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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용신기념관(崔容信記念館)과 상록수(常綠樹)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7. 2. 15. 05:27

    최용신기념관(崔容信記念館)상록수(常綠樹)

     

    상록수(常綠樹)는 심훈의 소설<상록수>의 여주인공 채영신의 실제 인물인 최용신(崔容信) 선생의 얼이 살아 숨쉬는 곳이다.

    최용신(1909-19335) 선생은  협성여자신학교(현 감리교신학대학교)를 졸업 후 농촌운동에 뜻을 두고  

    193110월 수원군 반월면 천곡리 샘골마을(안산시 상록구 본오동)에서 천곡강습소를 세우고

    야학을 하며 농촌사람들의 문맹을 퇴치하는데 앞장을 섰다.

      당시 일제강점기의 암울한 시대상황에도 불구하고 최용신은 이에 굴하지 않는 의지로  

    민족의식을 깨우치는 교육에 힘썼으며, 이러한 선생의 농촌계몽운동에

    샘골예배당(샘골교회)은 훌륭한 거점이 되어주었다.

    최용신은  항일운동과 농촌계몽운동에 청춘을 바쳐 헌신하였으며

    불과 26세의 나이로 불꽃 같은 생애를 마감하였다.

    최용신의 묘는 안산시 향토유적 제18호로 지정되었으며 당시의 강습소가 있었던

    현 본오동 879-4 번지에 선생을 기념하기 위하여 200710월에 <최용신기념관>이 건립되어  

    19958월에 추서된 건국훈장 애족장을 비롯한 최용신의 얼이 서린 유물들이 전시되어있다.

     

     

     

     

     

     

     

     

    독립운동가. 농촌계몽운동의 선구자 최용신 선생

     

     

     

     

     

     

     

    상록수(常綠樹) 1935년 발간된 소설 - 심훈

     

     

    1930년대 우리 농촌은 일제의 식민지 수탈로 인하여 극도로 피폐해졌고,

     

    이것이 심각한 국내문제로 대두되자 언론기관에서는 대대적인 농촌계몽운동을 전개하였는,

     

    조선일보의 문맹퇴치운동과 동아일보의 브나르도 운동이 바로 그 것이였다.

     

     

    그리고 이 운동들을 고무한 대표적인 작품이 심훈의 상록수이다.

     

    소설의 내용은 독립운동가인 주인공 채영신박동혁의 사랑, 농촌계몽운동 활동이고

     

    시대적 배경을 고려한 작가의 상상을 기반으로 한 픽션이다.

     

     

    다만 이 소설의 주인공인 채영신만은 실존했던 인물을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바로 여성 농촌계몽운동가로 잘 알려진 최용신선생이다.

     

    1995년 대한민국건국훈장을 받은 최용신 선생은 소설에서의 모습처럼 무지했던 농촌의 어린이들,

     

    인들을 대상으로 작은 학교를 세우고 교육을 했다.

     

     

     

     

     

    샘골(泉谷, 천곡)

     

    경기도 수원군 반월면 천곡(泉谷). 사람들은 천곡을 샘골이라 불렀다.

    샘골에는 일찍부터 기독교가 들어와 교회가 세워졌고 선교봉사활동이 시작되었다.

    당시 농촌경제는 토지조사사업(1910~1918)에 연이어 산미증식계획(1920~1934) 실시에 따른

    일제의 극대화된 수탈로 붕괴 직전이었다.

    1930년대 1400여 호에 달하는 반월면 농가 중 연간소득 150원 이하로 절대빈곤에 처한 농가는 910여 호였다.

    식민지 체제를 굳히기 위한 대대적인 토목사업으로 생겨난 민둥산과 거센 바람은 황무지와 같은 쓸쓸함을 더해 주고 있었다.

    최용신은 193110월 샘골강습소에 파견되어 왔고, 다음 날부터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최용신은 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농촌이 계몽되어야 한다고 확신하였다.

    최용신의 꿈은 농촌에 있었고, 1928년 루씨(樓氏)여자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다음과 같은 글을 신문에 기고하였다.

