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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나석주 의사(羅錫疇 義士)"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08. 12. 3. 21:04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한 "나석주 의사(羅錫疇 義士)"

     

                   나석주(羅錫疇) - 1892(고종 29)∼1926


    독립운동가. 황해도 재령출신. 아버지는 병헌(秉憲)이며, 어머니는 김씨(金氏)이다.
    16세에 재령군 북율면 진초리의 보명학교(普明學校)에 입학하여 2년간 수학하고, 그뒤 농사를 지었다.
    1910년 일제가 우리나라의 주권을 강탈하자 이에 비분강개하여 주권회복에 신명을 바칠 것을 맹세하였다.

     그리하여 23세에 만주로 건너가 북간도 나자구(羅子溝)의 독립군양성학교인 무관학교(武官學校)에 입학, 군사훈련을 받았다.

    1919년 국내에 들어와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일본경찰에 붙잡혔다.
    그뒤 일제의 감시가 심해지자 사리원으로 옮겨 겉으로는 정미업을 경영하면서 동지들을 규합, 독립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김덕영(金德永)·최호준(崔皓俊) 등 50명의 동지들과 비밀항일결사를 조직하고

    무기를 구입한 뒤 군자금 모금활동, 친일파 숙청공작을 전개하였다.

    이들은 사리원의 부호 최병항(崔秉恒)과 안악의 부호 원형로(元炯潞)로부터

    독립운동자금을 건네받아 중국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송금하였다.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단원들과 악질 친일파인 은율군수를 처단하는 등 크게 활약하였다.
    이들의 활동이 봉산·사리원·황주·재령·안악 등 황해도 일원에 확대되자 일본경찰은 감시를 강화하였다.

    이에 국외로 탈출할 것을 계획, 상해로 망명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

    김구(金九)가 지휘하는 경무국 경호원으로 임명되어 임시정부와 정부요인의 경호를 담당하였다.
    1923년 정식 군사교육을 받기 위하여 중국 허난성(河南省) 한단(邯鄲)의

    중국 육군군관단강습소(陸軍軍官團講習所)에 입교하여 사관훈련을 수료하였다.
    이듬해 중국군 장교로 임관되어 중국군으로 복무하다가 1925년 상해로 돌아와 임시정부에서 활동하였다.
    1926년 톈진(天津)에 본부를 두고 활동하던 항일독립운동단체인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그해 6월 톈진에 체류하고 있던 민족지도자 김창숙(金昌淑)으로부터 경제침탈의 총본산인

    동양척식주식회사(東洋拓殖株式會社)·조선은행·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을 폭파, 파괴하여

    일제의 경제침탈을 응징하는 것이 무엇보다 시급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김창숙·유우근(柳佑瑾)·한봉근(韓鳳根)·이승춘(李承春) 등과 협의, 구체적인 거사계획을 마련하였다.
    1926년 12월 중국인 노동자 마중덕(馬中德)으로 변장한 뒤 인천으로 잠입하였다.

    조선식산은행을 폭파하기 위하여 폭탄을 투척하였으나 불발로 실패하였다.

    곧이어 동양척식주식회사를 공격하였다.

    그곳에서 권총을 사용하여 여러 명의 일본인을 사살하였으나 투척한 폭탄이 불발,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일본경찰의 추격을 받자 소지하였던 권총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중상을 입고 쓰러졌다.

    일경이 즉시 병원으로 긴급 이송하여 이름을 묻자 자기의 성명과 의열단원임을 밝히고 순국하였다.

    후에 장남 응섭(應燮)이 백운학(白雲鶴)으로 개명하여 중국으로 탈출, 임시정부에 보고하였다.


     

     

    나석주의사(羅錫疇義士) 의거 기념터

    1926년 12월 나석주의사가 일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에 투탄(投彈)하고 일본경찰과 총격전중 자결한 곳


     

     

     

    나석주열사의 생애와 의거(羅錫疇烈士의 生涯와 義擧)

     

    나석주열사(1892~1926)는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강탈당한 주권과 자유와 경제를 되찾기 위하여

    1926년 12월 28일 경제침략의 본거지인 조선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한 후

    장렬하게 자결하여 우리 겨례에게 민족혼을 일깨우고 세계 만방에 일제의 수탈을 고발하였다.

