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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 선생 묘(茶山 丁若鏞 先生 墓)국내 나들이/능, 원, 묘(陵 園 墓) 2009. 2. 22. 19:54
다산 정약용 선생 묘(茶山 丁若鏞 先生 墓)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은 조선후기의 대학자로서 1762년(영조 38)
현재의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 마현마을에서 태어났다.
정약용은 어려서부터 이익의 학문을 접하였고,
이벽에게 서양서적을 얻어 읽기도 하여 실학과 서학적 분위기 속에서 성장 하였다.
1789년(정조 13)에 문과급제 하여 예문관검열이 되었으나 천주교인이라 하여
충청도 해미로 귀양갔다가 10일 만에 용서되어 풀려났다.
또한 거중기와 녹로(도르래)를 만들어 수원성을 쌓는 공정을 단축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그 후 경기도 암행어사를 거쳐 동부승지·병조참의가 되었으나 주문모 신부의 변복 잠입.
사건이 터지자 형 정약전과 함께 이 사건에 관련되어 충청도 금정찰방으로 좌천되기도 했다.
1801년(준조 1)신유박해 때 경상북도 포항 장기로 유배된 뒤에황사영백서사건이 일어나 이 해 10월 다시 전라남도 강진으로 옮겨졌다.
이후 오랜 유배생활에 들어가며 조산사회의 현실을 다각도로 분석하고
여러 사상과 학문을 검토하여 조선 후기의 실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
1818(준조 18) 유배생활에서 풀려난 후 마현마을 고향집으로 돌아와
저술생활로 평생을 보냈으며 1836년 (헌종 2) 75세로 생을 마쳤다.
다산 정약용 선생은 18년의 유배기간 동안 경서학(經書學)에 전념,실학의 대가가 되어『목민심서(牧民心書)』48권,『경세유표(經世遺表)』49권,
『흠흠신거(欽欽新書)』30권 등을 쓰면서 정치·경제 등
제도의 개혁을 주장하였고 500여 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였다.
능내리의 다산유적지에 있는 정약용의 묘(경기도기념물 제7호)는 발치 아래를 감싸고 돌아 흐르는
두물머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듯한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잡고 있다.
묘 앞에는 비석상과 상석, 그리고 좌우에 망주석이 배열되어 있다.봉분은 단분이며 숙부인 풍산 홍씨와의 합장묘이다.
문화관에서는 다산 정약용의 일대기를 담은 영상물을 상영하고 있으며
다산 관련 강연회와 학술발표회가 열리고 있다.
또한 다산문화제를 비롯한 다양한 문화행사들이 사계절 내내 이곳에서 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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