     

     “농촌 여성의 향상은 중등교육을 받는 우리들의 책임으로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중등교육을 받고 나아가는 우리는 화려한 도시의 생활만 동경하고 안락한 거처만 꿈꾸겠는가?

    그렇지 않으면 농촌으로 돌아가 문맹 퇴치에 노력하겠는가?

    거듭 말하노니 우리는 농촌으로 달려가자! 손을 잡고 달려가자!”

     

    조선일보 192841교문에서 농촌에중에서

     

     

     

     

    샘골의 유래

     

    샘골(泉谷, 천곡)은 삼리 서쪽, 현 월드아파트 서쪽에 있던 마을이다.

    이곳은 샘이 많은 곳이라하여 샘골이라 하였으며 일제 때

    화성군 반월면에서 수질검사를 한 결과 이 마을 샘물이 제일 우수했다고 한다.

    샘골은 조선조 말엽에 남양홍씨 문화공파들이 세거한 이래 남양홍씨 집성촌으로

    폐동 때(1979년)는 40여호 중 절반이 남양홍씨였을 정도였다.

    샘골은 신도시 개발전 반월면에서는 기독교(감리교)가 가장 먼저 전파된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 있는 샘골(천곡)교회는 1907년 7월에 6칸짜리 예배당으로 처음 지어졌다.

    1931년 상록수의 주인공 최용신선생이 농촌계몽운동지도자로 처음 부임하여 교육활동을 하엿던 곳이기도 하다.

     

     

     

     

     

     

    상록수공원 안내도

     

     

     

    심훈(沈熏)의 문학기념비

     

    심훈(沈熏 1901-1936)은 우리 근대문학의 대표적인 농촌계몽소설 <상록수>를 쓴 작가이자

    <그날이 오면> 이라는 항일 저항시로 유명한  시인이다.

    <1996년 문학의 해>에는 한국문학발전에 공헌한 심훈 소설가의 공헌을 기리기 위하여

    <상록수>의 작품 무대였던  샘골강습소가 있던 이곳에 기념비를 세워둔 것이다.

    비의 제작 모형이 특이하다. 원고지를 모아 세워 펼쳐진 모형이다.

     

    비문에는 소설가 심훈의 사진부조와 함께 이런 문구가 새겨져 있다.

    " ...아침 저녁 저의 손으로 치는 그 종소리는

    저의 가슴뿐 아니라 이곳 주민들의 어두운 귀와 혼몽이 든

    잠을 깨워주고  이 청석골의 산천초목까지 울리겠지요......"

    -<상록수> 중에서

     

     

    최용신 선생이 남기신 말씀(遺訓)

     

    겨레에 후손들아

    위대한 사람이 되는데 네가지 요소가 있나니

    첫째는 가난의 훈련이요

    둘째는 어진 어머니의 교육이요

    셋째는 청소년 시절에 받은 큰 감동이요

    넷째는 위인의 전기를 많이 읽고 분발함이라

     

     

    영원한 빛을 발하소서...!

     

    교회여 위대한 상록수정신을 받들어 우리 모두의 정신을 일깨워 주고 있네.

    늘 푸르고 싱싱한 상록수 되여 지금도 계절과 시대에 제한을 받지 않고 희생의 제물이 되신 우리 선생님

    우리 민족의 혼을 가르치시다 생수의 흐름 속에서 그 씨가 싹이 나와 자라고 있는 곳

    이곳 샘골마을 천곡교회에 묻혔네.

    겨자씨와 같은 작은 씨앗이 꽃다운 청춘이 잠든 이곳

    믿음의 얼굴 최용신(崔容信) 선생님

     

    늘 푸른 교회의 동산

     

     

     

    최용신양을 기리는 돌

     

    日帝하의 처절하던 民族受難期

    나라의  光復 위해 모든 것 버리고

    農村啓蒙先驅不死鳥 되어

    이 고장 이 마을에 生命을 바쳤네

     永遠歷史에 푸르른 얼이여

    꽃다운 處女 싱그러운 常綠樹

    민중의 가슴속에  뿌리 깊이 잡아

    지금도 쉬지 않고 사랑으로 자라네

     

     

     

    샘골강습소의 주춧돌(향나무밑을 두러있는 주춧돌)과 향나무

     

    1932년 최용신이 샘골강습소를 세울 때 사용했던 주춧돌인데 당시에는 20개였는데 현재는 15개만이 남아 있다.

