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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양업신부(崔良業 神父) 조각공원(彫刻公園)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3. 10. 18. 05:30
"땀의 순교자" 최양업신부(崔良業 神父) 조각공원(彫刻公園)
충청북도 제천시 봉양읍 배론성지길 296(구학리 62) 배론성지에는 박해시대(迫害時代) 전국을 누비며
사목활동(司牧活動)을 펴다 숨져 '땀의 순교자'로 불리는 최양업(崔良業,1821∼1861년) 신부의
생애(生涯)를 조각으로 감상할 수 있는 최양업신부(崔良業 神父) 조각공원(彫刻公園)이 있다.
배론성지 대성당 뒤편에 350여평 규모로 조성된 조각공원은 죽정(竹亭) 탁희성(비오) 화백 그림을 기초로
20여명의 조각가(彫刻家)가 제작에 참여하여 2004년 11월에 완공하였다.
길이 60m, 높이 2.5m로 조각공원 자체가 납골단(納骨壇)으로
최양업 신부 일대기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각과 설명으로 이뤄져 있다.
최양업 신부(崔良業 神父, 1821~1861)
아명(兒名)은 양업(良業), 관명(冠名)은 정구(鼎九). 조선 복음화의 선구자이며 가톨릭의 참된 토착화를 위한 선각자였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 최경환(崔京煥)과 이성례(李聖禮)의 장남으로 1821년 충청남도 청양 다락골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철저한 신앙교육과 신앙생활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다.
15세 때 최방제·김대건 등과 함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1837년부터 마카오에서 본격적인 사제수업을 받았다.
1844년 소정의 신학공부를 마친 뒤 김대건과 함께 페레올 주교로부터 삭발례(削髮禮)와 부제품(副祭品)을 받았다.
1849년에 강남 교구장인 예수회원 마레스카 주교로부터 사제서품(司祭敍品)을 받아 김대건에 이어 한국의 2번째 신부가 되었다.
온갖 어려움 끝에 1849년말 귀국한 뒤에는 조선 전교의 어려움과 선교사와의 갈등을 겪기도 했다.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시복(諡福)을 위한 순교자들의 자료를 수집하고, 교우들을 위한 교리서를 편찬하며,
효과적으로 천주교의 기본교리를 전달할 천주가사(天主歌辭)를 만들기도 했다.
귀국 후 12년에 걸친 힘겨운 사목활동 끝에 1861년 과로와 식중독으로 죽어 배론 신학교 산기슭에 안장되었다.
저술로는 사목활동과 조선 교회의 설립을 은사(恩師) 신부에게 보고한 라틴어 서한(書翰) 19통이 있다.
조선인으로서 당시 조선교회의 상황을 면밀히 관찰해 정치·사회 제도 및
선교사들의 전교형태를 기술했으므로 한국천주교회사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1847년초 귀국을 기다리며 홍콩에 머무는 동안 한국 순교자의 전기를 라틴어로 옮긴
"1839년과 1846년에 조선 왕국에서 발발한 박해 중에 그리스도의 신앙을 위하여 생명을 바친 순교자들의 전기.
현 가롤로와 이 도마 수집. 벨리나 주교의 프랑스 원문으로부터 최 토마스 부제 번역"이란 긴 제목의 번역서가 있다.
1864년 목판본으로 간행되어, 한국 교회가 공식 교리서로 최초로 채택한 ‘성교요리문답(聖敎要理問答)’이 있으며,
‘천주성교공과(天主聖敎公果)’ 등의 주요기도서를 번역하기도 했다.
한편 교우 중에 특히 배우지 못한 서민계층을 위해 난해한 교리와
종교적 사상에 음률을 달아 조선인의 전통적 생활감정에 맞도록 ‘사향가(思鄕歌)’
‘하주삼덕가(何主三德歌)’·‘칠성사가(七聖事歌)’ 등의 천주가사를 지었다.
이중 사향가(思鄕歌)는 천주가사 가운데 이본이 가장 많고 신자들 사이에 널리 애송되던 작품으로
인간의 본향(本鄕)이 어디인지 생각하라는 내용의 노래이다.
그의 저술활동은 천주교의 보급과 진정한 토착화를 위한 노력의 결정체이다.
그의 저작들은 한국천주교회사를 재조명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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