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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장공 권율 도원수상 (忠莊公 權慄 都元帥像)..권율장군 동상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7. 12. 25. 19:04

    충장공 권율 도원수 (忠莊公 權慄 都元帥) 1537년~1599년

    행주산성(幸州山城)은 임진왜란때 충장공 권율 (忠莊公 權慄) 도원수의 대첩지이다.

    권율은 안동. 자 언신(). 호 만취당() ·모악(). 시호 충장().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가 되고, 전적()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과 방어사(使)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과 유격전()을 우키티 히데이에[]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에게 시흥 금주산()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우너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에 영가부원군()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충장공 권율 장군동상은 1986년 8월에 역사적 고증을 거쳐 세워진 장군의 동상으로 근엄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이 동상의 높이는 4.5m이며 기단이 3.5m로 총 8.0m이며 조각상 은 김세중(1928~1986)작이다.

    이 동상 뒤 쪽에는 관군, 승병, 의병, 여성들의 항전모습을 새긴 부조가 있다.

    임진왜란(壬辰倭亂,1592~1598)이 일어 난 다음해인 1593년(선조 26년)1월,우리군과 명군은 반격을 펼쳐서 북상했던 왜군을

    격퇴시켜 서울로 퇴각시켰다. 그러나 왜군은 1월 27일 벽제관 싸움에서 명군을 깨뜰자 다시 사기가 올랐다.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은 이미 1592년 11월부터 5천의 군대를 이끌고 수원 독산성(禿山城)에 진을 친 뒤 서울에 머물고 있는 왜군을 후방에서 위협하다가 조방장 조경(助防將 趙儆), 승군장 처영(僧軍將 處英)과 함께 2천3백의 정예군을 이끌고 행주산성(幸州山城)으로 옮겨 목책을 세워 요새화하고 남하하는 우리군과 합세하여 서울을 수복하려고 하였다.

    1593년 2월 12일 새벽, 서울에 집결하였던 왜군이 벽제관(碧蹄館) 승리의 여세를 몰아 3만의 대군을 7대로 나누어 행주산성을 총 공격 하였다.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공격하며 선봉대를 교대로 투입하는 왜군을 우리군은 권율 장군의 지휘하에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면서 격전을 벌였다. 우리군은 수차의 왜군 공격을 모두 격퇴하였고, 왜군은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상자를 내게되자 시체를 네곳에 쌓아 불태우고 오후 5시경 퇴주하였다.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이 행주대첩은 관군,의병,승군,부녀자(여성)의 총력전으로서 임진왜란의 전세를 뒤 엎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우리나라 대외 항전사에 길이 빛나고 있다.

     

     

     

    관군(官軍)

    권율 장군이 가장 높은 지휘소에서 왜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왜군이 목책(木柵)에 접근하였을 때에 큰 북을 세 번치자 우리군은 활을 쏘고, 차포는 일제히 불을 뿜었다. 왜군은 많은 사상자를 내면서도 죽음을 무릅쓰고 교대로 산성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을 넘으려 했다. 이에 권율 장군은 큰 칼을 뽑고 진두지휘하니 전군의 사기는 더욱 높아졌다.

     

     의병(義兵)

    의병은 왜군을 격퇴하기 위하여 민간인으로서 구성 된 군대였다. 행주산성의 의병은 전라도 순찰사 권율 장군을 따라 온 전라도 의병이 많았다. 의병은 관군에 비해 무장이 허술하고 훈련이 부족하였지만 사기는 훨씬 높아 칼, 도끼 등을 들고 관군과 함께

    공방전을 펼쳤다.적이 목책에 불을 놓으면 물로 불을 끄고 화살이 다하면 돌로 적을 쳤다.

     

     

    승군(僧軍)

    승군은 승려의 몸으로 전투에 참가한 군대였다. 승군장 처영이 이끄는 승군은 행주산성의 서북쪽에 있는 자성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왜군이 계곡으로 올라와 조총을 쏘며 목책에 불을 질러 한때 목책의 진지가 위태로웠다. 이때에 권율 장군이 진두지휘하고 승군장 처영이 독전하자 승군은 육박전으로 왜적을 쳐서 끝내 그들을 격퇴시켰다.

     

    여성(女性)

    우리 군은 산성위에서 화포와 강궁을 쏘고 큰 돌을 굴리면서 올라오는 적을 막았다. 싸움이 오랬동안 계속됨에 따라 포탄과

    화살이 다하고 돌마져 떨어지게 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이 치마로 돌을 날라주어 돌로 싸움을 계속할 수 있었다고 한다.

    부녀자들의 호국에의 의지가 싸움을 승리로 이끌었다 하여 그 후부터 “행주치마”라는 말이 더욱 유명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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