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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 초상 초본(蔡濟恭 肖像 草本)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0. 6. 16. 23:28
채제공 초상 초본(蔡濟恭 肖像 草本)
채제공(蔡濟恭,1720∼1790)의 자는 백규(伯規). 호는 번암(樊巖), 번옹(樊翁)이고,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지중추부사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오광운(吳光運)과 강박(姜樸)의 문하생이다.
1771년 호조판서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고, 그 후 평안도 관찰사, 예조판서를 지냈다.
1758년 도승지로, 사도세자를 미워한 영조가 세자를 폐위하는 명령을 내리자 죽음을 무릅쓰고 건의하여 철회시켰다.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이 실각할 때 그와 친하고 사도세자의 신원을 주장하여
선왕의 정책을 부정했다는 등의 공격을 받아 이후 서울 근교 명덕산에서 8년간 은거생활을 하였다.
1788년 정조의 특명에 의해 우의정이 되었으며 2년 후 좌의정으로 승진하면서 3년간 혼자 정승을 맡아 국정을 운영하였다.
1793년에 한때 영의정에 임명되었으나 그 후로는 주로 수원성 축성을 담당하였다.
죽은 뒤 1801년(순조 1)에 노론 벽파(僻派)에 의해 추탈관작되었다가 1823년에 영남인들의 요청이 받아들여져 신원되었다.채제공은 영조대에 활동한 스승 오광운을 이은 남인, 특히 청남(淸南) 계열의 지도자로서 사도세자를 신원하여야 한다는 등
자기 정파의 주장을 충실히 지키면서 정조의 탕평책을 추진한 핵심적인 인물이었다.
특히 그는 목숨을 걸고 사도세자를 보호한 일이 계기가 되어, 영조가 사도세자의 죽음을 후회하여 기록한 <금등(金)>을정조와 함께 보관할 유일한 신하로 채택될 만큼 두 국왕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천주교,불교 등을 이단으로 배격하였으나 정조와 마찬가지로 그것을 믿는 사람들을 제거하기보다는 교화의 대상으로 삼았다.
그의 정치적 입장은 이가환(李家煥), 정약용(丁若鏞) 등으로 이어졌으며 사후에도 남인들 사이에 확고한 권위가 유지되었다.
영의정을 지내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던 그의 묘역이 쓸쓸한 것은 그가 죽은 지 1년만에 정조임금이 서거하고,어린 순조(純祖)를 대신하여 수렴청정한 정순왕후(貞純王后)가 그의 관작을 추탈했기 때문이다.
순조23년(1823)에 관작이 복원되고 영의정 문숙(文肅)이란 시호를 받았다.
(수원화성박물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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