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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유엔군 초전기념관(UN軍 初戰 記念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4. 5. 2. 05:28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며...

    유엔군 초전기념관(UN軍 初戰 記念館)

     

    유엔군 초전기념관은 6.25전쟁에 참가한 유엔군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평화를 위한 상호 이해와 협력의식을 느끼며 체험할 수 있는 문화와 교육의 장소이다.

    1950625일 촉발된 3년여에 걸친 민족 상호간에 발생한 비극적인 전쟁은

    우리 민족에게 깊은 상처와 슬픔을 안겨 주었다.

    유엔군 초전기념관이 위치하고 있는 죽미령은 UN군이 첫 전투를 벌인 격전지로

    많은 수의 젊은이들의 희생으로 우리나라의 자유와 평화를 지켜냈던 장소이다.

    이곳에 기념관을 건립함으로써 그들의 희생에 감사하며 역경과 고난을 딛고 발전한

    대한민국의 행보를 후세에 전승하여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2013년 개관하여 기념관 일대 역사공원 조성사업과 더불어

    스토리텔링을 통한 탐방사업 등 다양한 교육·환경 콘텐츠를 지닌 문화 장소이다.

     

     

     

     

     

    6.25전쟁의 아픔과 피해 

     

    6·25전쟁 기간 동안 한민족은 유구한 역사를 통해 치른 전란 중에서 가장 처참한 전쟁피해를 입었다.

    부산교두보를 제외한 전 국토가 전쟁터가 되었고 남한의 제조업은 1949년 대비 42%가 파괴되었다.

    인명피해에 있어 군인은 한국군 63만 명과 유엔군 15만 명을 포함하여

    78만 명이 전사·부상·실종되었고, 민간인은 100만 명이 사망·부상·실종되었다.

    결과적으로 휴전이 성립되는 시점까지 전체인구의 1/2 이상이 전쟁피해를 입었다.

     

     

     

     

     

     

     

     

     

     

     

    한민족의 비극, 6.25전쟁

     

    1.북한군의 남침과 지연작전 (1950. 6.25. ~ 7. 31.)

    1950625, 북한군은 서쪽의 웅진반도로부터 동쪽으로 개성, 전곡, 포천, 춘천, 양양에 이르는

    3·8선 전역에서 공격을 시작하였고, 한강방어선이 무너진 후 국군과 유엔군은 평택과 대전 지역에서 지연전을 펼침

     

     

    2.낙동강방어전 (1950. 8. 1.~ 9.14.)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공세를 낙동강 방어선에서 치열한 접전 끝에 격퇴

     

     

    3.인천상륙작전 (1950. 9.15.~ 9.30.)

    유엔군은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대반격 작전을 펼침으로써, 6·25전쟁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됨

     

     

    4.3·8선 돌파와 북진 (1950.10. 1.~10.24.)

    인천상륙작전과 서울탈환 등 반격작전의 성공으로 국군과 유엔군은

    전면적인 북진작전을 시작하였고 평양과 원산을 점령하고압록강까지 진격

     

     

    5.중공군 개입과 14 후퇴 (1950.10.25.~1951. 1.24.)

    중공군의 개입으로 3차에 걸친 공세에 밀려 국군과 유엔군은 195114일 한강 이남으로 철수

     

     

    6.국군과 유엔군의 재반격 (1951.1.25.~1953.7.27.)

    중공군의 공세를 격퇴하여 315일 서울을 재탈환하였으나,

    3·8도선부근에서 전선이 고착화되자 유엔주도하에 휴전하게 됨

     

     

    광복이후의 한반도

     

    2차 세계대전이 종전된 후 한반도는 남한과 북한에 미군과 소련군이 각각 진주하면서

    ·소를 양축으로 하는 동서 냉전구조 속에 편입되었다.

    한반도의 38도선은 남·북한뿐만 아니라 극동의 자유 및 공산진영을 포함해

    미국과 소련의 힘이 직접적으로 맞선 최전선이 되었다.

    국제 냉전이 심화될수록 한반도의 갈등 역시 더욱 고조되어 갔다.

    한반도의 통일문제를 논의하기위해 설치된 미소공동 위원회에서 신탁통치문제로 남·북한이 대립되자

    19479월 한반도 문제는 유엔총회로 이관되었고,

    유엔의 감시 하에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결의 하였다.

    1948510일 유엔 한국임시위원단의 감시 하에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되었고,

    815일 대한민국 건국을 선포하여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정부가 탄생하였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직후 194899일 평양에서 김일성 체제 하의 조선민주주의공화국의 수립을 선포하였다.

    소련은 북한정권이 수립되자 10월 중순 이를 공식적으로 승인하였고, 다른 공산국가들의 승인도 뒤따랐다.

    이들은 유엔총회의 결정을 거부하며 대한민국이 한반도에 있어서의

    유일한 합법정부가 아니라고 정면으로 부인하였고, 한반도는 분단되고 말았다.

    이후 남·북한의 정세는 여러 측면에서 상호 상반된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북한에서는 소련의 비호 하에 실권을 장악한 공산당이 북한 사회를 철저하게 공산조직으로 체계화하기 시작하였다.

    반면 남한에서는 미국의 소극적인 지원으로 정국이 좌우로 분열되었고 공산주의자들의 잇단 폭동사건으로

    민심의 동요가 극에 달해 있었다. 1948년 말경부터 북한에서는 군사력 증강작업에 착수하면서

    소련제 탱크와 기계화 부대를 중점적으로 편성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반대로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와 군사적 증강 요구에

    미온적인 입장을 취해 남·북한의 군사력 불균형은 날로 심화되어 갔다.

     

     

     

     

     

     

     

     

     

     

     

     

     

     

     

     

     

     

     

     

     

     

     

     

     

     

     

     

     

     

     

     

     

    오산 죽미령전투

     

    195075일 오산 죽미령에서 유엔군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와 북한군의 첫 번째 전투가 벌어졌다.

    75일 새벽 3시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를 포함한 좌측에 B중대를,

    우측에는 C중대를 배치하고 105mm 포대를 죽미령 후방 수청리에 포진시켰다.

    오전 7시 수원근처에서 북한 전차 부대의 모습이 발견되고, 816분 교전이 시작되었다.

    확연한 전력 차이에도 불구하고 치열한 접전을 벌인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의 전차부대를 막지 못해 퇴로가 차단되고 방어선이 급격히 붕괴되기 시작하면서

    결국 230분 퇴각을 결정하여 안성을 경유하여 천안으로 철수하게 되었다.

    이 전투에서 아군, 적군 가릴 것 없이 수많은 병사들이 쓰려져 갔고 우리의 방어선은 급격히 붕괴되었다.

    이 전투에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540명중 181(보병 150, 포병 31)

    전사하거나 실종되었으며, 북한군 역시 약 5,000명중 127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되었다.

    유엔군과 북한군의 첫 전투는 승패와 상관없이 유엔군의 참전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유엔군의 파병은 유엔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의 기본 정신에 입각하여

    유엔기를 앞세우고 자유와 평화를 수호하기 위해 집단적 행동을 펼친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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