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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국내 나들이/바다(海)로 2015. 12. 25. 07:05
영흥도 십리포해수욕장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해서 이름이 붙여진 십리포 해수욕장은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내리 영흥도에 위치하고 있으며, 인천광역시에서 서남쪽으로 약 32㎞ 떨어진 곳에 있다.
섬 동쪽에는 육지와 연결된 대부도가 있고 서쪽에는 자월도가 있다.
영흥도는 옹진군에서 백령도 다음으로 큰 섬이다.
섬의 북쪽 끝에 있는 해수욕장에는 900여 평의 수백 년 된 소사나무 숲이 있어
여름철에는 더위를 식혀주는 정자나무 역할을, 겨울에는 방풍림 역할을 한다.
전국 유일의 해변 괴수목 지역으로서 옹진군에서는 이를 적극 보호하고 있다.
약 4㎞의 왕모래와 자갈이 섞인 해변, 1㎞의 고운 모래밭은 주변 경관과 잘 어우러져 아름다운 풍경을 만들어낸다.
특히 야간에는 인천광역시의 불빛이 보여 장관을 이룬다. 해변 서쪽으로는 기암괴석이 우뚝 솟아 있다.
영흥익령군(靈興翼靈君)길
고대의 유적과 유물로 출토된 토기 패총의 발견으로 조사된 것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주민과 같은 사람이 살았으며,
삼국시대에는 해상교통의 요충지로 영흥도 지역까지 보호하려는 삼국(신라, 백제, 고구려)간의 쟁패가 있었으며,
고려 중기 원종에서 충숙왕(1267~1319) 때에는 정치범의 유배지였고,
원종 13년(1270년대) 경에는 삼별초의 은둔지가 되었으며, 대몽 항쟁기에는 영흥도가 삼별초의 항쟁 기지로
역사에 뚜렷이 등장했던 시기이며 영흥도에 주민 입주와 개간이 이루어진 때이기도 하다.
고려 말기에 나라가 망할 것을 알고 왕족 출신인 익령군 왕기(王琦)가 피신을 와서 신분을 숨기고 은거하며
후손들의 화를 피하기 위해 성을 바꾸어 옥(玉)씨와 전(全)씨로 성을 바꾸고 목장의 말을 기르는 목자로 살았다고 전해진다.
영흥도에 주민 입주가 본격화된 것은 17세기 마성이 생기며 목장의 확대에 있었다.
병자호란 이후 한말까지 강화도와 도성 방어 체계의 강화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져 오며
영흥도에 대한 국가적 관심도가 지대하여 지면서 업벌에 영흥진을 설치한 것이 그러한 대표적 사례이다.
인천상륙작전의 전초기지 "영흥도"
미국 극동사령부 해군 정보장교 클라크(Eugene F Clark)대위와 대한민국 해군 정보부대
KL0-8240(KL0: Korea Liaison Office, 미 극동군사령부 주한연락처) 부대원은 1950년 9월 15일 01:40에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힌다.
이 등대 불을 신호로 유엔군은 261척에 달하는 연합함대가 05:00부터 공격 준비 사격에 이어
상륙주정(LCVP) 20척에 분승하여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였다.
06:33에 녹색해안(Green Beach)인 인천월미도에 상륙하여 06:55분에 월미도 105고지 정상을 탈환하였고,
08: 00 월미도를 확보한 후, 정오 쯤 소탕작전을 완료하였다.
월미도 상륙작전 시 미 해병대의 총 피해는 부상자 17명이었으며, 적 사살 108명, 포로 136명을 생포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인천상륙작전은 한국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대대적인 작전이었다.
그러므로 미 극동군 사령관인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북한군 첩보활동을 위한 부대 창설을 요청했다.
함명수 소령, 임병래 중위, 홍시욱 하사 등 17명의 대원으로 구성된 해군특수 첩보부대가 비밀리에 창설된배경이다.
해군 첩보대는 8월18일 01:00에 어선을 타고 부산항을 떠나 6일째인 8월24일 서해 영흥도에 도착했다.
작전보안을 위해 첩보작전의 거점인 영흥도에 도착해서야 함 소령은 대원들에게 작전(작전명;x-ray)의 목적과 구체적인 임무를 하달했다.
특수첩보대 대원들은 3개 조로 나뉘어 인천과 서울, 수원을 왕래하면서 북한군에 관한 첩보활동을 펼쳤다.
인천상륙작전 개시 하루전, 영흥도를 거점으로 첩보활동을 펼치던 특수첩보대에 철수령이 떨어졌다.
