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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후 초상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0. 6. 16. 23:22
김후 초상
김후(1751∼1805)의 본관은 해풍(海豊)이고 자는 광중(光仲)이며
증호조참판 김상걸(金相傑 1727~1798)의 아들이다.
해풍은 풍덕(豊德)의 또다른 이름이며 경기도 개풍(開豊)의 옛 이름이다.
해풍김씨의 시조(始祖) 김숭선(金崇善)이 고려때 예부상서(禮部尙書)를 지내고
해풍부원군(海豊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해풍(海豊)으로 하게 됐다.
김후는 경기중군에 재직하던 1794년(정조18) 2월에 화성성역의 별감동(別監董)에 임명됐다.
별감동이란 성역 등의 큰 공사가 있을때 특별히 임명하던 감독관으로 성역 사업의 주요 직책중 하나였다.
『화성성역의궤』에 의하면 김후는 별감동으로 총 886일을 근무하면서 개울을 파내는 준천(濬川) 공사를 비롯해
화홍문, 방화수류정, 동북성, 동장대 등의 건설을 감독하는 막중한 임무를 수행했다.
한때 공사 도중인 1794년 9월에 독성(禿城) 중군으로 잠시 옮겼다가
다음해 윤2월 전라좌수사(全羅左水使)로 승진 임명돼 나갔지만 곧 경기중군과 독성 중군으로 다시 복직해
화성 성역이 완공될 때까지 맡은 바 임무를 다해 큰 공을 세웠다.
그래서 정조는 1796년 1월 22일 “독성 중군 김후는 그 공로가 몹시 크니,
우선 길이 잘든 숙마(熟馬) 1필을 특별히 하사하라”는 전교를 내려 포상했다.
또한 정조는 수문(水門)과 동장대(東將臺)의 터를 닦기 전에 김후를 보내 그 토지 신령에게 제사를 올리게 했으며,
화성내에 건설한 성신사(城神祠)의 봉안제(奉安祭) 축문(祝文)도 짓게 했다.
이로보면 김후는 무예 뿐만 아니라 문장력도 갖춘 문무겸전(文武兼全)의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정조도 이를 간파해 그를 더욱 신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하여 1997년 7월 화성 성역이 끝났음에도 김후를 재차 수원의 중군으로 다시 내려 보낸다.
아마 화성 신도시의 군사적 안정과 현륭원의 보호를 위해 김후를 임명한 것으로 판단된다.
화성성역 당시 감동당상(監董堂上) 조심태(趙心泰)가 정조에게 올리는 보고서마다
김후의 이름 앞에는 항상 ‘본부인(本府人)’이라는 단어가 나왔으므로
정조는 일찍부터 김후가 수원사람이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을 터이니,
이 같은 사실이 그를 신임하게된 원인중의 하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정조는 이듬해 2월이 돼서야 모든 상황이 안정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판단했는지,
김후를 승급시킴과 동시에 황해병사(黃海兵使)로 내 보낸다.
이때 장궁(長弓), 장전(長箭), 편전(片箭) 등을 함께 하사하며 그간의 노고를 치하했다.
정조 사후에 김후는 1801년 내금위장(內禁衛將)만 잠시 지냈을 뿐
뚜렷한 행적을 보이지 않다가 1805년에 죽으니 향년 55세였다.
묘는 선영이 있는 화성군 우정면의 적진(赤津)에 마련됐다.
후손가에는 1796년경에 그린 것으로 추정되는 초상화가 남아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면 눈빛은 형형해 광채가 나는 듯하고 풍채는 무장답게 위풍당당헤 천년바위를 대하는 듯 하다.
(수원화성박물관 장용영 특별기획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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