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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락보전의 다른 이름인 "무량수각(無量壽閣)"수원사랑/문화예술(文化藝術) 2009. 1. 5. 20:24
극락보전(極樂寶殿)의 다른 이름인 "무량수각(无量壽閣)"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이라는 현판으로
이 현판 글씨는 추사가 제주도 유배 중에 쓴 것으로 무량수각과 함께 노완(老玩)이라고 쓴 낙관이 새겨져 있다.
무량수각(无量壽閣)은 아미타불(阿彌陀佛)을 봉안하는 전각이며 극락보전(極樂寶殿)의 다른 이름이다.
이 편액은 추사(秋史) 김정희의 필적으로 유명한데, 같은 모각이 해남 대흥사와 서울 운현궁 등에 전한다.
김정희 특유의 예서풍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예로 특히 마지막 "각(閣)"자의 "문(門)"을 좌우로 바꾼 것이 흥미롭다.
김정희는 1786년(정조 10년) 6월 3일 충남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태어났다.
추사의 생가는 오석산(용산)의 화암사 부근으로 증조부 월성위(月城尉)와 증조모 화순옹주의 묘소도 근처에 있다.
화순옹주는 여조의 둘째딸로 조선왕조 최대 비운의 주인공 사도세자의 누이동생이다.
훗날 그녀의 조카 정조는 화순옹주를 위하여 조선왕조 처음 나온 열녀라하여 열녀문을 세워주웠다.
추사의 본관은 경주. 자는 원춘(元春), 호는 무수히 많으나 추사를 비롯하여
완당(阮堂), 예당(禮堂), 노과(老果), 천축고선생(天竺古先生) 등이 유명하다.
추사는 아버지 병조판서 노경(魯敬)과 어머니 기계 유씨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으나,
큰아버지 노영(魯永) 앞으로 입양되었다.
어린 시절의 추사는 무척 똑똑했던 모양으로,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어느날 당시 채제공이 추사의 집앞을 지나가다가 대문에 써붙인 입춘첩(立春帖)을 보았다.
그는 그 글씨가 보통이 아님을 알고 문을 두드려 물었다.
마침 김노경이 있다가 깜짝 놀라 뛰쳐나와서는 아들의 글씨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채제공이 말했다. "이 아이는 필시 명필로서 이름을 한 세상에 떨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글씨를 잘쓰게 되면 반드시 운명이 기구할 것이니 절대로 붓을 잡게 하지 마시오.
그러나 만약 문장으로 세상을 울리게 하면 크게 귀하게 되리라."
그 어린 신동의 운명은 나중에 과연 채제공의 예언대로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추사는 어린 시절을 주로 서울 통의동에 있던 월성위궁에서 보냈다.
그러다가 1800년 열다섯의 나이로 한산 이씨를 부인으로 맞이하여 혼례를 올렸다.
그렇지만 그 전후 무렵 추사에게는 견디기 어려운 시련이 꼬리를 물고 이어졌으니,
할아버지와 양아버지가 이미 죽은 데다가 결혼 이듬해인 1801년에는 생어머니마저 죽고
다시 1805년에는 부인 한산 이씨마저 갑자기 세상을 뜨고 말았다.
한마디로 추사의 십대 시절은 집안의 여러 흉로 무척 쓸쓸했다고 하겠다.
추사는 1808년 스물셋의 나이로 예안 이씨와 재혼했다.
다행히 둘 사이는 금슬이 무척 좋아 나중에 추사가 귀양 갔을 때에도 언제나 마음의 위안을 받게 된다.
추사의 생부 노경이 호조 참판을 지내던 중 1809년 중국 연경(북경)에 보내는 동지부사(冬至副使)로 선임되자,
그때 사마시험에 합격했던 추사는 외교관의 아우나 자식에게 부여되는 자제군관의 자격으로 따라가게 되었다.
이 일은 추사의 인생에 엄청나게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추사를 연구한 일본인 학자 후지츠카 도나요리는 청나라 경학과 고증학을 연구하던 중 조선과 청의 지식인
학자들이 교류하는 과정에 흥미를 갖고 방대한 자료를 섭렵하는데, 그 연구 결과 이렇게 결론을 내린 바 있다.
"특히 박제가의 제자로 조선 5백년 역사상 보기드문 영재 완당 김정희가 출현하여 연경에 가서 옹방강과 완원
두 경사(經師)를 알게 되고, 여러 명현들과 왕래하여 청조 학문의 핵심을 잡아 귀국하자 조선의 학계는 실사구시의
학문으로 빠른 진전을 보여 5백년 내로 보지 못했던 빠른 진전을 보게 되었다." 외국인 연구자가 이렇게 말할
정도로 추사는 최초의 연경행을 통해서 자신의 능력을 한껏 발휘하게 되는 것이다.
추사는 연경에 두달 남짓 머무르지만, 그동안 당대 제일급에 속하는 학자와 예술가들을 무수히 만났다.
