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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범 김구선생 동상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8. 2. 10. 05:52

    백범 김구선생 동상

     

     

    1. 백범의 약력 

    항일운동가이며 정치가였던 백범은 1876년 7월 11일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京橋莊)에서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무참히 저격되었다. 아명은 창암(昌岩),

    본관은 안동이다.

    2. 백범의 생애(활동) 

    백범은 15세에 한학자 정문재에게서 한학을 배웠고, 1893년(고종 30년) 동학에 입교하여 접주(接主:교구 또는 포교소의 책임자. 포주 또는 장주라고도 함)가 되고 1894년 팔봉도 소접주가 되어 동학혁명군에 가담하여 싸웠으나 청나라와 일본의 개입으로 패배하였다. 

    동학혁명군이 패배한 그 다음해부터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날 즈음, 백범은 비록 소년 장군의 몸이었으나 동학에서 불 붙어온 왜놈에 대한 적개심으로 왜놈 장교를 맨손으로 때려 눕혔다. 그리고 그의 칼을 빼앗아 왜놈의 가슴에 꽂고 거기서 흘러 나오는 피를 빨아먹은 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백범의 의로운 행위는 비단 개인의 그것이 아니라 우리 민중의 성향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백범은 을미년 명성황후 살해 사건 때 일인에게 시해 당한 명성황후의 원수를 갚고 자

    일본 육군 중위 쓰치다를 살해한 사건으로 말미암아 체포되어 사형이 확정되었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감형되었다. 복역중 1898년에 탈옥하여 공주 마곡사의 중이 되었다가 1899년 환속, 1903년 크리스트교에 입교하였다.

      1909년 안악 양산학교 교사로 있다가 1910년 신민회에 참가하고, 1911년 이른바 『105인 사건』으로 체포되어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감형으로 1914년 출옥하여 농촌 계몽 활 동을 하였다.

      3·1운동 후에 상해로 망명하여 임시정부 조직에 참가하여 경무국장·내무총장을 역임하 고 1926년 6월 임시 정부의 국무령으로 취임하였다. 이때부터 백범은 즉각적으로 임시정 부를 항일무장 유격전의 본거지로 근본적인 개편을 해나갔다.

      1928년 이 시영, 이 동녕 등과 한국 독립당을 조직, 당수가 되었다. 이로부터 항일 무력 활동을 시작하여 결사단체인 "한국 애국단"을 조직하고, 1932년 사쿠라다몽 일본 국왕 저 격 사건, 상해 홍구공원 일본 국왕생일 축하식장의 폭탄 투척 사건 등 이봉창, 윤봉길 등 의 의거를 지휘하였다.

      1941년 일제가 드디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게 되자 세계 정세는 일변하게 되었다. 이에 임시 정부는 그해 12월 9일 바로 일제가 전란을 일으킨 다음 날, 즉각적으로 대(對)일본 선전포고를 하였다. 1945년에는 대한민국이란 국명으로 대일 선전포고를 하는 한편, 광복 군 산하 낙하산 부대를 편성하여 본국 상륙 작전을 실시하다 해방을 맞았다. 결국 광복군 훈련에다 열중하다 해방을 맞았을 뿐, 백범의 유격 전술은 국내에서 불을 당기지는 못 하 였다. 해외에 있던 백범도 "올 것이 너무 일찍 왔구나!"하고 땅을 치며 울 정도였다. 

    1945년 8월15일, 일제가 패망하였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임시정부의 광복군이 있었고 또한

    우리민족으로 구성된 무장군대가 있었음에도 해방조국에는 우리군대가 아닌 미군과 소련군이 '일본군의 무장해제'라는 명분으로 진주하였다. 이것이 결국 민족 분단의 계기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백범이 해방 후 최초로 맞은 시련은 미군에 의한 임시정부의 해체와 신탁통치 문제 그리고

    단독정부수립주의자와 싸우는 자주통일의 노력으로 직결되어 갔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38선을 베고 쓰러질
            지언정 일신의 구차한 안일을 위하여 단독정부를 수립
            하는데 협력하지 않겠다. 

    백범은 단독정부 수립반대와 통일조국의 의지를 강력히 보여 주었다. 1948년 남한만의 단독

    정부를 수립한다는 UN의 결의에 반대하여 통일정부의 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고,

    38선을 넘어 정치회담을 벌였으나 그 결실을 맺지는 못하였다. 

    1946년 6월 26일 육군 포병 소위 안두희에게 피살당한 백범은 국민장으로 효창공원에 안장되고 1962년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 중장이 추서 되었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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