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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립기념관 시비, 어록비
    국내 나들이/기념관(記念館) 2017. 2. 5. 22:19

    독립기념관 시비. 어록비


    독립기념관 경내에는 야외전시물인 애국선열들의 시비(詩碑). 어록비(語錄碑)가 건립되어 있다.

    이곳에는 국난을 극복한 인물과 일제침략기에 독립운동을 주도한 애국선열들의

    불굴의 민족혼과 자주독립 의지가 담긴 어록이 새겨져 있다.

    짧은 글 속에 녹아있는 선열들의 숭고한 희생과 고귀한 나라사랑 정신은 우리들 가슴에 영원히 새겨질 것이다.


    충청남도 천안시 동남구 목천동 삼방로 95 (남화리) 독립기념관




    남강 이승훈 선생 어록(南岡 李昇薰 先生 語錄)


    우리가 할일은 민족의 역량을 기르는 일이지 남과 연결하여 남의힘을 불러들이는 일이 아니다.

    나는 씨앗이 땅속에 들어가 무거운 흙을 들치고 올라올 때 제힘으로 들치지 남의 힘으로 올라오는 것을 본일이 없다.


    1922년 봄   남강  이승훈


    이승훈(李昇薰, 1864 ~ 1930)
    호는 남강(南岡)이며,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16세에 유기상(鍮器商)의 점원이 되었다.

    10여 년 동안 유기행상, 공장 경영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국내 굴지의 대실업가로 성장하였다.

    그 후 국제무역회사를 세워 세계무대로 진출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으나, 1904년 투자 실패로 파산했다.

    그 후 시골에 들어앉아 면학의 길을 찾던 중 1907년 안창호의 교육 진흥론 연설에 감동을 받아, 술, 담배를 끊고 강명의숙을 열었다.

    이어 신민회 발기에 참여하였고, 오산학교를 세웠으며, 1910년 평양에 마산자기회사를 세웠다.

    1911년 '안악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 해 9월 '105인 사건'으로 다시 서울로 압송되어 4년 2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1919년 3 ·1 운동 준비 때 서북지방을 중심으로 기독교 계통의 참여를 위하여 활동하였고 이로 인하여 3년형을 받았다.

    1922년 가출옥하여 1924년 『동아일보』 사장에 취임하여 물산장려운동과 민립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1930년 66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다.





    홍암 나철 선생님께서 선도수련 최고의 경지인

    폐식법으로 돌아가시면서 민족에게 남기고 가신 예언시


    鳥鷄七七 日落東天 黑狼紅猿 分邦南北(조계칠칠 일락동천 흑랑홍원 분방남북)
    狼道猿敎 滅土破國 赤靑兩陽 焚蕩世界(낭도원교 멸토파국 적청양양 분탕세계)
    天山白陽 旭日昇天 食飮赤靑 弘益理化(천산백양 욱일승천 식음적청 홍익이화)


    을유년 8월 15일에 일본이 패망하고
    소련과 미국이 나라를 남북으로 분단하도다.
    공산주의와 외래문화가 민족과 국가를 망치고
    공산, 자유의 극한대립이 세계를 파멸할지나,
    마침내 한민족의 선도문화가 크게 번창하여
    공산, 자유의 대립 파멸을 막고 홍익인간 이화세계를 이루리라.


    독립운동의 선구자 홍암


    ※ 두 번째 구절까지는 이루어졌는데 마지막 구절의 예언은 아직 남아 있다.




    개같은 왜적놈을 한울님께 조화(造化)받아 일야(一夜)간에 멸하고서

    대보단(大報壇)에 맹서하고 한(汗)의 원수까지 갚아 독립달성 하겠습니다.


    춘암 박인호(春菴 朴寅浩)


    박인호(朴寅浩, 1854~1940)
    호는 춘암(春菴)이며, 충남 덕산군 장촌면 막동(현재 충남 예산 삽교읍 하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당시 천도교 대도주(天道敎 大道主)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1883년 동학(東學)에 입도하여 1884년에는 손병희(孫秉熙)와 더불어 공주 가섭사(迦葉寺)에 들어가

    동학의 제2세 교주 최시형(崔時亨)으로부터 종교적 수행을 지도받고,

    그 뒤 충청도 예산지방에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여 서산지방의 박희인(朴熙寅)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었다.

