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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랑스군 참전기념비(AUX COMBATTANTS FRANCAIS DE LA GUERRE DE COREE)
    수원사랑/이모저모 2014. 10. 8. 06:04

    프랑스군 참전비, 프랑스군 참전기념비,

    (AUX COMBATTANTS FRANCAIS DE LA GUERRE DE COREE)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프랑스의 몽클라르(Monclar, 1882~1964)중장은

    4성 장군 진급을 포기하고 스스로 중령 계급장을 달고 1950년 11월 29일 부산에 상륙하여 수원에 집결한 후,

    미군 제2사단(인디언 머리 모양으로 유명) 지휘하에 배속하여 프랑스군 1개 대대가

    원주 쌍터널부근 전투1951.1.31~2.2), 양평 지평리 전투(1951. 2.13~2.15),

    양구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1951.9.13~10.13), 철원 화살머리고지 전투(1952. 10. 6~ 10. 10)와

    소양강, 북한강, 인제, 김화, 철원, 송곡, 충아산 전투 등지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한국전쟁(프랑스군 참전기간 1950. 7.29~1953.7.27)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프랑스군 대대는

    육군 보병 1개 대대와 해군 군함 1척과 총 4,000명이 참전하여 288명이 전사하였는데,

    그중 배속된 한국인 전사자는 18명이었다.

    프랑스군의 한국전 참전을 기념하는 비(碑)는 1974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로

    6.25 당시 프랑스 군이 주둔했던 수원시 장안구 파장동 31-2

    지지대 일원 3천350여㎡에 프랑스군 참전기념비를 건립하였다.

     

     

     

     

     

     

    정의와 승리를 추구하며 불가는이 없다는 신념을 가진 나폴레옹의 후예들!

     세계의 평화와 한국의 자유를 위해 몸바친288명의 고귀한 이름위에 영세 무궁토록 영광 있으라.

     

     

     

     

     

     

     

     

    원주 쌍터널부근 전투(원주 서북쪽 25km,  1951. 1.31~2.2)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원주-양평간 중앙선 철로상의 쌍터널 부근에서 중공군 제125사단과 치른 전투이다.

    이 대대는 유엔군의 재반격 작전시 美 제23연대의 제1대대 및 제2대대 정찰대가 원주로부터 지평리로 정찰을 실시하던 중,

    그 중간에 있는 쌍터널 부근에서 공산군의 공격에 포위를 당하게 되자, 美 제23연대 제3대대와 함께

    이 공산군을 격멸하고 정찰대를 구출하기 위하여 1월 31일 교전지점으로 진출하였다.

    프랑스 대대는 미군 대대와 협조하여 쌍터널 부근으로 진출하였으나

    공산군은 이미 자취를 감춘 뒤였으므로 접촉을 이루지 못하였으며,

    정찰대를 구출한 뒤 야간전투에 대비하여 그곳에서 사주(四周)방어를 실시하였다.

    다음날 새벽에 중공군 제125사단 예하 2개 연대가 그곳을 공격하였다.

    프랑스 대대는 이 전투에서 1개 중대진지가 돌파되고 대대본부까지도 위협을 받는 위기에 처하였으나,

    선전 분투하여 중공군의 공격을 격퇴하였다.

     

     

     

    지평리 전투(경기도 양평, 1951. 2.13~ 2.15)

     

    이 전투는 중공군의 1951년 2월 공세 당시에 프랑스 대대가 美 제2사단 제23연대로 배속되어

    지평리에서 중공군 제39군 예하 3개 사단의 공격을 막아낸 방어 전투이다.

    이 대대는 연대와 더불어 쌍터널 전투를 마치고 2월 3일 지평리로 이동한 후

    지평리를 중심으로 편성된 전면(全面) 방어진지의 서쪽을 방어하였다.

    2월11일 美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좌우 인접부대가 철수를 하게 됨에 따라

    중공군 제39군의 사면(斜面) 포위에 놓이게 되었다.

    그러나 지평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진지 고수명령을 받게된 美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철수하지 않고

    고립된 상태에서 4일간에 걸친 중공군의 파상공격을 물리치고 진지를 고수하였다.

    중공군은 2월16일 후방으로부터 美 제5기병 연대가 지평리에 도착하자 포위망을 풀고 후퇴하였다.

    이 전투의 결과 중공군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2월 공세에 실패하였고,

    유엔군은 중공군이 한국전쟁 참전 이후 최초로 재대로 된 승전(勝戰)을 거두었다.

     

     

     

    단장(斷腸)의 능선 전투(강원도 양구 1951.9.13~10.13)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양구군 동면 사태리 일원에서 美 제23연대, 네덜란드 대대와 함께

    북한군(제6사단, 제12사단)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던 전투이다.

    이 전투는 1951년 7월 10일 휴전회담이 개최되고 있었으나

    공산군측이 고의로 회담을 지연시켜 회담이 결렬되자, 유엔군측이 공산군측을 회담에 응하도록 하는 한편,

    당시의 방어선을 보다 유리한 지역에 설치할 것을 목적으로 실시한 전투이다.

    프랑스대대는 사단의 지원하에 美 제23연대와 함께 9월 13일부터 929고지(단장의 능선) 공격 작전에 나섰으나

    북한군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혀 성공하지 못하였다.

    그 후 10월 5일 부터는 사단의 전(全) 부대가 투입되어 이 목표를 점령하였다.

    이때 단장의 능선 서쪽 문등리 계곡에서는 美 제38연대가 제72전차대대와 공격하였고,

    美 제23연대와 프랑스 대대는 능선의 동쪽 사태리 계곡에서 기동한 제23전차중대를 주축으로 한

    특수임무부대와 보병 전차 합동으로 단장의 능선을 공격하였다.

     

     

     

    철원 화살머리고지 전투(1952. 10. 6~ 10. 10)

     

    이 전투는 프랑스 대대가 철원 서북방 281고지를 방어 중 중공군 113사단 제338연대와 치룬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중공군은 10월 6일부터 9일까지 매일 야간에 대대 중대 규모의 부대를

    파상적으로 투입하여 281고지를 공격하였으나,

    프랑스대대는 지원 화력의 엄호하에 근접전투를 벌이며 진지를 고수하였다.

    같은 기간에 우측 백마고지에서도 한국군 제9사단이 중공군과 격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 대대는 많은 인명의 손상을 입으면서 이 고지를 끝까지 확보함으로써 중공군의 의지를 꺽을 수 있었으며,

    우측의 백마고지 방어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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