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무섬마을 무섬자료전시관
    국내 나들이/전시관(展示館) 2015. 12. 13. 05:32

    무섬마을 무섬자료전시관

     

    전통한옥 건물로 고즈넉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무섬자료전시관은

    영주 무섬마을의 역사와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향토전시관이다.

    무섬문화촌 내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문간을 넘어서자마자 너른 마당 너머 정면으로 바라보인다.

    지상 1층 규모로 내부 전시실은 총 5개의 테마로 구성되어 있으며,

    무섬마을 형성의 역사와 배경, 무섬마을 사람들의 생활과 문화, 그리고 마을이 정착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던

    자연환경에 대한 특수성까지 무섬마을의 모든 것을 일목요연하게 체계화하여 담고 있다.

     

    무섬마을(水島里)

    경상도를 가로지르는 낙동강 줄기에는 강물이 산에 막혀 물돌이동을 만들어 낸 곳이 여럿 있다.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라 불리는 경북 영주시 문수면 수도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무섬마을은 이처럼 ‘물 위에 떠 있는 섬’이라 하여 무섬마을이라 불린다.

    을 주변을 낙동강의 지류인 내성천과 서천이 휘돌아 흐르는 대표적인 물동이마을이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166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반남(潘南) 박씨인 휘(諱) 수가 이곳에 처음 터를 잡은 후 선성(宣城) 김씨가 들어와

    박씨 문중과 혼인하면서 오늘날까지 두 집안의 집성촌으로 남아있다.

    40여 가구 전통가옥이 지붕을 맞대고 오순도순 마을을 이루는 무섬마을은 수백 년의 역사와 전통이 오롯이 남아있다.

    특히 경북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인 ‘ㅁ’자형 전통가옥이 늘어서 있는 모습이 장관이다.

    반남박씨 입향조인 박수가 마을에 들어와 건립한 만죽재(晩竹齎)를 비롯해 총 9개 가옥이

    경북문화재자료 및 경북민속자료로 지정되어 있으며,

    역사가 100년이 넘는 가옥도 16채나 남아있어 조상들의 자취와 숨결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마을 내 고택과 정자들이 옛 모습 그대로 보존돼 고풍스런 옛 향취를 풍기고,

    30년 전까지 마을과 외부를 이어주던 유일한 통로,

    외나무다리가 마을의 대표 상징물로서 역사를 대변하고 있다.

     

     

     

     

     

     

     

     

     

     

    무섬에 와서 보니... -최대봉-

     

    무섬에 와서보니 알겠네

    메마른 눈짓이었을 뿐이었노라

    떠나보낸 시간들이

    여기 켜켜이 모래로 쌓이고

    물길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는것을

     

    둘 데도 놓을 데도 없이 정처 없는

    마음자리일 때

    하도 외로운 발길이 하릴없이

    물가로 향할 때

    여기

    그리움이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을

    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

     

    백년의 별빛이 해우당 지붕에

    와송으로 피어나고

    천년의 달빛이 물 위에 안개다리를 짓는

    그 아득한 적멸 속에서도

    나는 너의 웃음에 눈 감고

    너의 눈물을 가두었다네

     

    그러나, 오늘,

    무섬에 와서 보니 알겠네

    저물녘이면 강물도 모래와 더운 숨결로

    몸을 섞고

    밤새도 더러는 물을 건너 숲으로 가

    뒤척인다는 것을

     

    떠날 때는 돌아오지 않을 것을 다짐하지만

    덧없이 흐르는 이 물가에 앉으면

    그 눈빛 글썽이며 다시 돌아 와

     

    너를 생각하네

    오늘, 무섬 이 모래 둔덕에 앉아

     

     

     

    소리나는

    시내보다

    하늘을 이고

    닮아가는

    되라

     

     

     

    무섬마을 (김영진)

     

    태백산 아홉 골 물이 열려

    내성천이 서천과 합류하면서

    춤추던 물길 한 바퀴 휘돌아

    무섬마을을 안고 눕는다

    一六六六년 반남박씨 터를 잡고

    선성김씨와 더불어 살아온 반촌

    청퇴정에 오르니 아득한 역사가

    오현명 글귀 속에 빛나고 있네

    해우당 골기와 지붕에 달이 뜨면

    강물은 잠시 수인사 나누고

    조지훈 시인 처가 만운 고택에서

    시 한 소절이 아련히 들려오네

    연꽃처럼 물 위에 떠있는 무섬엔

    한세월 물망초 전설로 살아나던 얼굴

    밤새 사랑을 노래하던 백로 한쌍

    황홀히 아침안개 속으로 날아가네

     

     

     

    무섬마을 헌장(憲章)

     

    무섬마을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면 들머리에 ‘무섬마을 헌장’이 서있다.