    1894년 동학농민운동이 일어나자 덕의 대접주로 승천곡 전투에서 일본군을 격퇴시키고

    예산군 홍주성전투를 지휘하였으나 외세의 개입으로 좌절되었다.
    그후 1908년 1월 18일 천도교 대도주(大道主)가 되어 천도교의 정신적·경제적 지주가 되었고

    그 조직을 활용하여 개화문명의 보급과 독립사상 고취를 위해 활동하였다
    1919년 2월 21일 3·1운동의 민족대표 손병희의 명으로 천도교 보관금 중에서

    5,000원을 최린(崔麟)에게 지급하여 3·1운동 경비조로 지원하였고

    2월 28일에 천도교 이종일(李鍾一)·이종린(李鍾麟)·윤익선(尹益善) 등과 함께 협의하여

    조선독립신문(朝鮮獨立新聞)을 천도교 경영 인쇄소 보성사(普成社)에서 인쇄하여 전국으로 배포케 하는 등 독립만세운동을 준비하였다.

    3월 1일이 되자 천도교 대도주로서 3·1독립운동의 중앙지도체 49인 중 한사람으로 활동하다가 일경에게 피체되었다.
    그는 재판관할권 문제로 오랜기간 구류된 끝에 1920년 12월 10일 경성복심법원에서 무죄를 언도받아 출감하였으나

    미결기간으로 1년 9개월 여의 옥고를 치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朝鮮獨立願(조선독립원)


    남자현 지사 단지혈서 어록(南慈賢 志士 斷指血書 語錄)



    남자현(南慈賢, 1873~1933)
    남자현은 경상북도 안동에서 태어났다. 김영주와 결혼했으나, 김영주는 1895년 을미사변 때 의병을 일으켰다가 사망하였다.
    유복자 김성삼을 낳아 기르면서 평범한 전업주부로 살다가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한 것을 계기로

    아들과 함께 만주로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그는 곧바로 김동삼의 서로군정서에 가입하여 군자금 모집, 독립운동가 옥바라지 등으로 만주 지역 독립운동의 대모로까지 불리게 되었다.
    편강렬, 양기탁, 손일민 등이 만주 지역 무장 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추진할 때 참가했으며,

    무장 투쟁이나 테러 위주의 독립운동을 적극 후원하고 참여했다.

    한국 내에는 두 차례 잠입했다. 1922년 참의부의 채찬과 함께, 1926년에는 박청산, 이청수와 함께 한국 내로 들어왔고,

    두 번째 잠입은 사이토 마코토 총독의 암살을 목적으로 한 것이었다.
    1928년 만주 길림에서 김동삼, 안창호 등 47명의 독립 운동가들이 일본의 사주를 받은 중국 경찰에 검거되자,

    석방 운동에 힘써 보석으로 풀려나게 했다.

    1931년 김동삼이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도 탈출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33년 주만 일본대사이며 관동군 사령관인 무토 노부요시의 암살 계획을 세우고

    하얼빈에서 변장한 채 정탐을 하던 중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그때 남자현은 60세가 넘은 나이었으며, 보름에 걸친 옥중 단식으로 건강을 잃고 보석으로 풀려나온 후 곧바로 사망했다.


    여자 안중근으로 불리는 남자현(1873~1933)은 1932년 만주국 수립으로 영국인 리튼이 이끄는

    국제연맹의 조사단이 하얼빈에 오자 손가락을 잘라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라는 혈서를 써서 보낸 일화가 잘 알려져 있다.

    2002년 독립기념관에 이 구절을 새긴 남자현 어록비가 세워졌다.





    한계 이승희 선생 유훈(韓溪 李承熙 先生 遺訓)


    위부모입신(爲父母立身) 부모를 위해 입신하고
    위천지입심(爲天地立心) 천지를 위해 마음을 세우고
    위오생입도(爲吾生立道) 나의 삶을 위해 도를 세우고
    위사민입극(爲斯民立極) 이백성을 위해 표를 세우며
    위만세 입범(爲萬世 立範) 만세를 위해 본을 세워라


    이승희(李承熙,1846~1916)
    호는 한계(韓溪)이며, 경북 성주군 월항면 대포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었을 때에는 수백명의 유생을 거느리고 소수(疏首)가 되어

    을사오적(乙巳五賊)을 목베이고 조약의 파기를 요청하는 '청주적신파늑약소(請誅賊臣罷勒約疏)를 올렸다.
    그해 12월 25일에는 대구경찰서에 체포되어 일인의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이에 굴하지 않고 옥중에서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에게 일본의 비위(非違)를 논리적으로 지적하는 옥중 투쟁을 전개하였다.