철수준비를 서두르던 02:00, 한국군의 첩보활동을 뒤늦게 감지한 북한군 1개대대가 영흥도를 기습했다.
영흥도에는 17명의 첩보대원과 영흥도 청년방위대원 6명만 남아 있었다.
첩보대원과 청년방위대원이 적의 공격을 필사적으로 저지하는 동안
나머지 9명의 첩보대원들은 해안에 정박해둔 마지막 보트를 타고 탈출했다.
상륙작전을 불과 24시간 앞두고 영흥도 전투에서 8명의 해군첩대원과 영흥도 청년방위대원 6명 등 14명이 전사했다.
이후 북한군은 영흥도를 완전히 장악한상태에서 그동안 한국해군 첩보대와 클라크 첩보대에게 적극 협조한
영흥도의 청년들을 학살하였는데, ‘한국전쟁’ 2의 기록에 의하면 "9월16일 미 해병대가 영흥도를 점령해보니
클라크 퇴거한 직후에 1개 대대(400명정도)의 북한군이 상륙하여
아군에게 협력한 부락민 50여명을 참살했음을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와같이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은 잘 알려지지 않은 여러 희생자들의 호국정신과
영흥도 주민들의 갸륵한 애향심에 의하여 이루어진 것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영흥대교(靈興大橋)
1997년 8월 착공하여 2001년 11월 15일 준공하였다. 한국남동발전(주)이 영흥화력발전소 건설과 연계하여 추진한 사업으로,
설계는 유신코퍼레이션(주)이, 시공은 현대건설(주)을 비롯해 총 36개 업체가 참여하였다.
인천광역시 옹진군 영흥면 영흥도(靈興島)와 선재도를 잇는 길이 1,250m, 너비 9.5m의 왕복 2차선 도로이며,
국내 기술진에 의해 최초로 건설된 해상 사장교(斜張橋, 탑에서 비스듬히 친 케이블로 거더를 단 다리)이다.
총사업비는 1700억 원이 들었고, 연인원 30만 명이 투입되었다.
이 다리의 건설로 2000년 11월 17일 준공된 '선재대교(仙才大橋)'와 함께 인천-대부도-선재도-영흥도를 잇는
새로운 도로지도가 만들어졌고, 그동안 인천과 영흥도를 오가던 1시간 거리의 뱃길이 육로로 통하게 되었다.
영흥도 지명에 관한 유래
고려말 왕족 익령군 왕기는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알고 비운을 맞을까 두려워 성과 이름을 바꾸고
온 가족과 함께 집을 떠나 사람이 살지않는 섬으로 가서 숨어 살기로 했다.
무작정 배를 띄웠지만 항로도 잘 모르는데다 파도가 심하여 구사일생 끝에 이 섬, 영흥도에 닿았다고 한다.
영흥도는 당시 왜구가 창궐하여 사람들이 살지 못하는 섬이었다.
왕기는 왕족으로서 해보지 못했던 고된 일이지만 버려진 땅을 일구고 짐승을 기르고 고기를 잡으면서 섬에 정착해갔다.
그러면서도 고려의 국운이 기울어지는 것을 안타까워하며 매일 높은 산에 올라가서 개경을 바라보았는데,
이산은 '국사봉(國思峰)'이라고 이름 지었다.
섬으로 들어 온 지 3년만에 고려가 망하고 대부분의 왕족들이 거제도에서 수장되어 몰살당하는 비극을 겪지만
미리 피신했던 왕기 일가는 환난을 모면하고 이곳에 터를 잡아 목동일을 하며 목숨을 보존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이 섬의 이름이 익령군의 '영(靈)'자를 따서 영흥도가 되었으며, "영혼이 흥하는 섬"이란 뜻을 지니고 있다.
그런 이름 때문에 낭만적인 섬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2001년 건설된 영흥대교를 통해 주말이면 많은 탐방객들이 찾고 있다.
십리포 지명에 관한 유래
장경리해수욕장과 근거리에 있는 십리포해수욕장은 영흥도 선착장에서 10리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고 하여
'십리포(十里浦)'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이곳 십리포해변은 인천에서 서남방으로 32Km 떨어진, 영흥도의 북쪽에 위치한 해변으로써
해변의 총길이가 1Km, 폭 30m의 왕모래와 작은 자갈로 이루어진 특이한 지역으로
해변 서쪽으로는 기암괴석이 길게 뻗어 있어 장관을 이루고 있다.
또한 해변의 후면에는 150년 이상된 3백 그루의 서어나무 군락지역으로 유명하며,
전국적으로 유일한 괴수목 지역으로 1997년 인천광역시 보호수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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