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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義)에 살고 의롭게 가신 분 "의암 손병희선생"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8. 11. 30. 18:28
의(義)에 살고 의롭게 가신 분 "의암 손병희선생"
의암 손병희 선생은 동학.천도교지도자이자 독립운동가로 초명은 응구(應九), 호는 의암(義菴),
본관은 밀양(密陽),충청북도 청주(淸州) 출신이며 의조(懿祖)의 서자이다.
1882년(고종 19년) 동학에 입교하여 2년후 교주 최시형(崔時亨)을 만나 그의 수제자로서 착실한 신도가 되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운동때 통령(統領)으로 북접(北接)의 동학교도들을 이끌고 남접(南接)의 전봉준(全琫準)과
논산(論山)에서 합세하여 호남.호서를 석권하고 북상하여 관군(官軍)을 격파하였다.
그러나 공주(公州) 우금치전투(牛金峙戰鬪)에서 일본군의 개입으로 패배하자 함경도.평안도 지역으로 은신하였다.
1897년부터 최시형의 후임이 되어 3년간 지하에서 교세확장에 힘썼으며
1901년에는 일본을 경유.중국 상하이(上海)로 망명하여 이상헌(李祥憲)으로 개명하였다.
다시 일본으로 건너가 오세창(吳世昌),박영효(朴泳孝) 등을 만나 국내 사정을 듣고 1903년 귀국,
두차례에 걸쳐 청년들을 선발하여 이들을 데리고 일본에 건너가 유학시켰다.
1904년 개혁운동을 목표로 권동진(權東鎭). 오세창 등과 진보회(進步會)를 조직하고,
이용구(李容九)를 파견, 국내 조직에 착수하였다.
진보회는 회원 16만명을 확보하고 전 회원에 단발령을 내리는 등 신생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듬해 이용구가 배신하여 친일단체 유신회(維新會)와 합한 일진회(一進會)를 조직하고 을사조약에 찬성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이에 손병희는 귀국하여 일진회와 무관함을 밝히고 이용구 등 친일파 62명을 출교(黜敎)하였다.
1906년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제3대 대도주(大道主)에 취임하여 교세확장을 운동을 벌이는 한편,
출판사 보성사(普成社)를 창립하였으며, 보성(普成).동덕(同德) 등의 학교를 인수하여 교육사업을 하였다.
정교분리를 내세워 종교활동만을 전개하여 점차 교세가 약화되고 재정도 궁핍해졌다.
1908년 박인호(朴寅浩)에게 대도주를 인계하고 수도에 힘쓰다가 3.1운동때 민족대표 33인으로 참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탑골공원은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 2가 38~1번지 있는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공원으로 탑공원(塔公園).
탑동공원, 파고다공원 등으로 불리고 있는데 이곳에는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이 건립되어 있다.
여기 서 계신 이 어른은 민족의 스승이요 천도교 제3세 교조인 의암 손병희 선생 이시다. 비록 일생을
풍운속에서 지났으되 산같은 대의는 흔들리지 않았고 큰 뜻으로 역사를 움직여 이름을 천추에 드리운 이다.
선생은 1861년 4월 초8일에 청주에서 탄생하여 22세에 동학에 들어 창생을 제도하려는 포부를 기르더니
34세에는 썩은 정치를 맑히려 혁명의 깃발을 들었고, 37세에는 교조의 법통을 이어 받았다.
그러다 국치의 날을 만나서는 10년동안 투사를 기르며 때를 기다리더니 1919년 3월 1일 각계대표 33인을
결속하여 국민전체의 피묻은 만세운동을 일으킴으로써 역사민족의 의기를 세계만방에 널리 떨치고
그로 인하여 철창의 몸이 되어 신고하다가 병으로 보석되어 1922년 5월 19일에 62세로써 환원하시었다.
우리는 정성껏 여기 이마 숙여 절하고 노래를 바친다.
정의의 채찍을 쥐고 가시밭 헤치신 이여, 자유의 횃불을 들고 길을 이끄신 이여,
겨레의 역사와 함께 길이 사시오리다. (의암 손병희선생 동상에 새겨진 내용)
의암 손병희 선생의 동상은 면적:28.06평방미터, 좌대는 가로 6m. 세로4.5m 높이 0.5m이고 전체높이는 3.3m이다.
1919년 기미년(己未年) 3월 1일 정오 태화관(泰和館)에서 독립선언서(獨立宣言書)의 첫 함성(喊聲)과
파고다공원에서의 독립만세의 절규는 삽시간에 전국 방방곡곡으로 파급되어 이후 수개월에 걸쳐
민족의 피어린 독립만세운동으로 전개되었고 이렇게 뿌려진 독립운동의 씨는 멀리 해외에 있는
망명지사(亡命志士) 등의 피어린 독립운동으로 연장되었다.
의암 손병희선생은 동지들과 함께 서대문형무소에 구속되어 2년여의 옥고(獄苦)를 치르던 중
병보석(病保釋)으로 출감(出監)하여 상춘원(常春苑)에서 1922년 5월 19일 62세를 일기로 서거(逝去)하였다.
민족정기를 살리기 위해 교육사업에 헌신하였던 선생은 사후(死後)에 유산(遺産)이라고는 한푼도 없었으니
그는 참으로 의(義)에 살고 의롭게 가신 분이시다.
격동하는 국제관계와 시대조류에 적응하여 민족교육의 선구적 역할까지 겸해 온 의암(義菴) 손병희(孫秉熙) 선생은
송진우, 최남선 등과의 제휴와 기독교(基督敎), 불교(佛敎) 등 모든 종교계(宗敎界)와 제휴하여 3·1독립만세운동을
추진하여 통일전선을 완료하였으며 독립만세운동의 방향은 최린의 제의대로 “대중화·일원화·비폭력화”에 두고
이 3대원칙을 근간(根幹)으로 민족정기(民族正氣)의 발원을 천명한 독립선언서는 최남선(崔南善)에게 위촉하여
기초작성(起草作成)되었고 그것은 곧 2만1천장이 인쇄되어 전국 각지로 전달되는 등
독립운동 전야(前夜)까지에 모든 거사를 준비하여 3.1운동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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