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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도세자 진혼제 (思悼世子 鎭魂祭)...수원 화성행궁
    수원사랑/문화예술(文化藝術) 2007. 7. 14. 22:00

    사도세자 진혼제 (思悼世子 鎭魂祭)

     

    수원 화성행궁사도세자 진혼제가 2007. 7.12(목) 저녁에 수원 화성행궁에서 열렸다.

     

    사도세자는 어려서부터 영특하였고, 이미 정치에 대한 안목도 뛰어나

    당시,집권세력이었던 노론자들이 처결한 바 있는 신임사화를 비판하기도 하였다.

    또한, 사도세자는 무예에도 출중하여 조선무예의 기본이라 할수있는

    지상무예 18가지를 도보로 정리한 "무예신보"를 편찬하도록 하였다.

     

    사도세자는 1749년(영조 25년)에 부왕을 대신하여 서정을 대리하게 되었다.

    그러자 그를 싫어하는 노론들과 이에 동조하는 계비 정순왕후 김씨,숙의 문씨 등이 영조에게 그를 무고하였다.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을 맡기 전까지는 영조와 성격상의 차이가 있기는 했지만

    효심과 우애심이 두터웠고, 왕세자로서의 도량과 덕을 겸비하여 영조로부터 극찬을 받기도 하였다.

    그러나, 대리청정에 임하게 되면서 세자는 행동에 형평을 잃고 비 정상적인 성격이 나타나게 되었다.

     

    1761년 사도세자는 임금 모르게 관서지방을 유람,순행하고 돌아왔다.

    이때,노론 세력들은 사도세자의 행동이 체통에서 벗어났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영조는 사도세자의 관서순행에 관여한 자들을 모두 파직시켰다.

     

    이러한 일들로 인해 영조는 사도세자를 폐하여 서인으로 하고,세자와 영빈의

    간청에도 불구하고 뒤주에 가두어 죽게하였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결국 노.소론의 당쟁에서 비롯되었다.

    즉,남인.소론 등이 영조와 정치적 견해를 달리하는 세자를 앞세워 보수적인

    성격이 짙은 노론 정권의 전복을 꾀하다가 실패한 사건이었다.

     

    영조는 뒤에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는 시호를 내리고 장례때는 친히 나아가

    스스로 신주에 제주를 하면서 나라의 앞날을 위해 부득이한 조치였음을 알리기도 하였다..

     

    그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 후 사도세자를 장헌으로 추존하였다.

    이후 1899년 사도세자는 다시 장조로 추존되었다

    이렇듯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던 사도세자의 비운의 죽음을 애도하며

    그의 아들 정조의 효심으로 태어난 화성의 건설을 기리고자

    사도세자의 영혼을 달래주는 것이 진혼제이다.

     

     

     

     

    사도세자 진혼제가 열린 수원 "화성행궁" 정문 앞

     

     

     사도세자가 죽은 뒤 245년에 처음 열린 진혼제

     

     

     전국 각지에서 약2,000 여명의 관객이 처음 열리는 진혼제를 보기 위해 찾아왔다.

     

     신명나는 굿판이 시작되고...

     

     

     

     

    중요무형문화재 제82-나호 보유자 김금화(金錦花)선생의 진혼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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