    헌장에는 ‘우리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 예안김씨) 양성(兩性)은 우리 마을 향약(鄕約)을 굳건히 준수할 것이며,

    이의 실현을 위해 아래의 구체적 실천 방안을 헌장(憲章)으로 마련하여 이를 지킨다’고 밝혀두고 있다.

    세 가지 실천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무섬마을의 유지·보존과 관계되는 일체의 행위는 무섬마을 보존회의 의결을 거쳐 시행한다.

    2. 무섬마을에서는 마을보존회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주류(酒類)는 물론 식당, 매점 기타 일체의 상행위(商行爲) 등을 할 수 없다.

    3. 무섬마을에서는 전통적 유교 윤리를 해(害)하는 일체의 행위를 할 수 없다.

    - 무섬마을 헌장은 2003년 5월 4일에 무섬마을 보존회장 명의로 세워졌다.

     

     

     

    휘도는 물길 위에 쓰여진 무섬(水島)의 역사

     

    무섬마을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반남박씨(潘南朴氏) 입향조인 박수(朴檖; 1642~1729)가

    이 마을에 들어와 만죽재(晩竹齎)를 건립하고 터전을 개척하면서부터였다.

    무섬의 서편 건너 마을인 머럼(원암:遠岩)에 거주하던 박수가 현종 7년(1666)에 이곳으로 이주해온 후,

    그의 증손서(曾孫壻:증손녀의 남편)인 선성김씨(宣城金氏, 예안김씨(禮安金氏)라고도 함) 김대(金臺, 1732~1809)가

    영조 33년(1757)에 처가 마을인 이곳으로 들어왔다.

    이때부터 무섬마을은 반남박씨와 선성김씨가 함께 두 집안의 집성촌을 형성하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점차 인구가 늘어나면서 구한말(舊韓末)에는 120여가구에 주민 500명이 살았을 만큼 번성했지만,

    1960년대 이후 산업화가 진행되고 주민들의 이농이 늘면서 마을의 규모가 점차 줄어 한때는 사라질 위기에 처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가 시행한 ‘영남 북부 유교문화권사업 정책’으로 전통마을로 지정되면서 지금의 모습을 되찾았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의 특징

     

    ‘ㅁ’자형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

    무섬마을의 전통 기와가옥은 ‘ㅁ’자형으로 경상북도 북부지역의 전형적인 양반집 구조를 띤다.

    대문을 들어서면 안마당을 중심으로 안채와 사랑채, 문간채 등이

    사방을 둘러싸듯 배치되어 있어 대문 밖에서는 집안의 생활모습이 보이지 않는다.

    무섬마을 전통가옥은 사랑채와 안채로 드나드는 문이 따로 있고,

    안채를 사랑채보다 높게 지어 햇볕이 잘 들고 통풍이 잘 되게 하는 것이 특징인데,

    유교적 격식을 엄격하게 거주환경에도 적용한 결과이다.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한 사랑채 기둥과 서남향 고가(古家)

    안채와 달리 사랑채는 밖에서 누구나 쉽게 볼 수 있는 공간이다.

    그래서 무섬마을 전통가옥들은 그 집 주인의 신분을 쉽게 구분할 수 있도록 사랑채의 기둥을 차별화하였는데,

    같은 양반이라도 벼슬한 사람이 거처하는 집의 사랑채에는 원기둥을, 벼슬을 못한 사람은 각진 기둥을 세웠다.

    집주인의 신분에 따라 사랑채 모양을 달리한 무섬마을의 고가(古家)는 대부분 서남향이다.

    북동쪽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산맥의 정기를 고스란히 이어받기 위해 가옥을 배치했기 때문이다.

     

     

    지역독립운동의 산실, "亞島書塾(아도서숙)"

     

    충절의 고장 무섬마을에서 가장 이름을 빛낸 것은 애국지사들의 활동거점이었던 '亞島書塾(아도서숙)'이다.

    '亞島(아도)'는 아세아 조선반도 내의 수도리의 줄인 말이고, '書塾(서숙)'은 옛날 서당을 가리키는 말로,

    1928년 10월에 열어 1933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을 때까지 무섬마을의 교육기관이자 지역 항일운동의 거점 역할을 했다.

    유학을 목적으로 일본 동경에 갔던 김화진은 就學(취학)을 하지 않고

    조선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약 중 영주 청년동지들의 부름을 받고 귀국하였다.

