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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인 서루도비꼬볼리외 신부(聖人 徐沒禮 神父, 서몰례 신부)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2. 2. 5. 08:20

     성인 서루도비꼬볼리외 신부(聖徐沒禮 神父,서몰례 신부)

     

    성인 루도비코 볼리외신부 (Saint Louis Beaulieu, 徐沒禮, 서몰례 신부, 1840~1866)는

    프랑스 보르도(Bordeaux) 교구 교구 관할 ‘랑곤’ 지방에서 1840년 10월 8일, 유복자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나자, 모친은 볼리외를 성모님께 봉헌한 후 어려운 생활 속에서는

    아들의 교육이 원만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여 뒤푸르(M.Dufour)라는 홀아비와 재혼을 하였다.

    열성적인 교우였던 모친의 영광을 받은 볼리외는 어려서부터 굳은 신앙심을 마음속에 키우고,

    아홉 살이 되던 1849년 10월 고향의 소신학교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해에 그는 중국 사천성(四川省)에서 전교한 경험이 있는 한 선교사 신부로부터 중국의 사정을 듣고 동양 전교에 대한 열망을 품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857년 대신학교에 입학하여 사제직을 수행하기 위한 준비를 하였다.

    이듬해 11월 7일에 모친을 여읜 후, 전교를 위한 그의 마음은 더욱 열렬해졌다.

    그러나 전교를 위한 볼리외의 열성의 지극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열망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았다.

    아직 교회법상의 연령 미달로 사제서품을 받지 못하였으며,

    보르도 교구의 교구장인 대주교는 누구든지 교구를 떠나지 않도록 종용하고 있어 그의 청원은 매번 거절되기 마련이었다.

    아울러 볼리외는 한때 폐렴에 걸려, 건강상의 이유로 그 자신이 희망을 잃는 듯하였다.

    그러나 1863년 8월, 대주교는 뜻밖으로 그에게 전교를 위한 출국의 허락을 주어,

    그는 곧 파리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할 수 있게 되었다.

    외방전교회의 신학교에 입학한 볼리외는 쉽게 주위 환경에 적응하면서

    전교생활을 충실히 할 수 있도록 기도를 청함과 아울러 전교 생활에 필요한 애덕의 생활을 위해 열심히 생활하였다.

    이윽고 1864년 5월 21일에는 그렇게 갈망하던 사제서품을 받았으며,

    같은 해 6월 15일에는 조선의 전교 신부로 임명되어 조선으로의 출발을 서두르게 되었다.

    1864년 7월 15일, 프랑스를 출발한 볼리외 신부는 도리 신부, 유스토 신부, 위앵 신부와 함께

    1865년 5월 27일에 조선에 도착하여 이미 조선에 입국하여 있던 장 주교와 조선 교우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당시 조선교회는 박해로 인하여 고통을 받고 있던 중이었다.

    따라서 볼리외 신부는 조선에 도착하자마자 주교의 명에 따라, 1865년 6월에 서울에서 떨어진 경기도 광주 지방에 있는

    묘론리(卯論里)라는 교우촌에서 본격적인 사목활동을 하기 위한 준비도 하면서,

    입교한 지 얼마 되지 않는 장제철이라는 교우 집에서 한국말을 열심히 공부했다.

    이 때 가까운 지방에 있던 김 도리 신부와 자주 왕래하면서 서로 의지하였다.

    물론 그들이 왕래할 때는 서양인임을 감추기 위해 상복을 입고 다녔다.

    한편 볼리외 신부는 전교활동이 어려웠음에도 불구하고 “이토록 잘 전교할 수 있는 지방에 오게 된 것은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라고 행복스럽게 말하며 전교 신부로서의 처신을 대단히 잘 지켜나갔으며,

    얼마 되지 않아서 그는 고해성사를 들을 정도로 한국말에 능숙해졌다.

    이 때 배교자인 이선이가 묘론리(卯論里)에서 신부가 살고 있다고 실토하였기 때문에,

    그곳 교우들은 걱정한 나머지 서 볼리외 신부를 광주 산답리(山畓里) 이 요셉의 집으로 옮겨가게 했다.

    그 후 장 주교는 볼리외 신부의 한국어 실력과 열심 함을 감안하여 충청도 지방으로 그의 임지를 정해 주려고 하는 참에,

    그는 임지를 가보기도 전에 처음에 기거했던 집 주인 장제철의 밀고로 포졸들에게 발각되어

    마침내 1866년 2월 27일에 김 도리 신부와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그 다음 날 서울로 압송되어 의금부에 바로 연행된 후 곧 신문을 받았다.

    관리는 그에게 “네가 한 일은 다른 사람의 문초를 통해 다 알고 있다.

    네가 나올 때의 물길이며 육로와, 네가 숨었던 집이며 네가 가르친 사람과 횟수를 모두 말해라”라고 하자,

    그는 “나는 볼리외 라는 사람입니다. 프랑스가 나의 본국이고, 중국에 나와서 여섯 달을 머물다가

    지난해 4월 장 주교 편지를 받아보고 요동 남양에서 배를 구해 백령도 근처의 모인도(毛仁島)에 상륙하여

    내포에서 보내준 배를 만나 내포에 이르렀으나,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선주 이름이나 살던 지방의 이름을 알지 못합니다.

    5월 보름 쯤 상경하여 백 유스토 신부, 김 도리 신부와 함께 서울에서 보름 동안 있다가 광주 신답리에 있었습니다.

    나는 장 베르뇌 주교의 지시에 따라 행한 것 뿐입니다” 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그는 심한 고문을 당하였는데, 다리와 발에 많은 매를 맞고 곤장의 형벌을 받으면서도

    그의 신앙심은 물론 조선 교회를 위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굳셈을 드러내 보였다.

    그러던 중 볼리외 신부는 형조(刑曹)로 이송되어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는 사형이 집행되기 전까지 자신의 고통을 참아내며 그의 거룩한 희망이 실현되기를

    주님께 간절히 빌면서 기쁜 마음으로 하루하루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서 볼리외 신부는 장 베르뇌 주교와 김 도리 신부, 백 유스토 신부 등 동료들과 함께

    새남터의 형장에서 세 번째의 칼에 의해 영원한 생명을 얻는 순교의 월계관을 쓰게 되었다.

    때는 1866년 3월 7일로서 그의 나이 26세에 불과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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