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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철스님기념관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7. 1. 20. 04:31
성철스님기념관
성철스님기념관 건립은 2011년 성철 스님 탄신 100주년 사업을 시작하면서,
성철 스님의 친딸 불필(不必) 스님과 이사장 원택 스님 등이 뜻을 모으면서 준비했다.
2012년 설계도를 만들고 2013년 5월 착공하여 2015년 4월 회향했다.
기념관은 3층 높이로, 1층은 120평 공간에 성철 스님의 설법상을 모신 석굴 형태의 참배공간이다.2층은 ‘퇴옹전(退翁殿)’으로 불자들의 수행과 정진공간이다.
기념관 외형은 팔정도를 의미하는 연화좌대 위 8개 기둥이 건물을 받치는 형태이다.
모습은 돈황 명사산 월아천을 형상화했다. 왼쪽 벽면에는 스님의 출가송을, 오른쪽 벽면에는 오도송을 조각했다.
출가송ㆍ오도송 뒤로는 스님의 생전 모습이 담긴 사진을 오석에 레이저 가공해 장엄했다.
현관 정문 좌우에는 청동부조로 금강역사상을 세웠다. 위쪽은 미륵좌불 부조상을 배치했다.건물 외벽전체는 1000 미륵불을 도자로 모셨다.
건물 입구에 들어서면 성불문 좌측에는 ‘참선수행자에게 내린 경책글’,
우측에는 ‘공부인에게 주는 글’이 1.5m*3m 규모로 대리석에 조각돼 있다.
두 글은 스님이 끊임없는 정진을 당부하며 남긴 글이다.
성불문은 아잔타ㆍ엘로라 등 석굴 등을 모티브로 조성한 석굴의 입구이다.성불문을 지나면 중앙에 흰 대리석에 조각한 성철 스님의 설법상(1.5m*1.5m)이 있다.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설법하던 스님의 모습을 재현한 상이다.
설법상 뒤로는 부조형 연꽃만다라상 아래 과거세 연등불, 현재세 석가모니불, 미래세 미륵불이 자리한다.
설법상 맞은편(성불문 바로 뒤편) 위로는 비로자나불이 모셔져 있다.
석굴안 좌우 둥근 벽면에는 32cm*25cm 크기 청자감실 1000개를 만들었다.
감실 안에는 25cm 크기 석가모니불 1000불이 봉안돼 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199-4
팔정도를 뜻하는 8개의 기둥 위 벽면은 14조각의 도자로 조성한 비천상으로 장엄했다.
기념관 1층 벽면에는 1000불의 미륵불이 봉안돼 있다.
기념관 좌우측에는 성철 스님의 출가송과 오도송을 새겼다. 배경은 스님의 생전 사진을 새겼다.
자성청정경(自性淸淨鏡)
우리의 마음은 본래 청정합니다.
티끌도 번뇌도 없이 깨끗합니다.
다만 망상에 가려 마음의 눈을 뜨지 못하니
이 거울을 보고 한 물건도 없는 자기를 바로 봅시다.
우리는 본래 부처님입니다.
성철스님 념관에 들어서면 빙 두르는 석불 사이로 석굴 같은 청자감실이 나온다.
흰 대리석으로 된 성철 스님의 설법상이 과거세 연등불, 현재세 석가모니불, 미래세 미륵불과 함께 있다.
참선 수행자에게 내린 경책글
현세는 잠깐이요 미래는 영원하다.
잠깐인 현세의 환몽에 사로잡혀 미래의 영원한 행복을 잃게 되면
이보다 애통한 일은 없다 .
만사를 다 바리고 오즉 정진에만 힘쓸 지어다 .
화두를 확철히 깨치면은 미래 겁이 다하도록 자유자재한 대행복을 얻느니라
깨치지 못하고 무한히 연속되는 생사고를 받을 적에
후회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리요
신명을 돌보지 말고 부즈런히 참구하라
경술 성철(庚戌 性徹)
기념관 좌측면에는 성철 스님이 쓴 보현행원품이 우측면에는 금강경이 돌에 새겨져 있다.
성철대종사(性徹大宗師)
1912년 4월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엄부 이상언님과 자모 강상봉님 사이에서 장남으로 태어났다.속명은 영주(英柱)이고 법호는 퇴옹(退翁)이다.