특히 연경학계의 원로로서 당대 제일의 금석학자로 널리 알려진 옹방강(翁方綱, 1733-1818)은 추사의 비범함을
한눈에 알아보고 그를 일러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고 찬탄을 아끼지 않을 정도였다.
또 한 사람의 대학자 완원(阮元, 1764-1848)은 완당(阮堂)이라는 호까지 지어주며 애정을 보였다.
두 사람은 추사에게 자신들이 지니고 있던 무수한 금석문 자료들을 기꺼이 선사했을 뿐만 아니라,
추사가 학문적 호기심을 보이는 모든 분야에서도 가능한 자료를 구해주는 데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그 두 사람 이외에도 무수한 학자, 예술가들이 추사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추사는 그들과의 만남에 얼마나 감격했는지, "내 낳은 곳은 미개한 나라 진실로 촌스러우니,
중국의 선비들과 사귐에 부끄러움이 있네"라고 사대주의적인 느낌마저 드는 이별시를 남길 정도였다.
어쨌거나 수레 가득히 선물을 싣고 돌아온 추사는 이제 어제의 우물안 개구리가 아니었다.
그는 선물로 받아온 학술자료며 예술품 등에 대한 연구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는 우선 고증학 분야에서 탁월한 능력을 펼쳐보였다.
1816년 북한산에 올라가 진흥왕 순수비를 새로 발견한 것이 그 첫 업적이었다.
아울러 탁본을 연구하여 황초령 순수비도 고증했다.
그런 연구 결과는 [예당금석과안록(禮堂金石過眼錄)]으로 집대성되었다.
추사의 학문세계는 한마디로 '실사구시'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실사구시는 흔히 실학의 캐치프레이즈로서 이해되는 "현실에 즉해서 참을 구한다"라기보다는
"사실에 의거해서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라고 이해되어야 한다.
그가 중국에서 배운 바가 있다면 철저히 사실에 의거하고자 애쓰는 학문자세였고,
그것이 이제 추사의 학문 태도에도 어느새 깊숙이 뿌리박혔던 것이다.
그는 금석문뿐만 아니라 천문, 경전 등에 대한 연구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하지만 불행히도 그는 자신의 학문에 대한 논저를 상대적으로 많이 남기지는 않았다.
연경학계와의 교류는 연경에서 돌아온 이후에도 꾸준히 지속되어
그들은 서로 자신들이 필료로 하는 자료를 요구하고 또 보내주었다.
그런 과정에서 추사는 중국에서 보내주는 금석문의 글씨체를 연구하여
마침내 저 유명한 추사체를 이루는 데 성공하는 것이다.
1819년 추사는 서른넷의 나이로 과거 시험 대과에 합격하여 마침내 출세길로 접어든다.
그는 규장각 대교(待敎), 충청우도 암행어사, 의정부 검상(檢祥=정5품),
예조 참의(參議=정3품) 등을 거쳐 44세 때에는 시강원 보덕(輔德)에 이른다.
한편 그의 부친 김노경은 연경에서 귀국한 후 20년 동안 공조판서, 형조판서,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판의금부사, 평안감사에 이르기까지 요직 중의 요직만을 두루 거치는 영예를 누렸다.
1830년 김노경이 64세 되던 해 부사과(副司果) 김우명이 비인현감때
추사에게 파직당한 구원을 잊지 못하고 비열한 탄핵을 시작했다.
당시 왕이던 순조는 추사 가문을 적극 비호했지만 반대파의 공격 또한 만만치 않아
결국 김노경은 강진현 고금도에 위리안치되는 귀양살이를 떠나고 말았다.
김노경은 1년 뒤에야 겨우 귀양에서 풀려났다. 부자는 한동안 벼슬길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다가 김노경은 1838년 세상을 드고, 추사는 그 이듬해 병조참판에 올랐다.
그렇지만 다시 벼슬길에 올라 승승장구하는가 싶던 그에게 다시 시련이 닥쳐온다.
김노경을 탄핵했던 안동 김씨들이 다시금 공격을 개시한 것이었다.
순조는 이번에도 추사를 옹호하였으나,
당시 안동 김씨들의 세력은 왕의 그런 권위까지 무시로 넘볼 정도였다.
추사는 마침내 혹독한 고문을 당하게 되고, 죽음 일보직전에서야
풀려나 제주도로 귀양살이를 떠나게 되었다.
추사는 귀양길에 해남 대둔사(대흥사)에 들러 친하게 지내던 초의(草衣)선사를 만났다.
그는 침계루(枕溪樓)라는 누각의 현판과 대웅보전의 현판을 당장 떼어내라고 초의에게 말했다.
그것들은 당대 대중적 인기를 한몸에 받고 있던 원교 이광사의 글씨였던 것이다.
하지만 추사가 보기에는 원교야말로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장본인 이었던 것이다.
추사는 직접 붓을 들어 '대웅보전' 네 글자를 써주었고,
거기에 보태 '무량수각' 현판까지 새로 써주며 그것들을 걸라고 했다.
