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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위열공(威烈公) 김취려 장군(金就礪 將軍,1172~1234)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3. 10. 12. 07:38

    위열공(烈公) 김취려 장군(金就礪 將,1172~1234)

     

    거란의 침략을 물리친 고려 후기의 명장(名將)으로 본관은 언양(彦陽)이며, 아버지는 예부시랑(禮部侍郞)을 지낸 김부(金富)이다.

    1186년 음서(蔭敍:5품 이상의 관리이면 그 아들은 과거를 통하지 않고 관직을 받는 제도) 등용된 후,

    정위(正衛)가 되어 동궁위(東宮衛)를 거쳐 장군(將軍:4)으로 동북 국경을 지킨 뒤 대장군(大將軍:3)에 올랐다.

    1216(고종 3) 거란의 무리들이 세운 대요수국(大遼收國)의 일부가 몽고군에 쫓겨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입하였을 때,

    후군병마사가 되어 조양진(朝陽鎭:평남 개천)과 개평(開平:평남 영변)에서 거란군을 크게 물리쳤다.

    이어 승리의 기세를 몰아 묵장(영변 부근) 들판에서 포진하고 있는 거란군의 진영을 선봉에 서서 돌진하여 갈라놓고 적병을 쓰러뜨렸다.

    한 명의 고려병사가 백 명의 적병과 싸워야하는 상황에서 큰 아들마저 전사하였지만, 탁월한 지휘로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특히 향산(香山:묘향산) 전투에서는 적 2,400여명을 죽이는 큰 전과를 올렸다.

    1217년 거란군 10만 명이 원주(原州)를 거쳐 충주(忠州)까지 내려오자, 전군병마사가 되어

    제천(堤川) 박달령(朴達嶺)에서 거란군을 명주(溟州:지금의 강릉)쪽으로 패주시켰다.

    1218년 거란이 또다시 대거 침입하여 강동성(江東城)으로 들어가자 병마사(兵馬使)로서 몽고군과

    동진국(東眞國)과 힘을 합쳐 강동성을 함락하였다.

    1219년에는 의주(義州)에서 일어난 한순(韓恂), 다지(多智)의 반란을 평정하여 고려를 안정시키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1230년에는 국정 실무를 총괄하는 시중(侍中:1)에 올랐다.

     

    고려사(高麗史)’를 쓴 역사가는 김취려는 사람됨이 정직, 검약하였으며, 군사통제에 엄격하고 공정하여서,

     사졸들이 추호의 범함도 없었고, 존경하였다. 일찍이 많은 공을 세웠으나 스스로 내세우지 않아 칭찬의 소리가 높았다.

    또한, 정승이 되어서는 안색을 바르게 하여 아랫사람을 거느려 사람들이 감히 속이지 못하였으니,

    진실로 충성되고 의로운 사람이었다고 평가하고 있다.

     

    (충북 제천시 봉양읍 원박리 박달재 서원휴게소 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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