    나열사는 최후의 순간 "나는 조국의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2천만 민중아 쉬지말고 분투하라" 고 절규하였다고 전한다.

     

    나열사는 황해도 재령에서 태어나 3.1운동과 독립군 군자모금에 가담한 뒤

    중국에 망명하여 임시정부와 의열단에 참여했고 김구.김창숙선생으로부터

    사명을 받아 거사를 결행하여 마침내 거룩한 애국혼이 되었다.

                   나석주열사기념사업회와 민족정기회는 우리민족의 독립과 행복을 위한

    열사의 장거를 기려 그 현장에 이 동상을  세운다.


     

     

    나석주 의사는 1892년 황해도 재령군 북율면에서 출생,

    1910년 백범 김구 선생이 세운 양산학교에서 수학하고, 1913년 한인무관학교를 졸업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난 후 재령에서 시위를 주동하다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1920년에는 김덕영, 최호준, 최세욱, 박정손, 이시태 등과 함께 6인의 권총단을 조직하여

    군자금 모금활동을 벌였고, 1920년 11월 22일 상해 임시정부의 경무원, 의정원 등에 근무하였으며

    한인애국단, 의열단에 가입하여 기관 폭파활동과 군자금 모금활동을 전개했다.

    특히 그는 1926년 5월 김구, 김창숙 등과 논의하여 민족혼을 일깨우기 위해서는

    국내의 일제기관과 친일부호들을 제거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일제의 착취기관이었던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를 폭파할 목적으로 1926년 12월 26일 인천항을 통해

    서울로 잠입해 활동하였으며, 이틀후인 12월 28일 하오 2시에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들어가

    폭탄을 던지고 권총으로 일본인들을 사살한 후 시가전을 벌이다가 35세의 나이로 자결했다.
    정부에서는 1962년 그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나석주의사의 동양척식회사 조선식산은행 투탄(投彈)은 그 목적이 일제의 경제착취 기구를 폭파하여 일제의

    경제적 수탈행위를 응징하려는 데에 있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의를 갖는 의거(義擧)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 동양척식회사(東洋拓殖會社)는 대한제국 말기 일제가 조선의 경제를 독점 착취하기 위하여 설립한 기구로서

    자본과 권력을 이용하여 1924년까지 약 80,000정보(町步)의 토지를 강점 소유하므로서 농민들의 원부(怨府)가 되었다.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은 농공은행(農工銀行)을 병합하여 동양척식회사의 자매기관으로 출발,

    농촌 및 산업기관을 상대로 경제 침략의 구실을 맡아하던 일제의 어용 금융기구였다.

    따라서 이러한 경제 침략기구에 대한 의거(義擧)는 경제 파탄, 생활고로 허덕이던

    한민족의 원한을 풀어줄 수 있는 일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석주의사는 신체가 강건하고 의협심이 강해  일찌기 일제의 횡포와 침략을 미워하여

    20세 이전에 벌써 같은 또래의 소년들과 함께 배를 타고 중국 방면으로 나가

    배우고 활동하려 하다가 일제 경찰에 붙들려 여러 달 동안의 옥고를 치른 바도 있었고,

    3 1독립운동 때에는 겸이포에서 만세시위에 앞장 섰다가 구금되었으며,

    그 후로는 다시 집을 사리원으로 옮기고 각처의 동지들과 연락하면서 독립운동에 앞장 섰다.

     

     

    의사(義士)와 열사(烈士)의 차이점

     

    의사(義士)는 일제강점기 시절에 우리민족에게 피해를 준 일본인, 매국노 등에게

    총이나 폭탄 등을 이용하여 직접적으로 독립을 한 분들이며,

    대표적인 항일 의사(義士)들은 안중근,이봉창,윤봉길,김상옥,나석주,김익상,편강렬,강우규 등이 있다.

     

    열사(烈士)는 총이나 칼, 폭탄 등의 무기를 이용해 독립을 한 것이 아닌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따지며 시위,집회, 운동 등으로 독립운동을 한 분들이다.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긴 했으나,의사처럼 광대하게 영향을 미치진 않았다.

    대표적으로는 3.1운동의 주모자 유관순 등과 , 헤이그 특사의 이준 열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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