소학교를 졸업하고 서당에서 자치통감을 배우면서 한문문리를 터득한 후 다른 이에게 더 배우지 않았다고 한다.
1936년 봄 가야산 해인사로 출가하여 하동산(河東山)스님을 은사로 수계득도 하였다.1939년 도를 깨친 이후 파계사 성전암에서 행한 10여년의 장좌불와(長坐不臥)와 동구불출(洞口不出)이 세간에 회자되다.
1967년 해인총림 초대 방장에 취임하였으며 1981년 1월에 대한불교 조계종 제7대 종정에 추대되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라는 법어를 내려 온 국민의 불심을 일깨웠다.
1993년 11월 4일 새벽 , 해인사 퇴설당에서 제자들에게 "참선을 잘하라" 는 말씀을 남기고세수 82세 법랍 58년의 세연으로 열반에 드셨다.
성철(性徹)스님
“자기를 바로 봅시다. 자기는 원래 구원되어 있습니다.” 이 말은 성철스님이 생전에 가장 좋아한 말이다.
1936년 25세의 나이에 출가하여 성철(性徹)이란 법명을 받은 후 인간 한계를 넘나드는 극도의 수행 끝에
마침내 29세에 성불의 깨우침을 노래했다.
黃河西流崑崙頂(황하서류곤륜정) 황하수 곤륜산 정상으로 거꾸로 흐르니
日月無光大地沈(일월무광대지침) 해와 달은 빛을 잃고 땅은 꺼지는도다
遽然一笑回首立(거연일소회수립) 문득 한번 웃고 머리를 돌려 서니
靑山依舊白雲中(청산의구백운중) 청산은 예대로 흰구름 속에 섰네.
오도송(悟道頌), 1940년본명 이영주(李英柱: 1912-1993). 스님의 고향은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이다.
합천 이씨인 아버지 이상언과 진양 강씨 어머니 강상봉 사이에 4남 3녀 중 첫째로 태어난 그는
14살이 되던 해인 1925년 마산 출신의 17세 이덕명과 결혼하여 슬하에 도경과 수경 두 딸을 두었다.
큰 딸 도경은 진주여자중학교 입학 직전에 세상을 떠났고, 수경은 현재 불필(不必)스님으로 유명하다.
성철스님은 참선을 하는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수좌5계’를 강조했다.1. 포식, 간식을 하지 않는다. 2. 말하지 않는다. 3. 하루 네 시간 이상 자지 않는다. 4. 책을 보지 않는다. 5. 적당한 노동을 한다.
이와 관련하여 스님은 “학과 같이 고고한 영물도 자기 위장 크기의 7할 이상을 먹지 않는데,하물며 사람이 짐승보다 못해 배 터지게 먹어 건강을 망쳐야 되겠느냐?”고 말했으며
또한 “세속에서는 서울대학에 가려면 네 시간이상 자면 안 된다고 해 4당5락이니 하는데
하물며 선방에서 네 시간 이상 자서야 되겠느냐?”고 강조하였다.
젊은 시절 성철스님이 쓴 발원문(發願文: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내용을 적은 글)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다리를 들어 결코 여자의 그림자도 밟지 않을 것이며/ 어찌 자비중생으로 중생의 살점을 입에 대겠는가/
청정한 신도들의 시주는 화살과 같이 피할 것이며/ 부귀와 영화는 원수같이 볼 것이다/.../”
발원문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성철스님은 특히 색욕을 경계했는데,
“욕심 가운데 제일 무서운 것이 색욕이요. 수도하는데 가장 방해가 되는 것도 색욕이요.
색욕 때문에 나라도 망치도 집안도 망치고 자기도 망친다”고 강조하였다.
마찬가지로 아주 오래 전 석가모니도 색욕을 경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런 것이 하나뿐이기에 다행이지, 만약 색욕 같은 것이 둘만 되었던들 천하에 수도할 사람이 하나도 없을 것이다.”
성철스님은 진리를 위해 평생을 수행, 정진하였다.
