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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 - 유관순열사유적지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6. 3. 1. 05:52

    유관순열사기념관(柳寬順烈士記念館) - 유관순열사유적지


    유관순열사기념관은 유관순열사의 탄신 100주년을 기념하여 2003년 4월 1일 개관하였다.

    유관순열사의 수형자 기록표, 호적 등본, 재판기록문 등 관련 전시물과 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을 재현한 디오라마,

    재판 과정을 담은 매직 비젼, 열사의 생애를 닥종이 인형으로 재현하는 등

    열사의 출생에서 순국까지의 일대기를 전시물과 영상, 다양한 체험을 통해 살펴볼 수 있도록 하였다.


    건물규모 : 542.7㎡(지상 1층, 지하 1층), 건물양식 : 팔작지붕 전통 한옥 형태, 주요시설 : 전시실, 영상실, 체험공간


    = 충남 천안시 동남구 목천읍 목천안터 1길 15 (탑원리) 유관순열사유적지 =











    유관순열사의 생애


    유관순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충청남도 천안시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의 5남매 중 둘재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이소제이다.

    이화학당에서 공부하던 중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일어나자 이에 참여하였다.

    조선총독부의 휴교령으로 학교가 폐쇄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으로 내려온 열사는

    인근 지역 주민들과 연락하여 4월 1일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열사는 시위현장에서 부모를 잃고 체포되어 공주지방법원을 거쳐 경성복심법원에서 3년형을 선고받았다.

    1920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 1주년을 맞아 서대문감옥에서 만세 운동을 주도하였다.

    1920년 9월 28일 유관순열사는 일제의 가혹한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순국하였다.

    열사의 시신은 이화학당 주선으로 이태원 공동묘지에 안장하였으나, 후에 망실되었다.

    정부는 1962년 3월 1일 대한민국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학창 시절의 유관순


    이화학당 고등과에 재학중인 유관순은 1919년 3월 1일 기미독립만세운동이 전개되자

    국현숙, 김희자, 김복순, 서명화 등의 학생들과 결사대를 조직하여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3월 5일 유관순은 학생단 만세시위운동에도 참여하였다. 3월 10일 중등학교 이상의 학교에 대한 임시휴교령이 내려지자,

    3월 13일 고향으로 내려와 서울의 독립운동 소식을 전하고 고향에서 계속 독립운동을 전개할 것을 계획하였다.





    아우내 독립만세운동


    3월 13일 유관순은 사촌 언니인 유예도와 함께 귀향하여 고향에서 아우내독립만세운동을 벌였다.

    유관순은 아버지 유중권을 비롯하여 조인원, 김구응 등 20여명의 동네 유지들과 4월 1일 아우내 장날 정오에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기로 논의하고 인근 각 면, 촌에 연락기관을 두고 대규모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31일 유관순은 용두리 매봉산에 봉화를 올렸으며, 주변 24개 지역에서도 일제히 봉화를 올려 호응하였다.

    4월 1일 조인원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유관순을 필두로 한 3천여명의 군중들은 태극기를 앞세우고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에 병천 주둔 일본헌병들과 지원군이 일제히 사격을 가하여

    유관순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포함해 수많은 사망자와 부상자가 발생하게 되었다.






    옥중투쟁과 순국


    유관순은 군중들과 함께 병천 헌병 주재소로 돌진하여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하는데 어째서 총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하면서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이에 일본 헌병들은 재차 무차별 총격을 가하여 군중들을 해산시킨 뒤 유관순을 비롯한 시위 주동자들을 체포하여 천안헌병대로 압송하였다.

    아우내독립만세운동으로 열사의 부모는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집마저 불태워졌다.

    열사는 공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 받고 경성복심법원에서 항소하여 3년형을 선고받고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1920년 3월 28일 영친왕과 일본인의 결혼을 기념하여 모든 수행자의 형기를 반으로 감하여 출옥시키는 특사가 있었지만,

    이 옥중 만세 사건으로 유관순은 출옥에서 제외되었다.

    결국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계속된 고문과 영양실조로 서대문 형무소에서

    그렇게도 목메어 외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꽃다운 나이 19세에 독립선언의 정신을 끝까지 지키다 순국하였다.






























    殉國少女 柳寬順烈士 招魂墓 奉安 紀念碑

    (순국소녀 유관순열사 초혼묘 봉안 기념비)





    순국소녀(殉國少女) 류관순열사(柳寬順烈士) 초혼묘(招魂墓)와 존영상(尊影像)을 봉안(奉安)하면서


    3.1독립선언으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자주 자존의 기치아래 4.1아우내 독립만세운동의 주역 류관순 애국소녀가

    일제(日帝)의 잔인무도한 고문(拷問)과 만행으로 목숨을 거두는 순간 “나를 죽일 수는 있어도 우리나라 독립은 막을 수 없다.

    너희들은 반드시 망하고야 말 것이다” 이 한마디를 남기고 피살(被殺) 당하시니

    때는 1920년 10월 12일 천추에 한이 서린 애석한 날이기도 하다.

    이뿐이랴 채 피어보지도 못한 한떨기 꽃봉오리 열일곱살 처녀 류관순은 사지(四肢)가 육시(戮屍)로 찢기고

    유택(幽宅)마저 파헤처저 흔적없이 망실(亡失) 당하였으니 동서고금(東西古今)에 또 이런일이 있으랴.

    이 엄청난 현실앞에 열사의 원한과 민족의 분노를 무엇으로 푸르오리까!

    침략자 일제의 천인공노(天人共怒)할 만행과 인류 역사에 다시없는 단말마적(斷末魔的) 폭악을 엄히 규탄하면서

    순국소녀 류관순열사의 고혼마저 편히 쉴 유택없이 70여 성상이 무관심속에 흘렀음을

    우리 모두는 자책과 애통한 민족의 분노를 금할길 없어 열사의 한 맺힌 원한을 풀어드리고 영혼을 위로하여

    영구히 잠드실 초혼묘(招魂墓)와 존영상(尊影像)을 봉안(奉安)하고 봉화대 등정로를 준공하여

    순국소녀 류관순열사의 숭고한 우국충정과 정신을 기리 받들고 빛내고저

    역사의 현장 이곳에 겨레의 이름을 빌어 엄숙한 마음으로 이 비를 세우노라


    1990년 4월 초하루 의거일을 맞이하여


    建立 柳寬順烈士記念事業會 會長 柳根昌, 委員長 金在鴻

    碑文 雅寬 金在鴻 짓고 霧林 金榮基 씀






    유관순열사 유적(柳寬順烈士 遺蹟) - 사적 제230호


    충남 천안시 병천면 유관순길 38 (탑원리)

    이곳은 기미년 독립운동에 앞장섰던 유관순(1902~1920)열사의 애국 애족정신을 기리고 영혼을 추모하는 곳이다.

    열사는 1902년 12월 16일 병천면 용두리에서 아버지 유중권씨와 어머니 이소제씨의 5남매 중 둘째딸로 태어났다.

    이화학당에 다니던 중 서울의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1919년 4월 1일 3천여 군중이 참여한 호서지방 최대의 독립운동인 아우내만세운동을 주도하였다.

    그러나 열사는 체포되어 3년형을 선고받고 옥중에서 투쟁하다가 갖은 폭행과 고문에 못이겨 1920년 9월 28일 순국하였다.

    1969년부터 유적지를 조성하여 1972년에 건립한 추모각을 비롯하여

    생가, 봉화탑, 독립기념비, 동상, 영정, 초혼묘, 유관순열사 기념관 등 관련 유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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