       향나무는 1934년에 식재된 것인데 지금까지 잘 보존되어 자라고 있다.

     향나무 옆의 붉은 벽돌 건물은 최용신이 몸담고 교육과 독립운동을 펼친 상록수 터전이었던 샘골교회이다.

     

     

     

     

     

     

    기독교대한감리회 샘골교회

     

     

     

    샘골교회

     

    교회정문에 세워진 비문에서 

    190773일 한반도의 뜨거운 성령의 역사로 세워진  <상록수>샘골(泉谷)교회이다.

    지난 100년간 수많은 영혼들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였으며

    1930년대에는 농촌계몽운동가 최용신 선생님(심훈의 소설 <상록수>의 여주인공)

    젊음을 불태우며 사역하셨던 유서깊은 교회입니다.  

      -당임목사 김수철-

    -(상록수)샘골교회 교우일동-

     

     

     

     

    농촌운동가 최용신(崔容信, 1909-1935.1.23.)

     

    신민지 농촌과 결혼한 최용신

     

    여고생 최용신은 거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운명을 원망했다.

    시원한 윤곽의 얼굴 형태나 다소 오뚝한 코, 그리고 상대를 빨아들일 듯한 검은 눈망울 등은 전통적인 조선 미녀였지만

    심하게 얽은 마마 자국은 이런 모든 장점들을 '곰보'라는 비어(卑語)로 덮어버리고도 남았다.

    그녀는 공부에서 탈출구를 찾았다. 원산의 누씨(樓氏)여자보통학교까지

    10여리 길을 통학하며 점심까지 굶어가며 공부했고, 성적은 최우등이었다.

    당시 이화, 배화 등과 어깨를 견주던 누씨여고(선교사 루시 컨닝김의 이름을 딴 학교)에 가서도 1등은 여전했다.

    백마를 탄 멋진 남성에게 여왕 대접을 받고 싶은 꿈이 그녀에게도 있었지만 용신은 고민 끝에 결혼을 포기하기로 결심했다.

    대신 식민지 조선의 농촌과 결혼하기로 결심했다.

    한 남자의 아내가 되는 길을 포기하는 대신 조선의 모든 민중들의 여왕이 되기로 결심한 것이다.

    그 여왕은 권력이 아니라 다함 없는 봉사와 희생으로 오를 가장 낮은 자리였다.

    그런데 생각지도 못한 일이 발생했다. 같은 교회 청년 김학준이 청혼해 온 것이다.

    한 남자가 자신을 따라 농촌운동에 일생을 거는 반려자가 되겠다는데 끝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용신은 17세 때 김학준과 약혼하며 결혼은 농촌운동에 필요한 준비를 모두 갖추게 될 10년 후에 하기로 합의했다.

    이를 위해 용신은 김학준을 일본으로 유학 보냈다. 1929년 여자협성신학교에 들어간 용신은 1학년 때 농촌운동에 나섰다.

    황해도 수안군 천곡면 용현리가 대상이었다. 그러나 이 첫 번째 농촌운동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

    무한한 애정으로 다가간 그녀를 농민들은 희귀한 곰보 신여성으로 바라볼 뿐이었다.

    그녀는 이에 굴하지 않고 이듬해 경북 포항의 옥마동으로 다시 떠났다.

    용현리의 실패는 옥마동에서의 활동을 성공으로 만드는 밑거름이 되었다.

    농촌운동에 자신감이 생긴 그녀는 수원에서 인천쪽으로 40여 리 떨어진 샘골에서

    교사를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슴없이 1년 남은 학업을 포기했다.

    스물 세 살 때인 193110월 용신은 운명의 마을 샘골(현 안산시 본오동)에 도착해,

    나의 몸과 마음을 남김없이 태워 태고연(太古然)한 이 마을이 밝혀지기를 기도하고

    다음날부터 마을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협력을 부탁했다.

    첫 반응은 용현리처럼 얼굴이 얽은 신여성에 대한 냉소이거나 호기심이었다.

