절병통은 한옥 지붕 중 모임지붕 중심에 놓는 호리병 모양의 장식을 말한다.

    1993년 건물 철거 당시 구 본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그 자리에 남겨둔 것이다.

     
     
     
     

    주목(朱木)

     

    주목과, Rigid-branch yew

    '살아 천 년 죽어 천 년'이라고 할 만큼 오래 산다.

    목재는 임금님의 널이나 고급 활의 재료가 되고 항암제인 택솔(Taxol)을 추출한다.

     
     
     
     

    仁壽門(인수문)

     

    청와대 관저의 정문으로 이 문을 드나드는 사람은 어질고 장수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대통령의 생활공간, 청와대 관저(靑瓦臺 官邸)

     

    청와대 관저는 1990년 10월 25일 완공된 전통 한옥의 건물로

    대통령과 그 가족들이 생활하는 공간인 만큼 그동안 가장 공개가 안 된 공간이다.

    전속 사진사 정도만 내부를 찍을 수 있었는데 노무현 전 대통령 때 세 번 공개한 것이 유명한 일화다.

    문재인 전 대통령도 취임 직후 관저 입구인 인수문 앞에서 출근하는 모습을 공개한 바 있다.

    생활공간인 본채(내실), 접견 공간인 별채(외실), 전통 양식의 뜰과 사랑채로 구성되어 있다.

    이전에는 구 본관 2층을 대통령 관저로 사용하였다.

     
     
     
     

    淸安堂(청안당)

     

    청안당은 관저의 별당(사랑채)으로 청와대에서 가장 편안한 곳이라는 뜻이 담겨 있다.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오운정(五雲亭)

     

    오운정은 경복궁 후원에 휴식을 위해 지은 정자로,

    자연의 풍광이 신선 세계와 같다고 하여 '오색구름'을 뜻하는 오운(五雲)이라는 이름이 지어졌다.

    이 건물이 언제 지어졌는지 정확히 알려 주는 기록은 없으나,

    고종 4년(1867) 경복궁을 다시 지은 이후의 모습을 그린 ‘북궐도형(北闕圖形)’에

    나타나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 이후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위치는 현재보다 아래쪽에 있었으나, 1989년 대통령 관저를 신축할 때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이 정자는 정사각형 건물로, 지붕은 네 모서리가 한 꼭짓점에 모이는 사모지붕 형태로 되어 있다.

    주위에 난간을 두르고 있으며, 사방에 문을 내고 문짝을 들어 올려

    자연스럽게 주변의 아름다움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였다.

     
     
     
     

    보물,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慶州 方形臺座 石造如來坐像)

     

    경주 방형대좌 석조여래좌상은 한국 불교조각 중 가장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표현한

    석굴암 본존상을 계승하여 9세기경 통일신라 시대에 조성되었다.

    자비로운 얼굴, 당당하고 균형 잡힌 신체, 풍부한 양감 등에서

    통일신라 전성기 양식을 엿볼 수 있어 ‘미남불’로도 불렸다.

    머리에는 크고 높은 지혜를 상징하는 육계(肉髻)가 솟아있으며,

    양 눈썹 사이에는 무량세계를 비추는 부처님의 광명을 백호(白毫)로 표현했다.

    목에는 세 줄의 주름인 삼도(三道)가 뚜렷한데,

    이는 번뇌(煩惱), 업(業), 고(苦) 등 윤회의 인과를 의미한다.

    법의(法衣)는 오른쪽 어깨를 드러낸 편단우견(偏袒右肩)으로 걸쳐 입었다.

    왼손은 무릎 위에 얹고 오른손 손가락으로 땅을 가리키는 손 모양,

    즉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은 석가모니가 모든 번뇌를 끊고 깨달음에 이른 경지를 상징한다.

    독특한 연꽃 문양이 새겨진 사각형 대좌는 이 시대의 작품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로 매우 독창적이다.

    이 불상은 본래 경주에 있었는데 일제에 의해 1913년경 서울 남산의 왜성대(倭城臺)

    총독 관저에 놓였다가 1930년대 총독 관저가 지금의 청와대 자리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졌다.

    1974년 서울특별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되어 관리되어 오다가, 2017년 6월부터

    역사적 고증과 가치 재평가 등을 통해 2018년 4월 20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승격되었다.

     

     
     
     

    백악교(白岳橋)

     

    청와대 뒷산은 북악산(北岳山, 해발 342m)으로 백악산(白岳山)으로 불린다.

    그래서 청와대 상춘대 주변에 조성한 공원에는 사계철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초가 정자(草家 亭子)와 백악교(白岳橋)가 조성되어 있다.

