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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 연풍성지(天主敎 延豊聖地)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5. 6. 28. 05:27
천주교 연풍성지(天主敎 延豊聖地)
연풍성지는 충청도와 경상도를 잇는 신앙의 길목이요 교차로
한국천주교회가 창립(1784년) 된 후, 17년이 지나 일어난 신유박해(1801년)로 인하여,
조선교회의 주요 창립 선조들을 잃게 된다.
이후 교우들은 신앙을 자유로이 지키기 위해, 사람이 살지 않는 심산유곡인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을 타고,
경상도, 강원도 지방으로 삶의 터를 옮겨 신앙생활을 지켜 나가게 된다.
그 중 기슭에 있는 연풍은 문경 새재와 이화령을 넘어 경상도와 충청도를 잇는
“신앙의 길목이요 교차로”로써, 교우들이 숨어들 수 있는 천혜의 은거처였다.
그래서 최양업 토마스신부님과 프랑스 선교사 칼래(강 니콜라오)신부님도 연풍을 거쳐
경상도와 충청도를 넘나들면서 교우촌을 순방했으며, 이런 이유로 일찍이 신앙교우촌의 보금자리가 된 연풍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교우들이 체포되어 순교의 영광을 받은 곳이다.
연풍성지는 황석두 루카 성인의 고향이자 영원한 안식처
연풍 병방골(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은 황석두 루카(1813~1866) 성인의 고향이다.
연풍 성지는 성인의 묘소를 모시고 있는 곳이다.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성인은 부친이 "천주학을 버리든지 작두 날에 목을 맡기든지하라"고 강요하자
"결코 진리를 버릴 수 없습니다" 라고 하면서 작두 날에 목을 디밀었다.
작두날로도 막지 못한 황석두 루카 성인의 신심과 평신도로써 교회를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성인을 페롱신부는 “조선교구에서 가장 훌륭한 회장이었다”라고 증언한다.
평소 원하던 대로 이 세상과거 대신 천상과거에 합격하기를 원했던 황석두 루카는
1866년 3월 30일 주님 수난 성금요일에 순교의 영광을 받고, 이곳 연풍성지에 묘소 안식처를 구했다.
그러므로 연풍성지는 박해시대 때, 신앙 교우촌이 있었던 “신앙의 못자리”이며,
신앙을 위해 죽어간 거룩한 “순교의 땅”이다.
= 충청북도 괴산군 연풍면 삼풍리 187-2 =
대형십자가, 성모상과 사도요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그리고 성모님, 사도요한의 모습은 복음말씀에 따라 재현된 모습이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어머니와 그 곁에 서 있는 사랑하시는 제자를 보시고
먼저 어머니에게 "어머니 이 사람이 어머니의 아들입니다" 하시고
그 제자에게는 "이 분이 네 어머니이시다."하고 말씀 하셨다.
이때부터 그 제자는 마리아를 자기집에 모셨다.
요한 19. 26-27
치명터(사형장)
대형십자가 부근의 이곳은 사형장, 옥터 또는 도살장이라고 부른다.
죄인들이나 천주교를 믿다가 잡혀온 교우들이 형방건물에서 갖은 고문을 당한 후
배교하지 않으면 옥에서 끌어내 이곳에서 처형하기도 한 곳이다.
1869년 김요셉(68)이 치명 순교했으며, 전바오로(23)가 형구돌로 순교하였다고 전해진다.
또한 이름 모를 순교자들의 피흘림이 있었던 소중한 순교터이다.
현재 병인박해 때 “연풍 출신 순교자”로 확인된 분은 그 밖에 황안드레아, 추순옥, 조아오스딩,
간그레고리오, 김군심베드로, 황요한, 김마르티노, 김마태오, 조베로니카, 이유일안토니오가 있다.
이중에 김마르티노 그의 아들 김마태오는 한국천주교회 조선왕조치하 순교자들인
“이벽 요한세례자와 동료 132인” 시복시성 2차 대상자로 포함되었다.
교수형 형구돌
끝까지 신앙을 버리지 않는 천주교 신자들을 구멍 앞에 세운 다음,
목에 밧줄을 걸고 반대편 구멍에서 이를 잡아 당겨 죽이는 잔혹한 교수형 형구.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없이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각처에서 체포되자,
박해자들이 손쉬운 처형 방법으로 고안해 낸 것이 바로 이 '형구돌'이다.
“대군 대부이신 하느님께 죄를 짓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겠다.”고 신앙을 증거한 신앙 선조들은
밧줄이 목의 살갗을 파고들어 피가나고 숨이 끊어질 때까지 믿음을 잃지 않았다.
