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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龍珠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3. 10. 28. 04:00

    대한불교조계종 용주사(龍珠寺)

     

    용주사(龍珠寺)는 신라 문성왕 16년(854년)에 창건된 갈양사(葛陽寺)로써

    청정하고 이름 높은 도량이었으나 병자호란 때 소실된 후 폐사되었다가

    조선시대 제22대 임금인 정조(正祖)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화산으로 옮기면서 절을 다시 일으켜 원찰로 삼았다.

    사도세자가 28세의 젊은 나이에 부왕에 의해 뒤주에 갇힌 채 8일 만에 숨을 거둔 영혼이 구천을 맴도는 것 같아

    괴로워하던 정조는 보경스님으로부터 부모은중경(父母恩重經)설법을 듣고 이에 크게 감동,

    부친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절을 세울 것을 결심하면서 양주 배봉산(지금의 서울시립대 뒷산)에 있던 부친의 묘를

    천하제일의 복지(福地)라 하는 이곳 화산으로 옮겨와 현릉원(뒤에 융릉으로 승격)이라 하고,

    보경스님을 팔도도화주(八道都化主)로 삼아 이곳에 절을 지어 현릉원의 능사(陵寺)로서

    비명에 숨진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호하고 그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불교가 정치적 사회적으로 억압을 당하고 있던 당시에 국가적 관심을 기울여 세웠다는 점에서 역사적인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낙성식날 저녁에 정조가 꿈을 꾸었는데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했다하여 절 이름을 용주사라 불렀고

    그리하여 용주사는 효심의 본찰로서 불심과 효심이 한데 어우러지게 되었고

    정조의 뜻을 받들어 효행교육원을 설립하여 효행 인성교육을 사회로 회향하고자 노력하고 있다.

     

    (경기도 화성시 송산동 소재)

     

     

     

    사천왕문(四天王門)

     불법을 수호하고 악귀의 출입을 막아 사찰의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 세워져

    지국천왕, 광목천왕, 증장천왕, 다문천왕 등 사천왕상이 모셔져 있다. 용주사의 입구로 일주문을 겸하는 건물이다.

     

    막존지선(莫存知鮮)

    맑고 깨끗한 곳임을 알고 보존하고 지켜라

     

     

    홍살문(紅살門)

    조선시대 마지막 원찰(願刹)인 용주사는 사도세자와 정조대왕의 위패를 모신 능침 사찰이다.

    왕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에 경건한 마음을 지니도록 하기 위해 홍살문을 세웠다.

    홍살문은 왕실의 능, , , 궁전 관아 등의 입구에 붉은 칠을 한 두 개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을 연결한 보에 붉은 살을 박은 형태로 세워 경의를 표하는 곳이란 의미를 지닌 문이다.

    다른 사찰과 달리 용주사에 홍살문이 있었던 이유는 정조대왕께서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용주사를 창건하고 호성전을 건립하여 아버지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셨기 때문이다.

    기록에 의하면 용주사에서는 사도세자와 경의왕후(혜경궁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시고 일 년에 여섯 번의 재를 모셔 왔다고 한다.

    그러나 1907년을 끝으로 일제강점기 이후로 중단되어왔다.

    100년 만에 사도세자 제246주기 제향을 모시면서 홍살문을 복원하고,

    호성전의 현판을 제막한 것은 효찰대본산 용주사 창건 당시의 모습을 회복하여 우리나라 효 문화를 선양하는 한편,

    정조대왕께서 돌아가신 아버지 사도세자에게 못다한 효를 사후에라도 실천하고자 하였던 뜻을 계승하고자 함이다.

     

     

     

    불음각(佛音閣)

    천보루 왼쪽 앞에 자리를 하고 있으며 커다란 범종 하나가 걸려 있다.

    범종의 네면에는 당좌와 비천을 서로 마주보도록 쌍으로 조식하여 넣었다.

    1985년 조성된 이 범종은 그 소리가 영롱하여 국보 제120호인 범종과 비교해 볼 때 그 영험함은 결코 뒤지지 않는다.

    아침저녁으로 예불 때마다 울리는 긴 종소리의 여운은 모든 중생의 귓가를 씻어내고

    부처님의 미소 띈 입가에서 흘러나오는 고귀한 말씀이 되어 혼탁한 하늘을 밝게 울려주고 있다.

     

     

    용주사(龍珠寺) 천보루(天寶樓)

    천보루(天寶樓)대웅보전(大雄寶殿,경기도문화재자료 제35) 안마당으로 들어가는 문루(門樓)이다.

    궁궐의 누각처럼 웅장한 천보루의 양옆에는 사대부집의 행랑채 같은 요사채가 길게 늘어서 있다.

    모두 정면 5, 측면 3칸이며 전면으로 1칸만큼 돌출시킨다.

    나머지 2칸을 승려들이 거쳐하는 양옆의 요사채와 바로 연결시켰으며, 뒤쪽 좌우에 누의 마루로 오르는 계단을 두었다.

