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사랑/축만제(祝萬堤)
-
-
-
운치있는 축만제의 노송(老松)수원사랑/축만제(祝萬堤) 2021. 8. 20. 19:20
운치있는 축만제의 노송(老松) 수원 축만제(水原 祝萬堤) - 경기도 기념물 시대 : 조선시대 / 지정일 : 2005.10.17. 축만제는 1799년(정조 23년) 화성의 서쪽 여기산 아래 길이 1.246척, 너비 720척이라는 당시로는 최대크기로 조성된 저수지이다. 이에 앞서 정조는 1795년 장안문 북쪽에 만석거(萬石渠)를, 1797년에 화산 남쪽의 사도세자 묘역 근처에 만년제(萬年堤)를 축조했었다. 대규모 수리시설과 둔전 개간이 크게 성공하자 정조는 만석거와 만년제의 3배 규모에 달하는 축만제를 조성하였고, 개간된 둔전에서 얻은 수익은 화성을 수리하는 비용으로 사용하였다. 축만제는 천년만년 만석의 생산을 축원한다는 뜻으로써 화성 서쪽에 있어 일명 서호(西湖)로 불린다. 정조시대의 농업기반시설은 일제강..
-
수원 서호공원, 축만제에서수원사랑/축만제(祝萬堤) 2021. 7. 22. 21:05
수원 서호공원, 축만제(祝萬堤)에서 조선 제22대 정조대왕은 만석 쯤 되는 많은 소출을 바라는 의미에서 만석거(萬石渠)라는 이름을 붙인 저수지를 축조하고 더욱 크게 만년(萬年)을 가는 조선을 축원하며 축만제(祝萬堤), 만년제(萬年堤)라는 저수지를 만들었다. 그 저수지에서 국가 경제의 근간이 되는 농사 개량과 수차(水車) 개발이 진행되었다. 1799년(정조 23) 조성된 축만제(祝萬堤)는 수원의 서쪽에 있다하여 서호(西湖)라 불렸다. 만석거의 영화정이 명소가 되었지만 수원의 외곽에 위치한 규모가 큰 저수지였던 서호는 실질적인 농사에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1831년(순조 31) 수원유수 박기수(朴綺壽)가 축만제를 굽어볼 수 있는 언덕에 정자를 지어 ‘항미정(杭眉亭)’으로 명명하면서 상황은 바뀌..
-
항미정 현판(杭眉亭 懸板)수원사랑/축만제(祝萬堤) 2021. 7. 11. 20:14
2019년 12월에 새롭게 제작 설치한 항미정 현판 근당 양택동(槿堂 梁澤東) 선생의 글씨 항미정(杭眉亭) - 수원시 향토유적 제1호 항미정은 축만제(서호)에 있는 정자로 순조 31년(1831) 당시 화성유수였던 박기수(朴綺壽, 1774~1845)가 현재의 자리에 건립하였다. 박기수는 1831년 2월 21일 화성유수에 임명되어 이듬해 1832년 윤 9월 4일 대사헌으로 이임하기까지 11개월간 재임하면서 항미정을 창건하였을 뿐만 아니라 화성지(華城誌)를 편찬하기도 하였다. 항미정이라는 이름은 중국 시인 소동파(蘇東坡)의 시구(詩句)에 "서호(西湖)는 항주(杭州)의 미목(眉木)과 같다"라고 읊은 데서 그 이름을 따서 지었다고 한다. 항미정의 구조는 남북으로 ㅡ자형 4칸과 전퇴(前退)가 있는 건물을 기본구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