    이 공회당인 서숙은 교향 둥지에서 청년운동 중인 김성규, 김용한, 김광진, 김계진 등이 謀議(모의)하여 9명의 운영위원을 선출하여

    공회당을 건축하고 '모임의 장소, 배움의 장소, 단결의 장소'로'亞島書塾(아도서숙)'이라는 명칭을 붙였다.

    그 이후 문맹퇴치, 민족교육, 민족정신 고양 등을 주요사업으로 하여 농민계몽활동과 독립운동을 동시에 펼쳐나갔다.

    아도서숙 운영위원들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검거와 투옥을 반복하면서도 끝까지 지역 독립운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무섬마을의 역사는 물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亞島書塾(아도서숙)'은 아쉽게도 현재 빈터만 남아있으나 복원 예정이다.

     

     

    선비마을, 독립운동가 마을로 거듭나다.

     

    무섬마을은 전국의 단일 마을 중에서 가장 많은 독립운동가를 배출한 곳이다.

    또한 유생(儒生)인 백년서생(百年書生)들이 대외투가(對倭鬪士)가 되어 투쟁한 기념비적인 동네이며,

    대부분 내.외가 일가친척들이 단합하여 일으킨 운동이란 특색을 가지고 있다.

    1928년 마을에 공회당을 짓고 한편으로는 문명퇴치에 힘썼으며, 또 한편으로는 신간회평은지부 청년동맹평은지부

    영주청년동맹본부(재건)으로 바꾸어 가다가 지하운동으로 들어가 농민조합, 비밀결사인 반제동맹적색농조가 되었다.

    5년동안 세 차례에 걸쳐 약 90여명의 포위공격을 받아 한 포승(捕繩)줄에 묶여 간 피눈물을 흘린 마을공회당이 바로 이 서숙이다.

    여기에 한을 풀지 못하고 가신님들을 글줄로서 한 대 묶어 둔다.

     

    1차(9명)-김화진(金華鎭), 김종진(金鐘鎭), 김성규(金性奎), 김계진(金啓鎭), 김명진(金命鎭),

    김광진(金光鎭), 김우규(金宇奎), 김희규(金熙奎), 박찬하(朴贊夏),

    2차(12명)-3명추가 김우진(金宇鎭), 김정한(金定漢), 김봉손(金鳳孫),

    3차(18명)-6명 추가 박찬상(朴贊尙), 박승민(朴勝民), 박승서(朴承緖), 박해양(朴海陽), 김동성(金東星), 윤비택(尹比澤),

    참여자-김용한(金龍漢), 김용진(金鎔鎭), 김지현(金之鉉), 김용(金溶), 김제안(金濟安), 김원진(金原鎭), 김영진(金寧鎭), 김제선(金濟璿)

     

    이와 같은 활동으로 김성규(金性奎, 1904~1946), 김명진(金命鎭, 1908~1950)이

    건국포장에 추서(追敍: 죽은 뒤에 관등을 올리거나 훈장을 둠)되었고,

    김종진(金鐘鎭, 1904~1952), 김화진(金華鎭, 1904~1946), 김계진(金啓鎭, 1907~1980)이 건국훈장 애족장에 추서되었다.

     

     

     

    무섬향약(水島鄕約)

     

     

    1. 우리 토착 반남박씨(潘南朴氏)는 선성김씨(宣城金氏)는

    본래 선대(先代)로부터 인척 관계에서 시작, 한마을을 이루어 오늘에 이르렀다.

    이에 우리는 우리 마을 시원(始原)을 생각하여, 너와 나 구별없이 하나 된 마음,

    “하나 된 우리”로서 무섬마을에 대한 정체성(正體誠)을 강화하고 향촌 사랑에 뜻을 함께 한다.

     

    2. 우리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는 겸허, 효, 신의, 예의, 자애 등의 인간관계를 존중하는

    전통 윤리사상을 받들어 마을을 정화하고, 인정이 넘치는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최선을 다한다.

     

    3. 우리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 양성(兩姓)은 허물어져만 가는 전통 윤리사상의 현대적 의미를 되살려,

    경로효친(敬老孝親)의 바탕 위에 가족과 친족간의 친애(親愛)를 더욱 돈독히 하며, 특히 경로사상 고취에 힘쓴다.

     

    4. 우리 반남박씨(潘南朴氏)와 선성김씨(宣城金氏) 양성(兩姓)은 이기적 개인주의를 극복하여,

    분열과 대립을 조정. 통합하는데 역량(力量)을 강화하고,

    향촌 공동체의 일체감과 결속력을 강화하여 유기적인 조화를 이루도록 노력한다.