    전면 1열 양옆에는 사각형의 장초석(長礎石)을 세우고 그 위에 짧은 기둥을 놓아 마루귀틀을 받도록 되어 있다.

    나머지 부분은 요사채의 기단 위에 바로 초석을 놓고 누하주(樓下柱)를 세웠다.

    따라서 전면에서는 양옆의 요사채 기단과 천보루의 누 하부가 자연스럽게 연결되고,

    입면에서도 대웅보전(大雄寶殿)으로 통하는 문루로서의 기능을 확실하게 나타내었다.

    또한 대웅보전에서 보면 천보루가 단층 건물로 보이도록 하여 양옆의 요사채와 함께 마당의 윤곽을 단정하게 정리하였다.

    전후로 길게 귀틀(마루를 놓을 때 먼저 굵은 나무로 가로나 세로로 짜 놓은 틀)을 건너질러

    누 마루를 만들고, 누 하부의 내부 기둥은 생략하였다.

    누 마루 전면과 양옆 돌출 부분에만 난간을 돌려서 만들었으며,

    대웅전 쪽에는 마루를 내지 않고 바로 머름 위에 창호를 구성하였다.

    공포는 연봉이 조각된 이익공계로 되어 있고 초각 문양은 대웅보전과 같으며, 겹처마 팔작지붕이다.

    천보루의 누각은 특이하게도 밖은 천보루(天寶樓),안쪽에는 홍재루(弘齋樓)라고 같은 누각의 이름이 두개로 불리워진다.

    용주사 천보루(龍珠寺 天寶樓)1983919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36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나유타료(那由他寮)

    만수리실과 마주보고 있는 창건 당시 승당으로 현재는 스님들의 요사체이다.

     

    만수리실(曼殊利室)

     원래 선당이라 하여 선방으로 사용한다. 건물의 구조는 민가의 건물양식을 따르고 있어 특이하다.

     

     

     

    용주사  대웅보전(大雄寶殿) 문화재자료 제35호

    대웅보전은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사원건축양식을 지닌 정면 3, 측면 3칸의 팔작지붕으로

    공포는 각 기둥과 평방위에 설치한 다포계양식이다.

    처마는 2중의 겹처마로 위로 약간 치솟았으며 그 네 귀퉁이에 활주를 세웠으며,

    문은 빗꽃살무늬로 처마에 고리가 달려있어 위로 들어 걸 수 있게 되어있다.

    이러한 예는 사찰건축에서 흔히 볼 수 있는데 문을 활짝 제치므로서

    불전내부의 성역공간과 외부의 세속공간이 차별없이 하나로 합일되는 역할을 한다.

     외벽의 3면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설화를 벽화로 묘사하였으며 건물의 규모는 57평으로

    큰 규모임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장중한 위엄과 함께 산뜻한 조화미를 지니고 있다.

    1993년 5월에는 모든 전각의 외부에 단청불사를 하여 가람이 마치 갓지은 건물처럼 산뜻함을 갖추게 되었다.

     

     

     

     

    천불전(千佛殿)

    천분의 부처님이 모셔져 있으며 누구나 수행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는 법화경(法華經)의 사상이 깃들어 있다.

    현재 천불전 자리는 과거에 노전 또는 향로전이라고 불리던 건물이 있었던 자리이다.

    이 자리에 최근 3년동안 법당불사를 하여 19933월에 건물을 완성하고 천불전이라고 하였다.

    건물 내부에는 천개의 작은 불상을 봉안하였고, 이 천불은 다불사상에 근거한 것으로 주로 현재의 현겁천불을 이룬다.

    석조기단위에 정면 3, 측면 2칸으로 팔작지붕을 올리고 그 내부에는 동쪽을 제외한

    삼면에 마련된 9층의 단 위에 천불이 봉안되었는데 그 아홉번째단은 건물의 평방도리를 이용하였다.

    건물 내부의 중앙에는 석가모니, 비로자나 그리고 아미타여래의 삼세불을 봉안하여

    대웅보전에 모셔진 삼세불과 그 형식을 같이 하여 조성하였다.

     

     

    시방칠등각(十方七燈閣)

    대웅보전과 천불전 사이에 위치한 전각으로 칠성과 산신, 독성 탱화로 모셔진 곳으로 시방칠등각은 칠성각의 다른 이름이다.

    이 세 신앙은 불교를 신앙하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한국적 불교신앙으로

    삼국시대에 불교를 수용하면서 불교 이전의 재래 토착신앙을 배척하지 않고

    조화롭게 수용하여 발전시켜 나간 신앙이다.

    이들 재래신앙이 불교와 융합되면서 북두칠성을 신앙하는 칠성신앙과

    스승없이 혼자서 깨우침을 얻는 독성신앙, 그리고 산신신앙이 한국불교의 한 특성을 이루게 된 것이다.

