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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지사 이범우선생 추모비(愛國志士 李範雨先生 追慕碑)
    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5. 15. 04:30

    애국지사 이범우선생 추모비(愛國志士 李範雨先生 追慕碑)

     

    이범우(李範雨, 1892-1969)1892년 충북 제천군 제천읍 모산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당시 제천군청 잠업계 조수로 근무하던 중 일본인에 의해 고종황제가 시해되자

    제천군을 대표하여 서울로 올라가 고종황제의 인산에 참석하였다.

    이때 28세였던 그는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인 최린을 만나

    독립운동에 대한 심각하고도 진지한 협의를 하였다.

    그 때 그는 그에게서 독립선언서 12장을 얻어가지고 내려오는 길에 횡성 처가에 들려

    선언서 5장을 전하고 거사를 당부한 후, 다시 원주에 들려 이기연에게 4장을 전하고

    또 다시 거사를 당부한 후, 단양으로 내려와 원세덕에게 독립운동에 관한 협조를 얻었다.

    313일에 제천에 도착한 그는 봉양면 삼거리에 살고 있던 가까운 친구인 권종필(權鍾弼),

    이기하(李起夏), 전필현(全弼鉉) 등을 방문하여 제천에서도 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할 것을 협의하고,

    낮에는 직장에 나가고 밤에는 모여 거사에 따른 여러 가지 준비를 하였다.

    그들은 거사일을 317일 정오로 정하고, 조명구 등을 시켜 태극기 1천여장을 만들게 하였다.

    317일 정오, 그는 권종필, 이기하, 전필현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만세를 선창하니,

    장터에 모였던 학생 및 군중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만세를 따라 불렀다.

    이에 군중은 곧 제천 경찰서 쪽을 향하여 독립만세 시위행진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충주 수비대원들이 무차별 사격을 감행하여

     현장에서 4명이 즉사하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 때 그는 체포되었는데, 체포 당시의 상황을 그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놈들은 돌연 총을 쏘기 시작했다. 당황한 우리는 군중을 해산시키기에

    온갖 노력을 다했으나 흥분한 군중은 해산하지 않으려 했다.

    군중의 이러한 기세에 나는 크게 용기를 얻어 다시 만세를 불렀다.

    총알이 스치고 지나가 피가 흘러 옷이 젖는 것도 개의치 않고 만세를 불렀다.

    이때 놈들의 총에 4명이 쓰러졌다. 흥분한 우리는 다른 길로 돌아 1시간 넘게 읍내를 돌아다니며 만세를 불렀다.

    목이 쉬고 피가 온 몸에 낭자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기운이 나고 겁이 없어지고 담배가 피우고 싶어졌다.

    나는 일본인 상점에 들려 담배 한 갑을 사려 하였더니 문을 닫고 숨어 있던

    주인 동근(東根內吉)은 의외로 뒷문으로 나와서는 '이 선생의 애국적인 행동에는 참 감탄했습니다'라고 했다.

    그날 밤 나는 10시 경까지 사람들에 에워싸여 술을 대접받고 애국론을 펼치다가 일본 경찰에게 체포되었다"고 했다.

     

    그리하여 그는 이 해 828일 청주 지방법원에서 보안법 위반 혐의로 10개월 형을 선고 받고 옥고를 치루었다.

    해방 후 계속된 감시원들의 삼엄한 눈초리 속에 구속된 생활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68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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