그동안 연풍성지에서는 모두 4개의 형구돌이 발견되었는데,
1964년에 발굴된 첫 번째 형구돌은 절두산순교기념관에 기증되었다.
그리고 1972년에 발굴된 두 번째 형구돌은 성지내 성 황석두루카 묘소 정면쪽에,
1992년에 치명터 50m 지점에서 발굴된 세 번째 형구돌은 대형십자가 오른쪽에 안치되었다.
형구돌의 직경은 1m, 둘레는 4~4.5m이고, 가운데는 한쪽 지름 25~30cm, 반대쪽 지름 7cm의 원추형 구멍이 뚫려있다.
천주는 큰 임금이고 또 큰 부모(大君大父)입니다.
비록 만번 죽더라도 천주를 배반하는 것은 불가합니다.
-우포도청등록 첫 번째 문초(병인 2월 3일) 중에서 -
다섯 성인상과 반석
병인박해가 한창이던 1866년 3월 30일 보령 갈매못(현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서 순교한 다블뤼(안 안토니오) 주교,
오메트르(오 베드로) 신부, 위앵(민 루카) 신부, 황석두(루카) 회장, 장주기(요셉) 회장 등 다섯 성인상과
성인들이 서울로 압송될 때, 그리고 다시 서울에서 갈매못으로 압송되는 도중에 쉬어 갔다는 반석.
당시 다블뤼 주교와 황석두 회장이 이 반석 위에서 구경꾼과 그들 사이에 숨어 있는 신자들에게 천주교의 진리를 강론하자,
포졸들 조차 그 위엄에 눌려 감히 이를 말리지 못했다고 한다.
또 비신자들까지도 그들의 입에서 나오는 밝은 도리에 머리를 끄덕이면서탄복해 마지않았다는 전승이 내려온다.
故 오기선(요셉) 신부가 1970년 12월 12일 충남 아산군 음봉면 삼거리에서
발견하여 절두산순교기념관에 안치하였다.
한국인 첫대주교 바오로 노기남대주교동상
노기남(盧基南, 1902~1984)
1917년 용산 성심신학교에 입학한 뒤 대신학교 신학부를 졸업하고,
1930년 10월 사제로 서품받아 명동성당 보좌신부로 활동하였다.
계성보통학교(지금의 계성여자고등학교)의 설립자 대리가 되어 가톨릭교육에 헌신하는 한편,
본당의 합창단을 신설하는 등 교회발전과 계몽운동에 노력하였다.
당시 우리나라에서 황국화 작업을 서두르던 일제가 외국인 교구장들을 모두 일본인으로 교체하려고 하자,
그 당시 서울교구장이었던 주교 라리보(Larribeau, 元亨根)가 사임을 결심하고
후임자로 노기남을 비밀리에 로마교황청에 추천하며 1942년 1월 제10대 서울교구장에 임명되었다.
급박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본당 주임신부를 거치지 않고
곧 바로 주교로 승격된 그는 일제의 종교동화정책에 계속적인 저항을 하면서,
감금된 35명의 프랑스와 아일랜드 성직자들을 일제의 압박에서 보호해 주기도 하였다.
그 공로로 프랑스 정부로부터 최고문화훈장을 받았다.
8·15광복 후 군정기간 중에 군정장관 하지의 의뢰를 받아
‘노기남메모랜덤’이라는 정부보직 적격자명단을 작성해 주는 한편,
해외에서 귀국한 이승만·김구 등의 독립운동가들과 더불어 대한민국 건국에 관하여 논의하였다.
이와 같이 당시의 우리 나라 정치·사회상황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처해가면서
교회발전과 사회봉사의 기반을 확대하는 데 주력하였다.
1946년에는 민족항일기에 폐간되었던 교회기관지 ≪경향잡지≫와 ≪가톨릭청년≫을 복간하고,
가톨릭정신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기 위하여 일간지인 ≪경향신문≫을 창간하였다.
또한, 성모병원과 성당부설학교 등을 설립하여 가톨릭의 사회적 기능을 증대시켰다.
특히 ≪경향신문≫은 당시 사상적으로 혼란을 겪고 있던 사회분위기에서
반공사상을 고취하여 좌익세력을 견제하는 데 큰 구실을 하였다.
그러나 제1공화국 말기에는 정부를 자주 공개비판하여, 결국 이승만 대통령과 마찰을 빚게 되었고,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정치주교’라는 지적까지 받았다.
자신은 교회가 직접 정치에 참여하는 것에 대해 비판적인 자세를 견지했으나,
제2공화국 수반인 장면(張勉)의 지지를 호소하는 등 가톨릭교인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확산시키려고 노력하였다.