    칠성신과 독성, 산신을 모시는 전각은 우리나라 대부분의 사찰에 존재하고,

    각각의 신을 따로 모신 칠성각, 독성각, 산신각이 별도로 존재하기도 하고

    삼성각이라고 하여 이들 세신을 하나의 전각에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호성전(護聖殿)과 부모은경중경탑(父母恩重經塔)

    호성전은 사도세자와 혜경궁 홍씨, 정조대왕과 효의왕후의 위패를 모셨다.

    정조대왕께서는 일반 제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였던 듯 현릉원 옆에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한 원찰로 용주사를 창건하고

    대웅보전 옆에 아버지 사도세자의 제각으로 호성전을 건립하였다.

    호성전은 팔작지붕의 궁궐형식으로 지어진 전각으로서 사도세자의 위패를 모셔두고

    매일 새벽, 한낮, 해질녘, 초저녁, 한밤중, 자정이후 등 여섯 번의 재를 올렸다.

    이후 호성전에는 정조대왕, 경의황후(혜경궁 홍씨), 효의황후 김씨(정조의 왕비)를 차례로 모시게 되는데

    이 때마다 49(영산재)를 베푼 것은 물론 속절제와 기절제를 올려 극락왕생을 발원하였다.

    호성전은 용주사 창건의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으나 1950년 한국전쟁으로 인해 파괴된 후 일반 맞배지붕으로 중건되었다.

     

     

     

     

    전강대종사 사리탑(田岡大宗師 舍利塔)

    이 사리탑(舍利塔)은 용주사(龍珠寺)의 정신적 지주이자 만공 월면(滿空 月面, 1872~1946) 선사(禪師)의 법맥을 이어

    불조(佛祖)의 혜명(慧明)을 밝히신 한국불교의 큰 스승인 전강 영신(田岡 永信) 선사(禪師)의 부도탑으로

    2005년 선사의 열반(涅槃) 30주기를 맞아 사부대중의 뜻을 모아 수행과 위덕을 기리는 사리탑(舍利塔)이다.

     

    관음전 효행교육원(觀音殿 孝行敎育院)

     정조대왕의 효심에서 창건된 용주사의 성격이 잘 드러난 건물이다.

    효행교육장소로 사용되며 현재 사찰의 각종 법회가 진행되고 있다.

     

    지장전(地藏殿)

    지옥중생을 구제하는 지장보살을 모신 전각이다.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十王)을 봉안하고 있다.

    저승세계를 상징하는 사찰의 건물을 명부전이라 한다.

    그 내부에 저승의 심판관인 시왕을 봉안하고 있어서 시왕전이라 하기도 하고

    지장보살을 주불로 모신다고 해서 지장전이라 부르기도 한다.

    용주사에서는 지장전이라 이름하여 지장보살, 시왕, 판관 등을 봉안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지장전에는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좌우협시에 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모시고

    그 좌우에 명부시왕을 모시며 각 시왕 앞에는 동자상을 안치한다.

    정면 3, 측면 2칸의 건물에 맞배지붕을 올린 주심포식 건물로 측면에는

    주심포 양식 특유의 도리가 노출되는 가구 형식을 가지고 있다.

    건물 정면의 좌우에는 빗살무늬의 창이 마련되어 있고 중앙 한칸에만 출입문이 있다.

    이 출입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자리한 지장보살과 좌우에 협시한 도명존자,

    무독귀왕의 지장삼존상을 마주하게 된다.

     

     

     

     

     

     

     

     

     

     

    효행박물관(孝行博物館)

    정조대왕이 기증한 부모은중경을 비록, 보물 제1095호 봉람사 아미타불복장유물, 정조대왕의 친필인 봉불기복게,

    김홍도의 사곡병풍 등 용주사가 소장하고 있는 격조 높은 문화재를 전시하고 있다.

     

     

    삼문(三門)

    다른 사찰에서는 볼 수 없는 궁궐 양식이다. 좌우에 7칸 행랑을 지닌 맞배지붕 양식으로

    동서의 옆문과 중앙의 대문에 각각 문이 나 있어 삼문이라 부른다.

    삼문의 네 기둥은 상단부는 목재이고 하단부는 석재의 초석인데 유난히 높고 큰 편이다.

    네 기둥에는 '龍珠寺佛'의 네 자를 각각 첫 글자로 한 시구가 주련으로 걸려 있는데 역시 안순환의 글씨이다.

    "()이 꽃구름속에 서리었다가 여의주()를 얻어 조화를 부리더니

    ()문에 이르러 선을 본받아 부처님() 아래에서 중생을 제도한다"

    이 내용은 정조가 낙성식 전날 밤 용이 여의주를 물고 승천하는 꿈을 꾼 후

    절 이름을 용주사라고 하였다는 연기와 상통한다.

    삼문 앞에는 화마를 물리친다는 석조 해태상 두 마리가 버티고 서있으며,

    간결하고 굵게 처리한 조각기법이 해학적으로 나타나 우리 민족의 여유있는 정서를 상징하는 듯하다.

    삼문은 창건 당시에 세워진 건물로 여러 차례 개수를 거쳐 현재는 15평이고 좌우의 행랑은 총 40평에 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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