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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강 박승희 기념비(春崗 朴勝喜 記念碑)국내 나들이/동상(銅像),흉상(胸像),비(碑), 2014. 10. 15. 05:00
춘강 박승희 기념비(春崗 朴勝喜 記念碑)
박승희(1901~1964)는 호는 춘강(春崗).
1923년부터 23년 동안 제작·각본·연출·무대장치를 맡아보면서 한국 신파극의 발전에 이바지했다.
대한제국시대 초대 주미공사를 지낸 박정양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중앙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 세이소쿠(正則) 영어학교를 거쳐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영문과에 들어갔다.
대학 재학중인 1923년 김복진·김기진·이서구 등과 함께 토월회(土月會)를 조직한 후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자신의 막대한 재산을 연극 발전에 투자했다.
1923년 7월 4일 토월회의 제1회 공연 때는 유진 피롯의 '기갈(飢渴)', 안톤 체호프의 '곰' 등
서양 근대 단막극 3편과 자신이 쓴 '길식(吉植)'을 공연했다.
제2회 때는 조지 버나드 쇼의 '오로라'를 번역하고, 마이아 펠스타의 '알트 하이델베르크'의 주역을 맡았는데,
이때 이월화와 염문이 있었으나 이월화가 토월회를 떠나면서 헤어졌다.
제2회 공연을 마치고 창립 동인들이 탈퇴하자, 토월회를 직업극단으로 바꾸었다.
1925년 3월 광무대를 토월회의 전속극장으로 계약하고 자신이 쓴 '산서낭당'과 각색한 '희생하는 날 밤'을 공연했다.
이때 한국의 극단에서는 최초로 여배우 복혜숙·석금성에게 월급을 주었다.
1926년 4월 자금이 부족해 제56회 공연을 끝으로 토월회를 해산했다.
1928년 10월 우미관에서 토월회의 재기공연을 갖고 자신이 쓴 '이 대감 망할 대감'과
김우진과 윤심덕의 사랑을 그린 '사(死)의 승리', 일제강점기의 암담한민족 현실을 다룬 '혈육' 등을 공연했다.
또한 1929년 11월초 조선극장에서 가진 공연때는 일제에 땅과 곡식을 빼앗기고
북간도로 떠나는 민족 현실을 그린 대표작 '아리랑 고개'를 발표해 인기를 모았다.
그러나 이 작품이 일본경찰의 탄압을 받아 토월회는 완전히 해산되었다.
1931년 방송극협회를 조직하고, 극단 '대장안(大長安)'을 창단했으나 한번도 공연하지 못했다.
해방직후 토월회의 옛 단원을 모아 자신이 쓴 '사십 년'· '의사 윤봉길'· '모반의 혈' 등을 공연한 뒤 연극계를 떠났다.
1963년 '사상계' 5~7월호에 연극계를 회고하는 '토월회 이야기'를 발표했다.
번안·번역·창작한 작품이 200여 편에 이르렀으나 전하는 것은
'이 대감 망할 대감'· '혈육'· '홀아비 형제'· '고향' 등 4편뿐이고,
이중 '아리랑 고개'는 당시 연출을 맡았던 박진의 회고에 의해 전한다.
1963년 6월 제1회 한국연극상을 받았다.
조국에 대한 사랑과 연극에 대한 열정으로 평생을 살았던 그 업적을 기리고자 서울 국립극장에 기념비를 세웠다.
(재질: 화강석, 브론즈, 199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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