    다음해 4월 석방되었으나 국외로 망명하기까지 끊임없이 일경의 감시를 받았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일어나자 성주(星州)의 국채보상단연회(國債報償斷煙會)의 회장이 되어 활동하였으며,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서한을 보내어 일본의 침략만행을 규탄하였다.

    그리고 그가 직접 회의에 참석하여 일본대표와 대질하겠다고 제의하였다.

    동년 광무황제의 강제 양위와 융희제(隆熙帝)의 등극 소식이 있자

    그는 가일층 분노하여 일제에 이 사실을 항의하고 양위의 부당성을 세계 여론에 호소하였다.
    1908년 일제의 침략이 더욱 노골화되자 그는 문인(門人) 김창숙(金昌淑) 등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블라디보스톡으로 망명하였다.

    여기서 이상설(李相卨)·안중근(安重根)·유인석(柳麟錫) 등과 함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09년에는 이상설·유인석 등과 함께 만주와 노령의 국경 지대인 밀산현(密山縣) 봉밀산(峰密山)에 황무지 45방(方)을 구입하여

    100여 가구를 정착시켜 새로운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고 한흥동(韓興洞)이라 명명하였다.

    또한 이곳 한흥동에 한민학교(韓民學校)를 세우고 동국사략(東國史略)을 지어

    민족의 역사를 가르치는 등 민족교육을 실시하였으며 독립군을 양성하는 기반을 닦았다.

    1913년에는 안동현으로 옮겨 한인공교회(韓人孔敎會)를 창설하고 강유위(康有爲)·이문치(李文治) 등

    중국공교회 간부들과 친선을 도모하여 독립운동을 지원하였다.

    1914년에는 상해의 박은식(朴殷植)과 연락하여 언론기관의 설립과 국사교육을 논의하였으며,

    중국 북경(北京)과 천진(天津) 등에서 활약하다가 1916년 2월 28일 중국 심양 서탑(西塔) 일승잔(日昇棧)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충무공 김시민장군 말씀


    나는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성을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겨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라
    나를 따르는 자 살것이며, 도망하는 자 멸할것이니 감히 도망하는 자 목을 베리라.

    나의 엄지(拇指)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食指)와 장지(長指)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손가락 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1592년(壬辰) 10월초 진주대첩에서 경상우도병마절도사 겸 진주목사 김시민



    김시민(金時敏,1554 ~ 1592)
    1554년 8월 27일 충청남도 천안군 병천면에서 태어나 1578년 무과에 급제했다.

    1591년 진주판관이 되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성지(城地)를 수축하고 무기를 갖추어 전쟁에 대비하였다.

    진주목사로 승진하자 군대를 지휘하여 곡성, 진해 등지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경상우도 병마절도사에 올라 금산에서 다시 적을 격파하였다.

    이 해 10월 5일 적이 전라도로 통하는 거점인 진주성을 3만의 대군으로 포위하고 공격하자

    3,800명의 병력으로 7일 간의 공방전을 벌여 물리쳤다.

    이 때 적은 막대한 손실을 입고 철수하였으며, 김시민은 끝까지 성루에 올라 많은 적을 사살하고 자신도 부상을 입고 순국하였다.

    시호는 충무(忠武)이다.




    격문


    아! 이 못난 늙은이가 삼가 뜻있는 선비들에게 고하노라.

    지팡이를 의지하여 북녘하늘을 우러르니 슬프도다.

    거리마다 격양가 드높은 태평성대를 200년이나 누렸음은

    모두가 성조의 덕화일지니 천만세가 지난들 어찌 국운을 잊을손가.

    불행히도 나라의 운수가 기울어 섬나라 오랑캐들이 조선을 침노하니

    강산은 초토되고 백성은 짓밟히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치 않을 수 없도다.

