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숙지산 화성 채석장(熟知山 華城 採石場)
    수원사랑/수원화성(水原華城) 2016. 2. 9. 21:54

    숙지산 화성 채석장(熟知山 華城 採石場)

     

     

    수원시 팔달구 화서2동 산 41번지 화서전철역 부근 옛 전매청 연초제조창(현 KT&G 수원지점)의 건너편

    숙지산(熟知山) 여러 곳에 분포하고 있으며, 화성을 축조하기 위한 성돌의 채석(采石)이

    이루어졌던 유적으로 팔달산과 함께 중요한 성돌의 공급원이었던 곳이다.

    이곳에서 채석된 성돌은 수레를 이용, 치도(治道)를 통해 화성 축성 장소까지 운반되었다.

    채석 당시의 쐐기 자국이 여러곳에 남아있어 역사적으로 높은 가치를 지닌 유적이다.

    숙지산 화성 채석장은 2006년 12월 26일 수원시향토유적 제15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숙지산(熟知山)이란 명칭의 유래를 알아보면, 원래는 ‘죽지산(竹枝山)’이라 했으나,

    이를 한자로 된 명칭과는 달리 음성으로 들리는 소리로 듣다보면 ‘죽는다’는 뜻으로 연상이 되어

    ‘숙지산’으로 바뀌게 되었다고 전해지는가 하면.  이와는 달리 정조대왕이 팔달산에 올라가서 이 산을 바라보며,

    ‘우리가 이미 알고 있던 산이니 숙지산(熟知山)이라고 부르라’고 한데서 숙지산이라는 이름이 나왔다고도 전해지고 있다. 

    숙지산이 역사적으로 많은 공헌(화성축성에 공헌)을 했다 함은, <화성성역의궤>기록 중에서 살펴보면

    “돌 캐는 곳(부석소, 浮石所)은 다섯 군데였는데, 이것을 숙지산 2군데, 여기산 2군데 설치하였고 권동에 1군데 설치하였다. 

    대체로 숙지산 돌은 강하면서도 결이 곱고, 여기산 돌은 부드러우면서도 결은 거칠었다. 

    권동 돌은 여기산 돌과 비슷하면서도 약간 곱고,

    팔달산 돌은 숙지산 돌에 비하여 더 강하고 여기산 돌은 팔달산 것보다 더 거칠었다. 

    화성부 서쪽 5리 떨어진 여기산 2곳과 권동, 서성 터를 닦다 발견한 팔달산 왼쪽 등성이에서부터

    남쪽으로 용도에 이르기까지 600보~700보 석맥(石脈) 등 6곳이 발견되었다. 

    팔달산 것은 숙지산에 비해 강하고 여기산보다 거칠었다.

    이 여러 곳에서 떠내 돌을 통들어 계산하면  숙지산(熟知山)돌이 약 81,100여 덩어리, 여기산(如岐山)이 약 62,400여덩어리,

    권동(勸洞, 앵봉鶯峰)의 돌이 약 32,000여덩어리, 팔달산(八達山) 돌이 13,900여덩어리 등 모두 189,400덩어리였다.

    현재 여기산(麗岐山)은 화성성역의궤에는 여기산(如岐山)으로 표기되어 있다.

     

     

     

     

     

     

     

     

     

     

     

     

     

     

     

     

     

     

     

     

     

     

    수원화성 축성시 사용한 189,400 덩어리의 돌 중 약 40%이상이 숙지산에서 공급되었다.

     

     

     

     

    정조대왕(正祖大王)이 전교를 내리시어

     

    면(面) 이름을 "공석(空石)"이라 하고 산의 칭호를 "숙지(熟知)"라 했으니, 

    이른바 옛부터 돌이 없는 땅이라 일컬어졌는데, 오늘날 갑자기 셀 수 없이 

    단단한 돌을 내어 성 쌓는 용도로 됨으로써 "돌이 비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암묵 중에 미리 정함이 있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 

    병진년(1796년) 정월 24일 화성성역의궤에서

     

    숙지산(熟知山)

     

    숙지산(熟知山, 옛지명은 孰知山)이 있는 곳의 지명은 공석면(空石面)인데

    이곳에 돌이 많다는 채제공의 보고를 받은 정조임금은

    1796년 1월 24일 수원에서 환궁하는 길에

    "오늘 갑자기 단단한 돌이 셀 수 없이 발견되어 성 쌓는 용도로 사용됨으로써

    돌이 비워지게(空石) 될지 누가 알았겠는가(孰知)? 암묵(暗默) 중에

    미리 정함이 있으니 기이하지 아니한가?"라고 감탄하게 된다.

    공석면 숙지산은 지금의 영복여고 뒷산이니 화서동 숙지산을 일컫는 것이다.

    지금도 숙지산과 팔달산 곳곳에는 돌을 뜬 흔적이 남아 있다.

    이 산들의 돌을 뜨는 자리를 부석소(浮石所)라고 했는데,

    팔달산 1군데, 숙지산 2군데, 여기산 2군데,

    권동(서호방죽 주변의 앵봉산鶯峰山이나 동말 주변으로 추정) 1군데가 설치되었고,

    각 부석소에서 캐낸 양은 팔달산 13,900덩어리, 숙지산 81,100덩어리,

    여기산 62,400덩어리, 권동 32,000덩어리 등 189,400덩어리였다.

    부석소에서 떠낸 돌은 치석소로 보내어 일정한 규격으로 다듬어

    소가 모는 대거(大車 : 소 40마리가 끄는 수레), 평거(平車 : 소 4~8마리가 끄는 수레),

    발거(發車 : 소 1마리가 끄는 수레)와 사람이 끄는 동거(童車 : 장정 4인이 끄는 수레) 등

    수레를 이용해 정조임금의 지시대로 닦은 ‘화살 같이 쭉 곧고 숫돌처럼 평평한’

    치도(治道)를 통해 축성 현장으로 옮겨와 성곽을 쌓았다.

     

     

     

    돌 뜨던 터, 부석소(浮石所)

     

    숙지산(熟知山)은 화성을 축성(1794.1~1796.9)할 때 대부분의 돌을 조달했던 곳이다.

    지금도 바위 군데군데에 돌을 자르기 위해 쐐기를 박았던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다.

    정(釘)을 사용해 돌에 구멍을 판 뒤, 그 속에 물푸레나무나 밤나무 등을 박고 물을 부어 팽창하는 힘으로 돌을 잘라냈다.

     

     

     

     

    359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