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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재연 장군 수자기(魚在淵 將軍 帥字旗)국내 나들이/박물관(博物館) 2012. 5. 7. 22:41
어재연 장군 수자기(魚在淵 將軍 帥字旗)
수자기(帥字旗)는 조선시대에 군영(軍營)의 최고지휘관이 사용했던 군기(軍旗)이다.
이 수자기(帥字旗)는 신미양요(辛未洋擾,1871년) 때 강화도 수비대장이었던
순무중군(巡撫中軍) 어재연(魚在淵)장군이 사용한 것이다.
당시 미 해군이 이 기(旗)를 노획하여 본국으로 가져간 후 美 해사박물관에 보관해 오던 것을
한국 해군과 문화재청의 노력으로 2007년 10월 22일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반환되었다.
이 기의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 보관 중이며, 이것은 원본과 똑같이 복제한 것이다.
가로:4.15m 세로:4.35m 재질:무명 (해군사관학교 해사박물관)
우리 품에 온 어제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
1871년 신미양요 당시 장수(將帥)의 상징이었던 어재연 장군의 “수자기(帥字旗)”가 귀환한 건
당시 문화재청은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이 소장한 “어재연 장군기”, 일명 “수자기”를
2007년 10월 18일부터 최초 2년간, 이후 10년간 장기대여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처음에는 영구 반환을 계획했지만, 교섭과정에서 미국 측이 관련법령의 개정이나 미 의회 및 대통령의 승인 등
절차상의 이유로 불가하다는 입장을 고수하자 우선 장기대여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국 땅을 밟기까지의 여정
‘수자기’의 귀환은 2007년 3월 7일 문화재청에서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 앞으로 보낸 한 통의 편지로 시작되었다.
4월 초 미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은 “한국의 입장은 충분히 이해하나 돌려주는 것은 미국법으로 불가능하고
다만, 연구의 목적으로 조사하는 것을 도와 줄 수 있다”는 답변을 주었다.
이에 방문단은 4월 25일 애나폴리스로 향했고, 현지에서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을 둘러보면서
반환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장기대여가 가능한지를 타진했다.
그리고 6월 초 장기대여를 요청하는 편지를 미해군사관학교 박물관장에게 보냈고,
6월 말에 ‘수자기’를 10년에 걸쳐 한국에 장기대여해주기로 결정했다는 답변을 듣게 되었다.
신미양요 당시 빼앗겼던 ‘수자기’는 136년 만에 귀환할 수 있었다.
당시 자칫하면 ‘수자기’가 북한으로 갈 수도 있었다. 미국의 웨인 엘러드 상원의원이 1968년 납북된
미 해군함 ‘푸에블로호’의 반환에 관심이 있었고, ‘수자기’와 ‘푸에블로호’를 북한과 맞교환 할 것을 미 국무부에 요청한 상태였다.
그러나 미 국무부에서 불법적으로 납북된 해군함정 문제로 평양과 협상할 의사가 없음을 밝힘으로써
‘수자기’의 귀환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어재연 장군기’는 2007년 10월 15일과 16일, 양측 입회 하에 상태를 점검한 뒤 대여협정서에 서명하고,
18일 워싱턴에서 항공편으로 운송되어 19일 오후 5시경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문화재청은 10월 22일 국립고궁박물관에서 ‘어재연 장군기’를 대외에 공개하고 설명회를 가졌다.
2008년 3월 특별 전시를 열었고, 5월 이후 인천광역시립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되다가
2009년부터는 강화역사박물관에서 전시·보관하고 있다.
수자기 반환이 갖는 역사적 가치
당시 학계에서는 수자기 귀환의 의미를 ‘국기가 없었던 조선에서는 장수기가 곧 조선의 국기이자 주권의 상징으로,
비록 대여 형식이지만 장수기가 돌아온 것은 주권을 되찾아 온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평가했다.
미국 애나폴리스의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었던 수자기는 가로 4.13m, 세로 4.30m의 대형 크기에
삼베 재질로 된 현존유일의 조선시대 장군의 깃발이다.
귀향한 수자기는 신미양요 때 어재연(魚在淵:1823~1871) 장군이 광성보(廣城堡)를 본진으로 하여
이 수자기를 걸고 싸웠던 역사적증거이자 희귀한 군사자료이다.
알려져 있다시피 신미양요는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 사건(1866)에 대한 책임문책과
조선과의 통상체결을 도모하는 과정에서 발발하였다.
당시 통상체결 요구에 대해 조선 정부의 답변이 없자 미국측에서는
소함정 4척을 보내 손돌목(孫乭項)을 지나 광성보로 진입했고,
허가 없이 들어서는 이들을 저지하려고 맹렬히 쏘아대는 조선군의 포격을 받아
잠시 퇴각했다가 초지진, 덕진진과 광성보를 점령하기에 이르렀다.
강력한 화력을 갖춘 미군의 공격에 조선군은 백병전으로 맞섰지만
어재연과 아우 어재순(魚在淳) 등 350여 명의 조선군은 장렬한 최후를 맞이하였다.
살아남은 일부 군사들도 자결하거나 강화해협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었으며 중상자 20여 명만이 미군의 포로가 되었다.
반면에 미군은 맥키(Mckee) 중위 이하 3명의 전사자와 10여 명의 부상자만을 내었다.
미군은 수자기를 내리고 성조기를 게양하였다.
수자기는 미군에 의해 내려질 때 일부가 찢어졌는데 오른쪽 아래 천을 덧 댄 부분이 그 흔적이다.
미국의 전쟁사에는 ‘48시간 전쟁’으로 기록돼 있지만, 미군 역시 조선군의 투쟁정신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던 전투였다.
1871년 당시 급변하는 국제정세의 흐름 속에서 어재연 장군이 수자기를 걸고
광성보에서 나라를 지키기 위해 싸웠던 바탕에는 투철한 국가관과 자존적 신념이 내재되어 있었다.
강옥엽(인천광역시 역사자료관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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