     
     
     
     

    상춘재常春齋) 앞에 있는 노주석(불우리, 불자리)이다.

    노주석은 지금의 가로등처럼 관솔불을 밝혀 조명을 하던 시설물이다.

    사찰 등지에서는 노주(露柱), 노주석(露柱石),

    서원이나 향교에서는 정료대(庭燎臺), 그밖에 소대(燒臺) 등으로 불린다.

     
     
     
     

    상춘재(常春齋)

     

    상춘재라는 이름은 '항상 봄이 머무는 집'이라는 뜻으로.

    상춘재 현판은 서예가 일중 김충현(一中 金忠顯, 1921~2006) 선생이 썼다.

    상춘재는 청와대 안에서 외빈 접견 등에 사용되는 전통적인 한옥 건물이다.

    비공식 회의 장소로 이용되는 상춘재는 청와대 경내에 최초로 건립된 전통 한옥으로서,

    주기둥에는 200년 이상 된 춘양목(홍송)을 사용했다.

    이전까지 청와대 외국 손님에게 소개하지 못했던

    한국의 가옥 양식을 보여 줄 수 있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대통령 문재인, 김정숙  기념식수

    2019년 4월 8일

     

     

     

     

    녹지원(綠地園)

     

    청와대 경내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으로 120여 종의 나무가 있으며

    역대 대통령들의 기념식수가 있는 곳이다.

    이곳은 원래 경복궁의 후원으로 농사를 장려하는 채소밭이 있었고

    일제 총독관저가 들어서면서 가축사육장과 온실 등이 조성되었는데

    1968년에 약 1,000여 평의 평지에 잔디를 심어 야외 행사장으로 이용했다.

    매년 봄 어린이날 행사를 시작으로 어버이날, 장애인의 날 등 각종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고 있으며,

    1995년 5월 28일에는 인근 주민 약 3,000여 명을 초청하여 KBS 열린 음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또 주변에는 녹지원을 상징하는 소나무인 한국산 반송이 있는데

    수령은 약 3백여 년에 이르며 높이는 16m이다.

    연혁을 보면 옛 경복궁의 후원으로 채소밭·가축사육장·온실 등의 부지였으며

    과거시험을 보는 장소로도 이용되었는데 국내외 귀빈 및 외교사절단을 위한 야외 행사장,

    5월 5일 어린이날 행사장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청와대 헬기장

     

    대통령이 집무를 보기 위해 이용하던 대통령 전용 헬기 이착륙 공간이다.

     

     
     
     

    청와대 춘추관(靑瓦臺 春秋館)

     

    언론에 심심찮게 등장하는 건물로 국내외 언론사 기자 300여 명이 출입하는 청와대 프레스센터이다.

    맞배지붕에 기와를 얹고 솟을대문과 고각을 세워 전통 건축양식을 부각시켰다.

    1층에는 기자실과 작은 브리핑 룸, 2층에는 대형 브리핑 룸이 있다.

    춘추관이란 명칭은 고려와 조선시대 시정(時政) 기록을 맡아보던 관청 이름에서 비롯된 것으로

    엄정하게 역사를 기록한다는 ‘자유언론’의 정신을 담고 있다.

     
     
     
     

    청와대 국민 품으로

     

    약속을 담다. 역사를 그리다. 문화를 펼치다. 희망을 나누다. 자연을 품다. 전국을 누리다.

     
     
     
     

    춘추문(春秋門)

     

    청와대의 기자회견장인 춘추관(春秋館)의 정문

     
     
     
     

    建春門(건춘문)

     

    건춘문은 경복궁 궁성의 동쪽 문으로 만물의 기운이 움트는 ‘봄이 시작된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건춘문은 주로 세자와 동궁 영역에 위치한 각사에서 일하는 신하들이 출입하던 문이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으로 불탄 뒤 270여 년간 방치되었다가 현재의 문은

    고종 2년(1865년) 경복궁 중건 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건립된 것이다.

    현판 글씨는 고종 때 관료인 이경하(李景夏, 1811~1891)가 썼다.

     

     
     
     

    청와대 경내 안내도

     
     
     
     

    청와대, 국민 품으로

     

     

     

     

    청와대 주변 위성지도

     
     
     
     

    청와대의 역사

     

    청와대는 서울의 중심부이자 구도심인 경복궁 북쪽에 북쪽에 위치해 있다.

    이곳은 고려시대(918~1392)부터 궁궐로 사용되었고,

    조선시대(1392~1910)에는 경복궁의 후원이 있었다.

