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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 운현궁(雲峴宮) 노안당(老安堂)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4. 4. 29. 05:21

     

     

     

    전형적인 한식 기와집, 운현궁(雲峴宮) 노안당(老安堂)

     

     

     

     

     

     

    운현궁에서 사랑채로 쓰였던 노안당은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일상 거처였으며

     

    파격적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주요정책을 논의했던 곳이다,

     

    전형적인 우리나라 한식 기와집으로 처마끝에 각목을 길게 대어

     

    차양(遮陽)을 단 수법은 오늘날 이 곳에만 남아있는 특징이다.

     

    ‘노안당(老安堂)’이란 현판은 “노자(老子)를 안지(安之)하며”에서 딴 것으로

     

    아들이 임금이 된 덕택으로 좋은 집에서 편안하게 노년을 살게 되어 스스로 흡족하다는 뜻으로

     

    흥선대원군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다.

     

    말년에는 정권에서의 퇴진과 청나라에 납치되는 등 이곳에서 7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현재 노안당에 게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模刻)되어 게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 서울 종로구 운니동 운현궁 =

     

     

     

    정면 6칸, 측면 3칸의 몸채 동측에, 전면 쪽으로는 양칸(樑間) 1칸 도리칸(道理間) 4칸의 누마루인 영화루(迎和樓)가,

     

    배면 쪽으로는 양칸(樑間) 3칸 도리칸(道理間) 3칸으로 된 온돌방과 툇마루가 이어져 있어 전체적으로 T자형 평면의 건물이다.

     

     

     

    노안당에 게시된 편액은 2006년 문화재청의 허가를 받아

     

    중요무형문화재 제106호 오옥진 각자장에 의해 모각(模刻)되어 게시된 편액이며,

     

    원 편액은 서울역사박물관에서 보관하고 있다.

     

     

     

    몸채는 서측에서부터 4칸의 대청, 2칸의 온돌방으로 되어 있었는데 제일 서측칸은 퇴칸이며 전후로도 퇴칸을 두었다.

     

    기단은 몸채부분인 대청과 안방의 전후는 장대석 세벌대로 되어 있고, 누마루인 영화루 부분은 장대석 두벌대로 되어 있으며,

     

    초석(礎石,주춧돌)은 가로와 세로의 너비가 같은 정방형초석인데 상부를 하부보다 약간 줄여서 다듬었으며,

     

    누마루 부분의 초석은 누마루 아래층에 석주형 초석을 세웠다.

     

     

     

     

    기둥은 평주와 고주 모두 네모기둥이고 약간의 민흘림이 있으며, 모서리는 턱이 있는 빗모접기가 되어있다.

     

    기둥머리부분은 보와 장여가 십자로 짜여 사괘맞춤이 되어 있고 그 위에 도리가 얹혀지고,

     

    부분적으로 평주열에 소로를 끼운 소로 수장집이다.

     

    대청과 퇴칸에는 우물마루가 깔려 있다. 우물마루는 보방향으로 기둥과 기둥사이에 장귀틀을 걸고

     

    이 장귀틀과 장귀틀 사이에 동귀틀을 도리방향으로 걸어 우물을 구성하였다.

     

     

     

     

    막장의 설치방식은 동귀틀의 홈턱 위를 따서 내리 끼우고 위에서 못질하는 막덮장방식과,

     

    막장을 밑에서 올려 끼우고 하부의 턱판자리에 솔대를 대고 못질하는 은혈(隱穴)덮장방식의 두 가지 모두 사용되었다.

     

    하인방의 하부 초석 사이부분에는 장대석 고막이가 설치되어 있고,

     

    디딤돌과 초석 사이에는 철물로 만든 통기구가 설치되어 있다.

     

     

     

     

    가구(架構)는 몸채는 전·후퇴칸이 구성되는 건물에서 통상적으로 보이는 것처럼

     

    전후의 내진고주사이에 대들보를 건너지르고 퇴칸에는 외진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 퇴량을 걸었다.

     

    고주상부에는 중도리를 배치하였고, 종부 위에는 중앙부에 판대공을 세워

     

    종도리를 받치고 있어 전체적인 구성은 이고주오량(二高柱五樑)으로 되어 있다.

     

     

     

     

     

    종도리 받침장여 하부에는 뜬창방을 건너지르고 뜬창방과 장여 사이에는 소로를 끼웠다.

     

    배면의 동북 측의 내민부분은 동측퇴칸을 걸고 서측평주와 내진고주 사이에는

     

    대량을 걸어 일고주오량(一高柱五樑)으로 구성되어 있다.

     

    남측으로 내민 누마루부분은 3량으로 구성되어 있다.

     

     

     

     

    처마는 모두 서까래만의 홑처마로 되어 있다.

     

    그러나 전면과 동서양측면의 남쪽 일부에는 모두 차양(遮陽)을 달아놓았다.

     

    귀서까래는 모두 선자로 꾸몄고, 회첨부분의 처마는 평행서까래로 처리되어 있다.

     

    차양은 장방형 각재틀 위에 판재를 깐 다음 그 위에 함석을 덮어 만들었는데,

     

    서까래 5 - 6개 간격으로 지지목을 설치하고 평고대에 설치한 철물에 걸어 설치하였다.

    지붕은 몸채의 양쪽인 동측면과 서측면, 그리고 동북쪽이 북측면과 영화루 남측면의 4곳에

     

    합각(合閣)이 설치되는 팔작지붕의 형태이다.

     

    회첨골에는 모두 중앙에 수키와를 한줄 보내어 2줄로 배수가 되도록 하였다.

     

    합각벽은 전벽돌로 되어 있는데, 서측면에는 중앙부에 팔각형의 테를 두르고

     

    문양을 넣어 장식하였으며, 나머지 3개의 합각벽에는 박쥐문양을 넣었다.

     

    박쥐는 오복을 가져다주고 행복을 상징하는 동물이라고 믿어온 것은

     

    한자의 박쥐'복'자의 발음이 복 '복(福)'과 같기 때문이었다.

     

    박쥐를 하늘의 쥐라고 하여 천서(天鼠)라고도 하고, 신선의 쥐라고 하여 선서(仙鼠)라고도 한다.

     

    그래서 박쥐는 일상 생활용품이나 회화, 공예품, 가구의 장식, 건축 장식 등의 문양으로 많이 사용되어 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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