     

    5. 우리는 인간과 자연의 일체화된 조화를 강조하여,

    선조들이 물려주신 “천혜(天惠)의 마을”을 가꾸기에 전력을 경주하여,

    날로 심해져만 가는 환경오염과 자연 파괴행위 등을 일체 금(禁)하고 이를 지속적으로 강력히 단속한다.

     

     

     

    외나무다리 건너 옛 정취 가득한 섬마을

     

     

    무섬마을의 산 역사, 외나무다리

    무섬마을에 총연장 180m, 폭 5.5m의 현대식 콘크리트 다리인 수도교가 놓인 것인 1983년이다.

    수도교가 건설되기 전까지만 해도 외나무다리가 바깥으로 통하는 유일한 통로였다.

    책보를 메고 학교 가는 아이, 장가가는 새신랑, 꽃가마 타고 시집오는 새색시,

    황천길로 가는 상여도 어김없이 이 외나무다리를 건너야했다.

    외나무다리는 지난 350여 년간 무섬마을과 뭍을 이어준 유일한 통로로 애환어린 추억의 역사를 지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긴 외나무다리 복원

    사라졌던 외나무다리가 무섬마을에 다시 놓인 것은 2005년이다.

    “조상들의 삶을 후손들에게 보여주자”는 생각에 옛날 방식 그대로 다리를 만들었다.

    새로 복원된 외나무다리는 폭 20cm~25cm에 길이 150m,

    높이는 하천바닥에서 60cm로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만큼 좁다.

     

    추억의 외나무다리 축제

    2005년부터 매년 10월이면 무섬마을에서는 “한국의 아름다운 100선”중 하나로 선정된

    외나무다리를 주제로 “추억의 외나무다리 축제”를 개최한다.

    축제에서 무섬 사람들의 옛 생활 모습을 재현한 생과 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어 관광객들의 큰 호응을 얻고 있다.

     

    무섬 사람들의 여유를 닮은 비껴다리

    폭 20cm~25cm의 좁은 외나무다리 위를 걷는 것은 쉽지 않다.

    다리의 중간 중간에는 마주 오는 이를 피해갈 여분의 짧은 다리인 “비껴다리”가 놓여 있다.

    서로 마주보고 건너오던 사람들은 이 비껴다리에서 서로 길을 양보하고,

    때로는 그곳에 걸터앉아 한담(閑談)을 나누는 등 무섬마을의 정을 나누었다.

     

     

     

     

     

     

     

    오헌(吾軒)

     

    크기 : 95cm×45cm

    글쓴이 : 박규수(朴珪壽)

     

    현판의 시에 나타나있듯이 부귀영화를 멀리하고 고향에 은거하며 ‘검소하게 사는 집’이라 볼 수 있다.

    재물이 없으면 검소하게 살면되고, 많으면 베풀면 살면된다. 그러나 없으면 쪼달리며 살고, 많으면 사치하기 쉽다.

    나보다 재물이 많은 사람을 만나면 비굴해지기 쉽고, 재물이 적은 사람을 만나면 오만해지기 쉽다.

    높을 때 겸손하고, 낮을 때 비굴하지 않게 살기를 알려준다.

     

     

     

     

    별리(別離) - 조지훈

     

    푸른 기와 이끼 낀 지붕 너머로

    나즉히 흰 구름은 피었다 지고

    두리기둥 난간에 반만 숨은 색시의

    초록 저고리 당홍 치마 자락에

    말없는 슬픔이 쌓여 오느니 ―.

     

    십리라 푸른 강물은 휘돌아 가는데

    밟고 간 자취는 바람에 밀어 가고

     

    방울 소리만 아련히

    끊질 듯 끊질 듯 고운 메아리

     

    발 돋우고 눈 들어 아득한 연봉(連峰)을 바라보나

    이미 어진 선비의 그림자는 없어...

    자주 고름에 소리 없이 맺히는 이슬 방울

     

    이제 임이 가시고 가을이 오면

    원앙침(鴛鴦枕) 비인 자리를 무엇으로 가리울고

    꾀꼬리 노래하던 실버들가지

    꺾어서 채찍 삼고 가옵신 임아...

     

     

     

    섬계(剡溪) 박제익(朴齊翼 1806-1841)선생 詩

     

     

    하늘의 명승 감추어 몇 해가 흘러든고

    소백산 남쪽이오 학가산 앞이로세

    천 이랑 푸른 물엔 물고기 맘껏 뛰고

    십리 모래밭엔 해오라기 한가로이 조네

    한평생 벽장 위 금서에 뜻을 두어

    반생토록 마음은 동수 안개 아니어라

    이 밖의 흥겨운 곳 어디서 찾을 손가

    달 밝은 무섬에다 살 곳을 마련했네

     

     

    3463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