추사는 귀양에서 돌아올 때 역시 원교에게 사과했다.
이 일화는 비록 귀양을 가는 몸이지만 당시 추사가 얼마나 자신의 글씨에 대해 자신감을 지녓는지 알게 해준다.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되어 있는 동안, 추사는 편지를 통해 자신의 학문세계를 전할 수 있었다.
이때 그는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붓을 쉬지 않았으니, 이제 우리가 보는 저 위대한 [세한도] 역시 이 시절의 작품이다.
유배 도중 추사는 아내를 잃는 비운을 당한다.
이때 그의 슬픔이 얼마나 컸을까. 그는 아내의 죽음에 부치는 시 한 수를 남겼다.
어떻게 월로께 하소를하여 서로가 내승에 바꿔 태어나 천 리에 나 죽고 그대 살아서 이 마음
이 설움 알게 했으면 (那將月 訟冥司 來世夫妻易地爲 我死君生千里外 使君知我此心悲)
어쨌거나 유배 생활은 추사로 하여금 인생에 대한 새로운 혜안을 뜨게 해주었으니,
그의 글씨는 이제 이전의 그것과 완전히 다른 면모를 보이게 된다.
가령 그가 귀양오던 해 대둔사에서 쓴 '무량수각' 글씨와 유배중이던
1846년에 쓴 고향 화암사 '무량수각' 현판을 비교해보면 그 차이를 분명히 느낄 수 있다.
유홍준 교수(전 문화재청장)의 해석을 들어보자.
"대둔사의 현판 글씨는 대단히 기름지고 부(富)티와 자
신감이 넘치는 윤기가 있다. 이에 반하여 귀양 와서 쓴 무량수각은 기름기가 다 빠지고
매마른 듯 순구한 원형질이 드러나며 대단히 명상적이다.
박규수가 말한 바 완당 중년 글씨의 병폐라던
'쓸데없이 기름진 것'이 귀양살이 7년에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다.
어찌보면 군살을 털어낸 듯한 경쾌함도 있다.
또 어찌보면 대둔사 글씨는 중국 글씨의 냄새가 남아 있는데
귀양 와서 쓴 글씨에는 차라리 화강암의 골기(骨氣)가 느껴지니,
앞의 것이 국제적 감각이라면 나중 것은 민족적 내지 완당 개성의 체취가 느껴진다.
그래도 이런 얘기를 못 알아듣는 이를 위해서 나는 대둔사 무량수각은 중국 요리의 란자완스 같고 귀양 와서 쓴
무량수각은 굵은 국수발 같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러면 모두들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의 뜻을 보이곤 한다."
우리가 추사체라고 하는 것 역시 제주 유배생활을 통하여 완성되었다.
추사체가 어떤 것인지에 대하여 말이 많지만, "괴(怪)"라는 한 단어로 정리하는 사람들이 적지않다.
그야말로 사람의 능력 밖이라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이런 능력은 그저 천재성의 발로인 것만은 아니었다.
그는 쉬지않고 노력하는 예술가이기도 햇던 것이다.
스스로 말하기를 칠생 평생에 벼루를 열 개씩이나 밑창을 바닥내고 붓을 일천 자루나 망가뜨렸다고 하니,
그의 노력이 얼마나 대단하였는지 능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추사는 스스로의 예술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더구나 예법은 가슴속에 청고고아(淸高古雅)한 뜻이 들어 있지 않으면 손에서 나올 수 없고,
가슴 속의 청고고아한 뜻은 또 가슴속에 문자향(文字香)과 서권기(書卷氣)가 들어있지 않으면
능히 팔뚝과 손 끝에 발현되지 않으며, 또 심상한 해서 같은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모름지기 가슴속에 먼저 문자향과 서권기를 갖추는 것이 예법의 기본이며 예를 쓰는 신결(神訣)이 된다."
추사는 1848년 마침내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햇수로 9년째였다.
그는 이후 서울 용산 한강변에 집을 마련해서 지내는데, 시련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그는 다시금 모함을 받아 1851년 함관령을 넘어 북청으로 유배길에 오르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 이때의 유배는 일년간이었지만, 유배에서 풀려나오는 그는 이미 세상에 아무런 미련도 없었다.
70세에는 과천 관악산 기슭에 있는 선고묘(先考墓) 옆에 가옥을 지어 수도에 힘쓰고
이듬해에 광주(廣州) 봉은사(奉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은 다음 귀가하여 세상을 떴다.
문집에 《완당집(阮堂集)》, 저서에 《금석과안록(金石過眼錄)》 《완당척독(阮堂尺牘)》 등이 있고,
작품에 《묵죽도(墨竹圖)》 《묵란도(墨蘭圖)》 등이 있다.
김정희의 영향을 받은 사람으로는 고람 전기, 형당 유재소, 소치 허유, 소당 이재관, 대원군 이하응 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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