8년 동안 낮과 밤을 방바닥에 등을 대지 않고 꼿꼿이 참선의 자세로 앉아서 수행하는 장좌불와(長坐不臥)를 단행했고,
1955년부터는 대구 팔공산에 있는 파계사(把溪寺)의 성전암에서 10년 동안
암자 밖을 단 한 발짝도 내딛지 않는 동구불출(洞口不出)을 수행하였다.
이 외에도 죽지 않을 정도로 하루 한 끼만 먹는 오후 불식도 실행하였다.
사실 동구불출은 성철스님의 개인적인 차원뿐만 아니라 한국불교사에서도 상당한 의미가 있다.10년이라는 오랜 기간 동안 성철스님은 불교경전은 물론 동서양의 철학·문학·논리학과 수학·과학 등 불교외의 다른 학문도 섭렵했는데
훗날 한국불교사에서 ‘성철불교’라는 창의적이고도 독보적인 불교이론이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성철스님은 1967년 56세의 나이에 해인총림 초대 방장으로 취임하였다.
당시 그는 유명한 백일법문(百日法門)을 설했는데, 이는 불교의 중심사상인 중도(中道)사상을 체계화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1981년 70세의 나이에는 조계종 제7대 종정으로 추대되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라는 법어를 발표하였다.
원각(圓覺)이 보조(普照)하니 적(寂)과 멸(滅)이 둘이 아니다
보이는 만물은 관음(觀音)이요 들리는 소리는 묘음(妙音)이라
보고 듣는 이 밖에 진리 따로 없으니
시회대중 (時會大衆)은 알겠는가?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山是山 水是水).
종정수락법어
성철스님의 사상은 간단하게 돈오돈수(頓悟頓修)라고 말할 수 있다.돈오돈수는 보조국사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와 다소 상치되는 것으로
‘돈오’와 ‘돈수’란 말은 각각 단번에 깨닫고 단번에 닦는다는 것을 뜻한다.
즉 돈오돈수는 화두를 들고 참선에 전념하면서 혼신의 힘을 기울여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다는 의미이다.
즉 이는 참선을 하는데 있어 일체의 의심 없이 일심으로 뚫고 나가야한다는 수행의 가르침인 것이다.
이에 반해 돈오점수는 수행의 정도나 마음 상태 등에 따라 차례와
점차(漸次)를 두면서 천천히 수행하고 득도하는 것을 의미한다.
내용이 다소 어려운 듯하나 이와 관련한 성철스님의 비유는 아주 명료하다.
즉 “서울 가는 기차를 탄 사람이 그때부터 남에게 주워들은 서울 얘기를 하는 것은 돈오점수이고,
서울에 도착하여 남대문 안으로 들어가 직접 종로거리와 중앙청을 본 다음 서울 얘기를 하는 것은 돈오돈수”인 것이다.
결국 돈오점수는 다른 사람들이 하는 말, 즉 ‘지식’을 통해 서울을 알게 된 것이고,
돈오돈수는 자신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 서울을 알게 된 것이다.
1993년 11월 4일 늦가을 살아생전 생불(生佛)로 추앙받던 성철스님은 해인사 퇴설당에서 열반하였고
그로부터 며칠 후인 11월 10일 영결식이 거행되었다.
오랜 세월 장좌불와를 해서인지 스님은 편안하게 누워서 입적하지 않고 앉은 채 눈을 감고 숨을 거두었다.
다비식(茶毘式: 시체를 화장하여 유골을 거두는 의식) 후 유골에서 100여 과의 사리가 수습되었다.
70-80과의 사리와 유골은 해인사의 사리탑에 묻혔고 나머지 사리는
스님이 머물던 해인사 백련암과 2001년 3월 생가 터에 복원된 기념관 등 여러 장소에 분산되었다.
성철스님은, 자신을 보러오는 가족을 문전박대하는 것은 물론
세상에 하나 남은 어린 딸까지 만나주지 않은 자신의 비정함을 항상 생각하고 있은 듯,
평소에 “사람 중에 못된 놈이 중되고, 중 중에서도 못된 놈이 수좌(首座: 참선하는 승려)되고, 수좌 중에 못된 놈이 도인된다”고 말하곤 했다.
그래서인지 숨을 거두는 마지막 순간 그는 자신의 마지막 남은 핏줄인 불필을 두고 내 딸 “필아!..필아!!...” 부르면서 열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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