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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는 "연미정(燕尾亭)"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5. 1. 8. 05:44
물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 같다는 "연미정(燕尾亭)"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인 이 정자의 초창연대(初創年代)는 확실치 않으나
1244년(고려 고종 31)에 시랑 이종주(李宗胄)에게 명하여 구재생도(九齋生徒)를 이곳에 모아놓고
하과(夏課 여름철에 50일 동안 절에 들어가 공부하던 일)를 시켜 55명을 뽑았다는 기록이 있다.
그 뒤 조선시대(朝鮮時代) 황형(黃衡)이 국가에 공로(功勞)가 많아 조정(朝政)에서 세워 하사(下賜)하였다 한다.
장무공(莊武公) 황형(黃衡)은 중종(中宗) 5년(1510년) 삼포왜란(三浦倭亂) 때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왜적을 무찌르고 그후 도총관(都摠管)을 거쳐 중종 7년(1512) 함경도(咸鏡道)지방의 야인(野人)이 반란을 일으키자
순변사(巡邊使)가 되어 이를 진압하였으며, 공조판서(工曹判書)에 이르렀다.
이곳 월곶리(月串里)는 한강(漢江)과 임진강(臨津江)이 합류하여 한 줄기는 서해(西海)로,
한 줄기는 강화해협(江華海峽)으로 흘러 그 모양이 마치 제비꼬리 같다 하여 연미정(燕尾亭)이라 부른 것이며,
높은 석주 위에 세운 팔작집으로 영조(英祖) 20년(1744) 중건(重建)하였고,
고종(高宗) 28년(1891) 중수(重修)한 후 수차례 보수(補修)되었다.
인조(仁祖) 5년(1627년) 정묘호란(丁卯胡亂) 때에는 강화조약(江華條約)을 체결(締結)한 곳이기도 한다.
이곳은 강화십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자리로서 절경을 이루고 있다.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갔다고 한다.
연미정 정자는 높다란 주초석(柱礎石) 위에 세워져 있으며,
정자 양쪽에는 수백년 묵은 느티나무 두 그루가 웅장한 자태로 정취를 더해주고 있다.
이곳은 민간인 통제구역(民間人統制區域, 民統線) 이북에 속하였다가 2008년에 개방하였는데,
이곳 월곶돈대에 오르면 북녁땅 황해도 개풍군과 파주시, 동으로 김포시가 한눈에 들어온다.
연미정은 1995년 3월 1일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 =
연미정(燕尾亭)
인천광역시 강화군 강화읍 월곶리는 임진강과 한강이 만나는 지점으로
서해와 인천으로 물길이 흐르는 모양이 제비꼬리와 같다하여 정자의 이름을 연미정(燕尾亭)이라 하였다.
강화10경의 하나로 손꼽히는 절경을 이루는 곶(串)으로 옛날에는 서해로부터 서울로 가는 배가
이 정자 밑에 닻을 내려 조류(潮流)를 기다려 한강으로 들어 갔다고 한다.
건립 연대는 정확하지 않지만 고려 1244년 왕이 구재(九齋)의 학생들을 이곳에 모아 면학케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인조가 청나라와 굴욕적인 형제관계의 강화조약(江華條約)을 맺었던 곳이기도 하다.
이후 영조 20년(1744년)에 중건되었고, 1891년 중수한 후 여러 차례 보수 되었다.
인천광역시 유형문화재 제24호
연미정 입구에는 화남 고재형(1846~1916)이 1906년에 지은 시 '연미조범(燕尾漕帆)'이 적혀 있다.
연미조범(燕尾漕帆)
燕尾亭高二水中(연미정고이수중) 연미정 높이 섰네 두 강물 사이에
三南漕路襤前通(삼남조로함전통) 삼남지방 조운 길이 난간 앞에 통했었네
浮浮千帆今何在(부부천범금하재) 떠 다니던 천척의 배는 지금은 어디 있나
想是我朝淳古風(상시아조순고풍) 생각컨데 우리나라 순후한 풍속이었는데
연미정(燕尾亭) 안내문
이곳은 장무공(莊武公) 황형장군(黃衡將軍)께서 오위도총부(五衛都摠府) 도총관(都摠官)에 이르는 30여년간을
남서북 국경을 침략하는 왜군(倭軍)과 여진족(女眞族)들을 남정북벌(南征北伐)로서 국가를 보위하신 후
공조판서(工曹判書)를 역임하시고 낙향하셔서 거처하시던 집터다.
공(公)께서는 서기 1459년에 탄생하셨으며 서기 1520년 향년 62세에 천수를 다하셨다.
부음에 접하신 중종(中宗) 임금께서는 크게 슬퍼하시면서 시호(諡號)를 장무(莊武)로 추증(追贈)하시고
이곳 연미정(燕尾亭) 전지역과 많은 전답외에 앞에 보이는 3만여평의 산지를
사패지(賜牌地)로 하사(下賜)하시면서 예장(禮葬)토록 하셨으며,
장무사에는 불천지위 신위(不遷之位 神位)를 배향하고 후손으로 하여금 제례를 거행하도록 하셨으므로
4만여 후손들은 매년 음력 10월 1일 자정(子正)에 제례를 거행하고 있다.
공(公)께서는 서기 1480년 춘추 21세에 무과와 진현시에 장원으로 합격하신후
춘추 27세에는 무과중시에서도 거듭 장원으로 합격하시고 절충장군으로 해산진 병마절제사(兵馬節制使)에 제수되셨다.
그후 표확장군에 제수되시고 회령부사, 경상좌도(慶尙左道)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를 역임하셨으며,
서기 1510년 중종 5년에 왜군이 경상도 삼포지역을 함락하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공께서는 경상좌도 방어사로 제수되시여 왜란을 평정하신후
경상좌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시고 정헌내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겸 지훈련원사로 승차하셨다.
그후 서기 1514년 서북방의 국경을 침략하는 여진족이 있었으나 평안도 병마절도사와 함경도 병마절도사에 제수되셨다.
공께서는 이들을 격퇴하므로서 남서북의 국경을 두 번씩이나 수호하신바 있어 조선조 명장록에 추대되셨으며,
문무(文武)를 겸전(兼全)하신 그 웅재무략은 일세의 무종으로 추앙되셨다.
만년에 연미정에 낙향하셔서 소나무를 심게하여 70년후
서기 1592년 왜군이 침략한 임진왜란 때 병선용재(兵船用材)로 크게 쓰인바 있으며,
그후 1597년 왜군이 재침한 정유재란(丁酉再亂) 때는 선조(宣祖) 임금께서 연미정에 오셨을 때
성책(城柵)과 주택건축용으로도 쓰인바가 있어 세인들은 공의 선견지명에 감탄하였다.
이와 같이 유비무환(有備無患)에도 대비하신바 있는 성웅 장무공 황형장군(聖雄 莊武公 黃衡將軍)이시다.
연미정 경내외에는 대나무가 있는데 이는 공께서 대마도를 정벌하고 회군할 때 손수 가지고 와서 심으신 대나무다.
또한 연미정은 조선조 때 중국 사신(使臣)을 영접하던 곳이며 국정을 논의하고 협약을 체결하던 역사적인 사적지다.
연미정은 인천광역시 문화재다.
창원(회산)황씨장무공파 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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