    용신은 물러서지 않았다. 샘골과 그 주변 마을 주민들의 교육열이 높다는 사실에 착안해 교회를 빌려 학교를 시작했다.

    일상에 필요한 한글, 산수, 재봉, 수예, 가사, 성서 등의 커리큘럼이 큰 호응을 받았다.

    여세를 몰아 그녀는 강습소를 세우기로 결심하고 19325<천곡(泉谷:샘골)학원건축발기회>를 조직할 수 있었다.

    건축비가 부족하자 새벽부터 근처의 벌목하는 산에서 나무와 돌을 주워 나르고,

    마을 사람들에게 새벽과 밤중의 자투리 시간에 도와달라고 호소했다.

    이런 노력 끝에 1933115일 낙성식을 갖게 되었으나 쌀 스무 가마에 해당되는 20689전이 적자였다.

    그녀는 이런 적자에 낙심하기보다는 낙성식을 아동들의 학예회를 겸한 잔치로 치렀는데

    이에 감동한 마을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금했다.

    이때 걷힌 21750전으로 정확하게 빚과 잔치비용까지 딱 떨어지자 모금한 사람들도 믿지 못하겠다고 농담했다.

    강습소는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110명의 재학생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일제의 방해가 시작되었다. 주재소에서 최용신을 호출하고 군청의 시학(視學)이 간섭하더니

    급기야 강습소의 설비 불충분을 핑계로 60명 이상 재학해서는 안 된다고 명령했다.

    최용신의 활동을 당시 조선일보가 전개하던 <귀향 남녀학생 문자보급운동>이나,

    동아일보가 전개하던 <브나로드(민중 속으로) 운동>의 맥락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보고 제동을 건 것이었다.

    결국 용신은 50명의 학생들을 눈물 속에서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용신은 이 학생들을 버리지 않았다. 그녀는 오전반과 오후반을 끝내고 야학에서 이들을 가르쳤다.

    단 하루도 쉬지 않고 일년 열두 달 이런 생활을 계속한 샘골의 둘도 없는 종이요, 또 둘도 없는 여왕이 되어갔다.

    이 와중에 약혼자의 믿음이 약해졌다는 소식이 일본에서 들려왔다.

    그녀는 파혼도 생각했으나 자신이 일본으로 가 약혼자의 마음을 잡기로 했다.

    고베(神戶)여자신학교 사회사업과에 들어간 것은 귀국 후의 농촌운동을 위한 재충전이었다.

    용신은 약혼자의 마음도 다시 잡았으나 도일 석 달만에 각기병에 걸리고 말았다.

    고국에서의 영양실조와 중노동이 원인이었다.

    용신은 반 년 만인 19349월 귀국했는데 고향 원산에서 정양하려는 그녀를 샘골 사람들은 "누워만 있어도 좋다"며 모셔갔다.

    약간 차도가 생기자 용신은 즉각 활동을 개시했다. 오전반오후반야학을 마친 후 10리가 넘는 야목리까지 가는 강행군을 계속했다.

    그러나 YWCA에서 그간 계속하던 후원 중지를 통보하는 등 악재가 겹치자 그녀는 쓰러지고 말았다.

    1935년 정초에 수원 도립병원으로 호송됐다. 창자가 창자 속으로 뒤집혀 들어가는 장중첩증(腸重疊症)이었다.

    그녀는 장을 끊어내고 잇는 수술을 두 차례 받았으나 두 번 다 경과가 좋지 못했다.

    죽음을 감지한 그녀는 "나는 갈지라도 사랑하는 천곡강습소는 영원히 경영하여 주시오

    샘골 여러 형제를 두고 어찌가나, 애처로운 우리 학생들의 전로를 어떡하나유골을 천곡강습소 부근에 묻어주오"라고 유언했다.

    256개월의 짧은 그녀의 생애는 1935123일 국내 첫 여성사회장으로 마감했다.

    그러나 그녀의 생애는 심훈의 소설 <상록수>와 류달영의 전기 <최용신 소전>으로 다시 살아나

    우리 역사의 상록수로 떠올랐고, 진정한 여왕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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