    삼군(三軍)은 눈물을 흘리며 죽음을 무릅쓰고 충절을 다하고 있거니와

    천리 밖 의주의 조정에서는 우리의 궐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다.

    아아, 호남 오십 주군에 어찌 의기 있는 남아가 없으리오? 지사(志士)들이여,

    모두 일어나 의로운 칼을 들어 나라를 구하고 왕은에 보답할 지어다.

    내 비록 몸은 늙었을지언정  말에 오르니 힘이 솟고 분한 마음에 적개심은 불타오른다.

    각 고을의 선비 호걸들이여, 장성현 남문 의병청에 모이시라.

    우리와 우리 장정들이 구국의 기치를 높이 들고 진격하면 뒤따르는 자 구름같이 모일 것이요,

    군량은 산더미처럼 거두어지리라.
    우리 모두 통분의 눈물을 뿌리며 죽음으로서 나아갈진대 반드시 대첩을 거두리라.

    왜적을 섬멸하여 창해에 칼을 씻고 한양을 수복하는 공을 세워 왕은에 보답하고 청사에 길이 공훈을 새길진저!


    선조 25년(1592년) 7월 20일 임진왜란시

    전남 장성 남문 의병청
    구국 격문




    丈夫出家生佛還(장부출가생불환)
    사나이 뜻을 세워 집을 나가면 공을 이루지 않고서는 살아서 돌아오지 않으리.


    1930년 3월 윤봉길(尹奉吉)


    윤봉길(尹奉吉,1908 ~ 1932)
    아호는 매헌(梅軒)이며, 충청남도 예산에서 태어났다.

    3ㆍ1운동이 일어나자 다니던 보통학교를 자퇴하고 한학을 배우며 뜻을 세웠다.

    1926년 농촌 계몽 운동에 뛰어들 것을 결심하고 사랑채에 야학당을 차리고,

    문맹타파를 통한 농촌계몽운동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 마을 야학 교재로 『농민독본』을 저술했다.

    1928년 농촌 부흥 운동의 본산격인 부흥원 건물을 세웠고, 이듬해 지방 농민을 모아 월진회를 조직했으며,

    체력연마를 위해 수암체육회를 만들어 운동을 장려했다.

    광주학생운동에 자극을 받고 직접 혁명 투쟁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1930년 3월 집을 떠나 만주를 거쳐 이듬해 상해에 도착하였다.

    낮에는 공원으로 일하고 밤에는 어학 수업을 하는 생활을 하던 중 김구를 만나 한인애국단에 입단하고,

    1932년 4월 29일 상해 홍구공원에서 열린 천장절 및 상해사변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져

    일본의 상해 파견군 사령관 백천의측(白川義則) 대장과 일본 거류민 단장 하단정차(河端貞次) 등을 폭살하고,

    제3함대 사령관 야촌길삼랑(野村吉三郞)과 제9사단장 식전겸길(植田謙吉) 등에게 중상을 입혀 민족의 자주 독립 정신을 세계에 떨쳤다.

    그는 거사 직후 현장에서 붙잡혀 사형을 선고 받고 24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규암 김약연(1868∼1942) 목사 어록


    우리들은 철선에 묶인 것과 같은 수족을 어찌할 수 없는 경우에 처해 있다.
    근일 일본이 한국 내외에 경찰망을 풀어 호호 촌촌에 병사를 파수시켜
    완전히 호흡도 할 수 없는 처지이다. 여러분은 이 넓은 창천하에 어찌 일언의 항쟁도 없어서 되겠는가.

    세계 민족이 자유를 고창할 때 우리 한국만이 어찌 이처럼 악마가 유린하는 것을 보고만 있겠는가


    1919년 2월 6일 명동중학교장 김약연
    "전로한족중앙회"에 제출한 청원서


    김약연(金躍淵,1868~1942)
    호는 규암(圭巖)이며, 함경북도 종성에서 태어났다.

    1907년에 간도 화룡현(和龍縣) 지신사 명동촌(明東村)에 연변(延邊) 교민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서 활동하였으며,

    1909년에는 간도 간민회(墾民會)를 이동춘 등과 함께 조직하여 역시 회장으로 활약하였다.