1946년 9월에는 전국 교구장회의를 열어 한국순교자현양회를 창설,
가톨릭 순교성지인 한강 새남터에 순교기념탑을 설립하는 등 순교자 현양사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뒤에 103위 한국성인의 탄생 기틀을 마련하였다.
1950년 교황청을 방문하던 중 6·25전쟁이 일어나자 각국에 한국의 어려움을 호소하여 지원을 받기도 하였다.
또한 유엔군이 북진해감에 따라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지역에 교회재건을 시도하기도 하였다.
1953년에는 전국 교구장으로 구성된 천주교중앙위원회를 발족시켜 총재로 취임하였고,
1955년에는 미국과 유럽 등지를 순방하면서 전쟁피해의 복구와 재건을 위해 적극적인 원조를 호소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1962년 3월 대목구(代牧區)로 포교지의 성격을 벗어나지 못했던 한국교회가 로마교황청으로부터
자립능력과 성숙성을 인정받음에 따라 교계제도(敎階制度)의 설정을 위임받아,
서울·대구·광주의 세 관구를 설립하였다.
그리고 그는 서울대교구장으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주교로 승품(昇品)되었다.
1962년 10월 로마에서 열린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 참석하고 난 뒤 가톨릭교회에 제기되는
현대사회의 도전에 대해 창조적 응답을 해야 함을 절감하고 우리 나라 교회의 갱신과 세대교체의 필요성을 느껴,
1967년 3월 서울대교구장직에서 은퇴하여 성나자로마을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생활하였다.
1963년 8월에는 대한민국국민훈장, 1966년 2월에는 이탈리아 대통령이 수여하는 코멘다토레(Commendatore)훈장을 받았다.
또한 같은 해 12월에는 당시 창립된 한국종교인협의회 회장으로 선출되기도 하였다.
1984년 5월 한국교회창설 200주년에 교황을 맞이하여 103위 시성식을 끝내고 곧 선종하였다.
장지는 용인 가톨릭묘지이다. 저서로는 “나의 회상록” ·“당신의 뜻대로”가 있다.
성인 황석두 루카 동상
신분: 성 안또니오 다블뤼 주교비서
출생: 1813년 충북 연풍 병방골(현 괴산군 장연면 방곡리)에서 평해 황씨 집안에서 셋째 아들로 탄생
순교: 1866년 3월 30일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순교(斬首殉敎)
부유한 양반집 선비였던 황루카는 19세 되던 해(1832년 임진년) 스승 이학규(1770~1835)로부터 천주교를 배우고
천주교에 입교(21세)한 후, 입신양명의 뜻을 버리고 천주교리를 연구하는데 일생을 바쳤다.
부친의 엄격한 반대에 부딪쳤으나, 3년동안 벙어리 노릇을 하면서 집안 식구들을 모두 영세시키는데 성공했으며,
1845년 조선에 입국한 제3대 조선교구장 고주교(페레올)님은 속성 수업으로 황루카를 신부로 승품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교황청은 황루카 부인이 몸담고 있을 종신 허원의 수녀원이 없어 허락하지 않았다.
그 후 황루카는 고주교님의 승낙하에 부부별거로서 동정을 지켰다.
황루카 성인은 페롱권신부와 성 다블뤼 주교님의 비서로서 성서번역과 저술, 판각에 관한 일들과 교회사료수집을 도왔다.
한편 페롱권신부는 황루카가 전교회장의 임무를 훌륭히 해내자
제4대 조선교구장 베르뇌주교를 돕게하여 회죄직지(悔罪直指)발간 기초 원고를 쓰게 하였다.
그 후 1866년 3월11일 당진 세거리(현 당진군 합덕읍 신리)공소, 거더리에서
다블뤼주교님, 위앵신부님, 오페트로신부님들이 체포 당하자 황루카는
"나도 잡아가라! 저분들은 나의 스승으로서 스승이 살면 나도 살고, 스승이 죽으면 나도 죽겠다." 하여
서울로 함께 끌려가 그해 3월 23일 사형선고를 받고 일주일 후인
3월 30일(성 금요일) 충남 보령군 오천면 영보리 갈매못에서 참수 당했다.
며칠뒤 유해는 양아들 황요한에 의해 홍산 삽터에 안장했다가, 훗날 연풍 장연면 방곡리 고향으로 모셔졌다.
그 후 1982년 8월 25일 연풍성지로 다시 모셔지게 되었다.
황루카는 1968년 10월 6일 병인순교 복자 24위에 포함되어 시복(로마 성베드로대성당)된 후,
1984년 5월 6일 요한바오로 2세에 의해 서울 여의도광장에서
“한국 103위 성인”에 포함되어 성인 반열에 오르는 영광을 받았다.
순교현양비(殉敎顯揚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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