    고종 5년(1868년) 경복궁이 중건되면서,

    문무가 융성하길 기원하는 의미로 경무대(景武臺)라 이름 붙였다.

    일제강점기 이 자리에 총독 관저가 들어섰고, 해방 후에는 미군정 사령관이 머물기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통령 집무실 겸 관저로 사용되었으며,

    1960년 푸른 기와집이라는 뜻의 ‘청와대’로 이름을 개칭했다.

    1991년 지금의 본관이 들어서며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대한민국 청와대의 주소는 서울시 종로구 청와대로 1번지입니다.

    북악산을 배경으로 자리 잡고 있으며,

    시청과 종로·을지로 등 도심 사무실 밀집지역의 북쪽에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12월 20일 ‘광화문 1번지’로 정해졌었는데,

    광복 다음 해 1946년 1월 1일부터 일본식 주소가 한국식으로 바뀌면서

    ‘세종로 1번지’가 되었습니다.

     
     
     
     

    고려시대 이궁(離宮)이 있던 자리

    청와대 부근이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고려 숙종 때인

    1104년 무렵 고려의 이궁이 이곳에 들어서면서부터입니다.

    고려는 풍수지리설에 따라 도읍이었던 개경(지금의 북한 개성)과 함께

    서경(평양), 동경(경주)의 세 곳을 삼경으로 두었는데

    숙종 때 동경 대신 이곳에 이궁을 설치하고 남경으로 삼았습니다.

    남경이란 ‘남쪽의 서울’ 이란 뜻이 담겨 있습니다.

     

    조선시대 경복궁의 후원터

    청와대 자리가 다시 역사에 등장한 것은 조선의 건국과 함께

    도읍을 옮기자는 주장이 시작되면서부터였습니다.

    조선의 첫 임금인 태조 이성계는 1394년 새로운 서울을 세우기 위한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이라는 특별 기구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관리들을 보내 궁궐터를 찾아보게 했는데

    고려 숙종 때의 이궁 자리는 너무 좁아서 새로 궁궐을 짓기가 어려우므로

    좀 더 남쪽으로 내려가서 궁궐을 지어야 한다고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즉, 오늘날의 청와대 터에서 좀 더 내려간 평지에 왕궁을 짓기로 한 것이지요.

    태조는 그 해 12월 정도전으로 하여금 궁궐 짓는 일을 시작하도록 했고

    이듬해에 본격적으로 시작하여 9월에 궁을 완성하였습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궁이 바로 경복궁입니다.

    경복궁이 완성된 뒤 세종 8년인 1426년 현재의 청와대 자리에

    경복궁의 후원(뒤뜰)이 조성되었습니다.

    이때 후원에는 서현정, 연무장, 과거 시험장이 만들어졌습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경복궁과 이곳은 완전히 폐허가 되었습니다.

    경복궁과 그 후원인 지금의 청와대 근처는 270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의 노력으로 다시 지어졌습니다.

    이 당시에 함께 건축되어 후세까지도 이름을 남기게 된 경무대도 지어졌는데,

    경무대는 창덕궁 후원의 춘당대 뒤를 이어

    인재를 등용하는 ‘과거장’으로서의 기능을 이어갔습니다.

    경복궁은 고종 33, 건양 1(1896)년 소위 아관파천으로

    고종 황제가 경운궁으로 떠나자 정궁으로서의 위상이 급속히 추락했습니다.

    고종이 이어(移御)한 경운궁은 대한제국 황궁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 증축했습니다.

     

    일제 강점기 시대 청와대 자리

    1929년 조선총독부 통치 20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조선박람회가 경복궁과 옛 후원 자리에서 열리면서

    이곳의 조선시대 및 대한제국 건물들은 대부분 철거되었습니다.

    일제는 1937년부터 1939년에 걸쳐 조선박람회 이후 한동안 공원으로 남아있던

    옛 후원 자리에 조선 총독의 관사를 지었습니다.

    이후 조선 총독의 관사 일대를 경무대라고 불렀습니다.

     

    경무대에서 청와대로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뒤 이승만 대통령 내외는

    이화장에서 일제 총독관저였던 경무대로 거처를 옮겼습니다.

    경무대는 제4대 윤보선 전 대통령 때부터 ‘청와대’라는 지금의 이름을 가지게 되었고

    오늘날까지 푸른 기와의 청와대로 불리고 있습니다.

     

     

     

     

    청와대 교통편

     

    3호선 경복궁역 3번 출구 앞 ‘경복궁역 정류장’에서 1020번, 1711번, 7016번,

    7018번, 7022번, 7212번 버스를 타고 2개 정류장을 지나 ‘효자동 정류장’에서 하차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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