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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교산 산림욕장(光敎山 山林浴場)
    수원사랑/이모저모 2014. 6. 3. 04:30

    광교산 산림욕장(光敎山 山林浴場)

     

    수원시 장안구 조원동 광교산 자락에 휴식공간으로 조성한 광교산 산림욕장(光敎山 山林浴場)


     

     

     

     

     

     

     

     

     

     

     

     

     

     

     

     

    진달래꽃 - 김소월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없이고이 보내 드리오리다

     

    영변에 약산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뿌리오리다

     

    가시는 걸음 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아니 눈물 흘리우리다


     

     

    봄이 오면 - 김동진

     

    봄이 오면 산에 들에 진달래 피네

    진달래 피는 곳에 내마음도 펴

    건너 마을 젊은 처자 꽃따러 오거든

    꽃만 말고 이마음도 함께 따가주

     

    봄이 오면 하늘위에 종달새 우네

    종달새 우는 곳에 내마음도 울어

    나물캐는 아가씨야 저소리 듣거든

    새만 말고 이소리도 함께 들어주

     

    나는야 봄이 되면 그대 그리워

    종달새 되어서 말 붙인다오

    나는 야 봄이 오면 그대 그리워

    진달래 꽃이 되어 웃어 본다오


     

     

    나무의 마음 - 이은상

     

    ​나무도 사람처럼 마음이 있소

    숨쉬고 뜻도 있고 정도 있지요

    만지고 쓸어주면 춤을 추지만

    때리고 꺽으면 눈물 흘리죠

     

    꽃 피고 잎 퍼져 향기 풍기고

    기지줄기 뻗어서 그늘 지으면

    온갖 새 모여들어 노래 부르고

    사람들도 찾아와 쉬며 놀지요

     

    찬서리 눈보라 휘몰아쳐도

    무서운 고난을 모두 이기고

    나이테 두르며 크게 자라나

    집집이 기둥들보 되어 주지요

     

    나무는 사람마음 알아 주는데

    사람은 나무마음 왜 몰라 주오

    나무와 사람들 서로 도우면

    금수강산 좋은 나라 빛날 것이요

     

     

     

    우성위보(禹性尉湺) 이야기

     

    우성위보(禹性尉湺)는 수원 북중학교 옆에서 조원동으로 넘어가는 길 도중에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도시화로 인해 모두 아파트와 집들이 들어서 버려 흔적을 찾을 길이 없다.
    옛날 조원동 갓모봉 아래에는 백제 온조왕의 사위인 우성위(禹性尉)라 부르는 큰 부자가 살고 있었다.

    따라서 일대의 논과 밭은 모두 그의 것이었고 동네사람들은 그의 이름을 붙여서 우성위들이라고 불렀다.

    어느 해인가 흉년이 들어 농사가 되지 않았다.

    어느 날 스님이 와서 시주를 하라고했으나 지독한 구두쇠가 스님에게 물조차 주지 않았다.

    스님은 가면서 마장산(馬場山) 줄기의 가운데를 파서 광교천에서 물을 끌어오면 가뭄을 극복할 수 있다고 가르쳐 주고 떠났다.

    우성위는 그 말을 옳게 여겨 공사를 시작했으나 이곳은 광교천보다 지형이 높은 곳이라 공사를 더 이상 할 수 없었다.

    흉년도 더욱 깊어져서 우성위의 가세는 날로 기울어져가 완전히 망하고 말았다.

    그런데 스님이 일러준 자리도 마장산의 중간부분으로 거문고의 혈()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우성위가 거문고의 혈 때문에 부자가 된 것인데 혈의 중간을 잘라 명아한 음률을 끊어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지금은 개발로 인해 옛 전설이 담겨 내려오는 우성위 옛 집터와 우성위들, 고문고혈이었다는 마장산 줄기는 보이지 않는다.

    우성위가 수로를 팠다는 흔적은 30여 년 전만 해도 영화동에서 조원동으로 넘어가는

    작은 길 옆에 뚜렷하게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흔적조차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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