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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여숫골)
    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3. 1. 3. 05:36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 여숫골)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274-14에 위치하고 있는 해미순교성지(海美殉敎聖地)속칭 "해뫼"라 일컬어지는

     

    해미 고을은 역사적으로 조선 초기에 병마절도사의 치소를 둔곳으로서 조선 중기에는 현으로 축소 개편된 진영에

     

    1400-1500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는 무관 영장이 현감을 겸하여 지역 통치를 하던 곳이다.

     

    내포일원의 해안 국토수비를 명목으로 진영장은 국사범을 독자적으로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다 할 국토 수비의 전공 기록을 남긴 바 없는 해미 진영은, 1790년대부터 1880년대에 이르는 100년간,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대량 처형한 오명만을 남기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한국 천주교회사에 있어서, 대박해의 때로 기록된 1801년 신유박해(辛酉迫害),

     

    1839년 기해박해(己亥迫害), 1846년 병오박해(丙午迫害),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등,

     

    조정의 천주교 탄압을 공식화 할 때 외에도 해미 진영은 지속적으로 내포 지방의 천주교 신자들을 잡아들여 죽였다.


    병인 대박해(丙寅 大迫害) 때에만도 조정에 보고된 해미 진영의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가

     

    1천여 명으로 기록되고 있는데, 그 이전 80여 년 간에 걸친 해미 진영의 지속적인 천주교 신자 처결의 숫자는

     

    수천명일 것으로 추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지속적인 박해 동안에 해미 진영(지금의 해미 읍성)의 두 채의 큰 감옥에는 한티고개를 넘어

     

    내포 지방에 끌려온 천주학 죄인들이 항상 가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 김진후 비오도 바로 이곳에서 옥사하였다.)


    이 감옥터(해미읍성 내)에는 당시 손발을 묶이고 머리채를 묶인 순교자들이 매달리어

     

    고문대로 쓰여지던 호야나무 가지가 지금도 흔적을 지니고 서 있다.


    그래서 감옥터를 1950년대에 해미 공소 신자들이 식량을 절약하여 1800여 평을 확보하고 공소 강당을 세웠는데,

     

    1982년에 정부가 문화재 관리 정책의 명목으로 공소 강당을 철거하고

     

    그 터를 일부 보상, 일부 징말하고 순교 기념비만 새로 세워주었다.


    이렇게 내포에서 끌려와 감옥에 갇혀 있던 그 많은 순교 선열들을 군졸들은

     

    매일같이 해미 진영 서문 밖에 끌어내어 교수, 참수, 몰매질, 석형, 백지사형, 동사형 등으로 죽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더욱 잔인한 방법이 고안되기도 했다.

     

    돌다리 위에서 죄수의 팔다리를 잡고 들어서 메어치는 “자리개질”이 고안되어 죽이기도 하였고

     

    여러 명을 눕혀 놓고 돌기둥을 떨어뜨려 한꺼번에 죽이기도 하였는데,

     

    혹시라도 꿈틀거리는 몸뚱이가 있으면 횃불로 눈알을 지져대기도 하였다 한다.


    그리하여 해미 진영의 서문 밖은 항상 천주학 죄인들의 시체로 산을 이루고 그 피로 내를 이루었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다.


    지금은 해미 진영 서문 밖 바로 앞에 있는 70평 좁은 순교지에 자리개질해서 죽였던 돌다리가 보존되어 있는데,

     

    1956년도에 서산 성당으로 이전 보존되었다가 1986년 9월에 원위치로 귀환되었고

     

    바로 그 곁에 1989년에 세운 순교 현양비가 있다.

     

    2009년 1월 8일에 자리개돌 원석은 여숫골 순교자 기념관 맞은편에 옮겨

     

    보존되어 있고 그 터에는 모조품이 자리를 하고 있다.

     

    특히 1866년 병인년으로부터 1868년 무진년에 이르는 대박해 때에는,

     

    많은 숫자의 죄수들을 한꺼번에 죽이면서 시체 처리의 간편함을 위하여 생매장형이 시행되었다.


    해미 진영의 서녘 들판에 십 수 명씩 데리고 나가서, 아무 데나 파기 좋은 곳을 찾아 큰 구덩이를 만들어

     

    한마디 명령으로 산사람들을 밀어 넣어 흙과 자갈로 끌어 묻어버렸다.


    또한 생매장형이 시행되면서 여름철 죄인의 수효가 적을 경우에는 사령들이 번거로움을 덜기 위한 방법으로

     

    개울 한가운데에 있던 둠벙에 죄인들을 꽁꽁 묶어 물속에 빠뜨려 죽이는 수장(水葬) 방법이 사용되기도 했는데

     

    해미 지역 외인들을 천주학 죄수들을 빠뜨려 죽인 둠벙이라 해서 “죄인 둠벙”이라 부르고 있었으나

     

    현재는 이름조차도 변해 진둠벙이라 불리고 있다.


    교회가 이곳을 순교지로 인식하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농부의 연장 끝에 걸려들어

     

    버려지던 뼈들이 많았다 하는데 이 때 캐어내던 뼈들은 수직으로 서있는 채 발견되었다고 한다.

     

    바로 그것은 죽은 몸이 아니라 살아있는 사람이 묻혔다는 증거이다.


    해미진영 서녘의 생매장 순교 벌판에서는 1935년도(일제 시대) 서산 본당의 범 베드로 신부 지도하에

     

    순교자의 유해 발굴 때 유해 일부와 유품 성물이 발굴되어 30리 밖 상홍리 공소에

     

    임시 안장되었다가, 1995년 9월 20일 유해 발굴터인 원위치로 안장되었고,

     

    순교자의 유해는 별도로 보존 처리되어 보존되고 있다.(유해 참배실).


    그리고 유해 발굴지 인근인 하천 위에 16m 높이의 철근 콘크리트 조형물인 해미 순교탑이 세워져 있다.


    그런데 순교자중 최근까지 불확실한 이름과 출신지를 남기신 순교자는 교회측 기록67명 관측기록65명과

     

    무명 순교자로 기록된 47명으로 되어 있으나 그밖에 이름모를 순교자는 이루 헤아릴 수 없다.


    모두가 무명일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순교자들 중 홍주(홍성) 및 공주 등 상급 고을로 이송된 순교자들은

     

    이송 사실과 이름들이 기록으로 남겨진 것으로 보아 그 이송된 순교자들은 해미 진영장의 독자적 처결에 있어서

     

    사후에 문책거리가 됨직한 신분의 사람들이었으며, 해미 진영은 처형 후 문책의 배후 세력을 갖지 못한

     

    서민층 신자들만을 심리나 기록 절차 없이 마구잡이로 죽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해미 순교성지는 1985년 4월에 해미 본당이 창설된 후 해미 순교 선열 현양회를 발족하였고 순교 성지 확보 운동을

     

    전국 신자들에게 홍보하여 꾸준히 모금한 결과 1998년 말에 생매장 순교 성지를 약 7천 평 확보하였고,


    그리고 이어서 1999년 5월부터 3천 명의 회원들로부터 성전 건립 기금을 모아 2000년 8월 기공식을 하였고

     

    2003년 6월 17일 기념 성전을 건립하여 순교자들의 유해를 모셔놓고 있다.

     

    이렇게 조성된 생매장 순교지 일대는 "예수 마리아!" 기도 소리를 "여수머리"로 알아듣던 곳이

     

    이제는 주민들의 입으로 "여숫골"이라는 이름의 땅이 되어 오늘의 순례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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