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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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유사(龍潭遺詞)와 동학군 토벌 명령 문서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1. 2. 23. 19:28
용담유사(龍潭遺詞) - 동학의 기본 경전 최제우(崔濟愚.1824∼1864)가 지은 동학의 포교가사집(布敎歌詞集)이다. 최제우는 그가 깨친 후천개벽사상을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따를 수 있도록 한글로 쓰고, 가사의 형식을 빌려 표현했다. 현재는 불평등하고 부조라한 세상이지만 다가올 세상은 평등하고 공명정대한 살기 좋은 문명 세상이 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동학군 토벌 명령 문서(東學軍 討伐 命令 文書) 1895년 1월 29일에 동학도의 토벌을 담당한 호남초토사(湖南招討使) 민종렬(閔種烈)이 도내 각 읍에 내린 문서이다. 4읍마다 한 통(統)으로 편성하여 동학도 소탕에 만반의 준비를 하고 작통성책(作統成冊)을 즉시 작성하여 보고하라는 내용이다. 서울특별시 용산구 서빙고로 137 (용산동 6가), 국립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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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성 황룡전적(長城 黃龍戰蹟) - 사적 제406호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20. 7. 20. 19:11
1894년의동학농민혁명은 반외세의 자주독립과 반봉건의 민주화를 지향한 우리 나라 근대사의 서막이요 민족 민주 운동의 단서였다. 장성 황룡싸움은 바로 이 동학농민혁명에서 농민군이 대포 등 신무기로 무장한 서울의 정예부대를 격파하고 전주를 쉽게 점령할 수 있었으며 왕의 군대를 무찔러 혁명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싸움에서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동학농민군은 대나무를 원통형으로 엮어 만든 장태라는 신무기를 굴려 총알을 막으면서 관군에 육박하여 선봉장 이학승을 죽이고 대포 2문과 양총 100여 정을 빼앗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는 민족과 국가를 위해 농민대중이 일으킨 동학농민혁명에서 가장 빛나는 이 싸움의 의미를 되새기며 그 정신을 계승 발전시키고 이를 영원히 기념하고자 우리 모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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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농민혁명기념공원(東學農民革命記念公園)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20. 7. 17. 04:47
보은의 동학도 의병봉기를 계획 1894년 8월 2일 보은 사각면(현 탄부면 고승리) 냇가에는 동학도 수백명이 하늘을 뚫는 의기로 집결했다. 보은군수 정인량이 집결지를 찾아오자 산골짜기 집회장소로 안내한 동학인들은 국가의 위기를 맞아 관민이 함께 창의할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군이 경복궁을 침범한지 10일만에 보은에서 처음으로 의병봉기에 나선 것이다. 이와 같은 계획은 동학 두령인 임규호. 황하일. 이관영. 김재현이 주도하였다. 동학의 대도소가 위치했던 보은은 대규모 무장봉기를 결정한 뒤 충청도, 경기도, 강원도, 경상도의 수많은 동학농민군이 모여드는 충성의 무대로 떠오른다. 보은은 국가가 큰 위기에 처했을 때 앞장선 외로운 지역이었다. 아 우리는 보은의 의지를 깊이 새겨 역사의 교훈으로 삼자. 전쟁의 참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