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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詞文學館)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6. 6. 8. 05:25

    한국가사문학관(韓國歌詞文學館)


    전라남도 담양군은 독수정, 식영정 등 이름난 누와 정을 중심으로 주옥같은 시문이
    창작된 오랜 문학의 전통을 지닌 고장이다.

    대쪽같이 올곧은 선비정신을 이어 받은 사림들이 불합리하고 모순된 현실정치에서
    물러나 담양에 누정을 짓고 수신과 후진양성에 힘썼다.

    선비들은 국란 때는 구국에 앞장섰으며, 평상시에는 시문 창작을 통하여 자연과 몰아일체가 된 기쁨,

    경국제민의 포부와 이상사회 실현 등 다양한 목소리를 담아냈다.

    가사문학은 고려 말에 발생한 시 갈래로서 4음량 4음보의 리듬을 지닌 한국인에게 친숙하고 개방적인 형식이다.

    한문이 주류를 이루던 시대에 한글을 사용하여 우리의 사상과 감정을 우리식으로

    자유롭게 발휘한 주체적 문학 활동이었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는다.

    고려시대 승려들의 불교 교리 전파에 이용된 가사는 조선시대에 들어와 사대부는 물론

    서민, 부녀자들까지도 가사를 창작하였는데 양반가사, 서민가사, 규방가사 등이
    그것이다. 또한 필요와 목적에 따라 다양한 문학 도구로 활용되었는데 동학가사,
    기행가사, 유배가사, 애국계몽가사 등이 그것이다.

    담양에서 지어진 가사작품은 전체 17편으로 우리말의 자유로운 사용, 구성의 치밀함,

    남도 특유의 낭만적 정서 표출 등 문학적으로 우수성이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 가운데 양반가사의 효시로 꼽히는 이서의 <낙지가>, 강호전원가사의 백미로 평가되는 송순의 <면앙정기>와

    정철의 <성산별곡>, 충신연주가사의 명품으로 우리나라 참 문장으로 칭송된

    정철의 <관동별곡><사미인곡>과 <속미인곡> 등은 익히 알려져 있다.

    또한 담양 지역 가사는 조선시대 중엽 이서의 <낙지가>로 부터 20세기 초 정해정의 <민농가>까지

    700여 년 이상 끊임없는 전통을 이어왔다는 역사성과 제작된 작품들이 매우 뛰어나다는 문학성 등에서

    다른 지역 가사와는 뚜렷이 비교된다.

    가사문학의 정신문화 전통을 계승.발전시키기 위하여 2000년에 개관한 한국가사문학관에는

    가사문학 작품이나 작가와 관련한 다양한 정보뿐만 아니라 임억령.김성원.고경명. 정철 등

    성산사선에 관한 귀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다.

    특히 송순의 <분재기>와 정철의 친필유묵 등 귀중한 유물들이 다량 전시되고 있으며

    부속 건물로 자미정과 세심정, 전통찻집 등이 있다.


    = 전남 담양군 남면 가사문학로 877 (지곡리) =











































    눌재(訥齋) 박상(朴祥) -1474(성종 5)∼1530(중종 25)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이며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진사 지흥(智興)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으므로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는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은 마음대로 외직에 보임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논핵(論劾)하자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봉양을 위하여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하여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또한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하여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중시에 장원하고 이듬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으나,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 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에 관한 상소는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라고 조광조(趙光祖)가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으며,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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