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광교공원(光敎公園)의 가을
    국내 나들이/공원(公園)으로 2014. 10. 19. 04:30

    광교공원(光敎公園)의 가을

     

    수원시 장안구 연무동 광교저수지 제방아래 25,847㎡ 규모의 광교공원은

    수경시설과 음악분수, 소규모 문화공연을 할 수 있는 야외무대, 잔디로 된 중앙광장,

    그리고, 공원을 한바퀴 돌 수 있는 산책로 등을 갖추고 있는 안식처이다.

     

     

     

    강감찬 장군(姜邯贊 將軍, 9481031)


    고려의 명장 강감찬(9481031) 장군은 정종 3년에 금주(衿州),

    즉 현재의 봉천동(218-14)에서 삼한벽상공신(三韓壁上功臣) 궁진(弓珍)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장군의 처음 이름은 은천(殷川)이다. 학문을 좋아하며 성종 2(983)에 문과에 장원 급제하여 예부시랑(禮部侍郎)이 되었고

    저서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구선집(求善集)"이 있다.

    고려 현종(顯宗) 원년(1010)에 거란(契丹)의 성종(聖宗)40만 대군을 이끌고 침입했을 때

    고려에서는 강조(康兆)30만 대군을 이끌고 나가 싸우다 패하여 많은 신하가 왕에게 항복할 것을 권했으나

    예부시랑으로 있던 강감찬 장군이 항복을 반대하여 위난을 면했다.

    그로부터 8년이 지난 1018년 거란의 성종은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하면서 다시 소배압(蕭排押)을 시켜

    10만 대군으로 고려를 침공케했으나 고려는 강감찬 장군을 상원수로 삼아 20만 대군으로 대적케하니

    장군은 흥화진(興化鎭)의 물을 막아 적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두었으며, 퇴각하는 적에 귀주에서 대첩을 거두니

    이 귀주대첩(龜州大捷)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 충무공의 한산도대첩(閑山島大捷)과 함께 청사에 길이 남는 승전으로 손꼽힌다.

    이 공으로 장군은 "추충협모안구공신(忠協謀安矩功臣)"의 호를 받았다.

    장군은 그 이듬해에 벼슬을 그만 두었다가 1030년 문하시중(門下侍中, 종일품)이 되었으며

    검교태사 시중 천수현개국후(檢校太師 侍中 天水縣開國侯)에 봉해졌다.

    1031년 사후 현종 조정에 배향되었고 수태사겸 중서령(守太師兼 中書令)에 추증되었다.

    시호(諡號)는 인헌(仁憲)으로 조선 문종 때 숭의전 사당에 배향되었으며,

    1974년에 낙성대 성역화 작업을 마무리 하면서 장군의 일대기를 적은 "강감찬장군사적비"를 세워

    장군의 애국충정과 호국의 얼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