    1908년에는 화룡현(和龍縣) 명동촌(明東村)에 명동서숙(明東書塾)을 설립하여 숙감(塾監)을 역임하였으며

    1910년에는 명동중학교로 발전시켜 교장으로 재직하면서 청년들의 애국정신을 함양하였다.
    1912년에 이동휘(李東輝)가 명동으로 망명해오자 연변교민회를 발전적으로 해체,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북간도국민회(北間島國民會)를 창설, 초대 회장에 취임하여 독립운동의 선봉에 나섰다.
    1918년에는 여준(呂準)·정안립(鄭安立)·박성태(朴性泰)·박찬익(朴贊翊)·정신(鄭信) 등 38인과 함께

    3·1독립선언서보다 빠른 대한독립선언서(大韓獨立宣言書)를 발표하였다.

    1919년에는 독립운동을 위한 통일체로서 대한독립기성총회(大韓獨立期成總會)를 조직하여

    의사(議事)부원으로 김병흡(金秉洽)·고용환(高龍煥)·강구우(姜九禹) 등과 함께 활약하였다.

    동년 3월 13일에는 간도 용정(龍井)에서 개최한 대한독립선언대회를 정재부(鄭在負) 등과 주도하였으며

    동년 3월 또한 노령(露領) 니꼴리스크에서 개최된 대한독립선언과 파리강화회의에 대비한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에 북간도 대표로서 참석하여 일제에 대한 강력한 항의문을 발표하였다.
    1923년 2월 26일에는 24처 지방대표가 모인 가운데 전간도주민대회를 개최하여 간도에 거주하는

    30만 한국인의 재산과 생명보호를 위하여 자치권(自治權)을 확보하기 위해서 노력하였다.

    이러한 활동내용들을 탐탁치 않게 여긴 일제는 그를 한국독립운동의 '수령자(首領者)'로 또는 100만 동포의 대표자로 부르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77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삼균주의(三均主義)


    정치(政治), 경제(經濟), 교육(敎育)의 균등제도(均等制度)와

    개인(個人)과 개인(個人), 민족(民族)과 민족(民族), 국가(國家)와 국가(國家)간의

    호혜평등(互惠平等)으로 민주국가(民主國家) 건설(建設)하자


    소앙 조용은(素昻 趙鏞殷)



    조소앙(趙素昻,1887 ~ 1958)
    호는 소앙(素昻). 경기도 교하군(현 파주군) 출생으로 성균관 수료 후 1904년 황실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메이지대학(明治大學) 졸업 후 귀국하여 경신학교ㆍ양정의숙 등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상해로 망명, 독립운동에 투신하였다.

    동제사(同濟社)ㆍ박달학원(博達學院) 등에 참여하여 활동하는 한편 1915년 육성교(六聖敎)를 창안하여

    민족의 종교적 단결을 추진하였고 「대동단결선언서」(1917년)와

    「대한독립선언서」(1919년)를 기초하여 한민족의 단결과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에 참여하여 국무원 비서장ㆍ외무부장ㆍ임시의정원 의장 등을 역임하였고

    한국독립당에도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임시정부의 사상적 분열과 지도이념의 혼돈을 극복하기 위해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창안하였고,

    삼균주의에 입각하여 1941년 광복 이후 민족국가 건설의 청사진으로 발표된

    「대한민국건국강령(大韓民國建國綱領)」을 기초하는 등 임시정부의 대표적 이론가로서 활동하였다.

    광복 후 통일정부 수립을 위해 헌신하였고 6ㆍ25전쟁 중 납북되어 순국하였다.





    범정 장형선생 어록(梵亭 張炯先生 語錄)


    독립은 남이 갖다 주는 것이 아니고
    오직 우리 자신의 힘으로 쟁취해야 한다.



    장형(張炯, 1889~1964)
    호는 범정(梵亭)이며, 평북 용천에서 태어났다.

    1909년 보성전문학교에 입학하여 신학문을 접하면서,

    도산 안창호(安昌浩), 의암 손병희(孫秉熙)의 반일애국독립사사에 영향을 받았다.

    이후 양기탁(梁起鐸)·유동열(柳東說) 등에게 독립운동자금을 제공하였으며, 1919년 3·1독립운동이 일어나자

    만주로 가서 이 극(李極)·안창하(安昌夏)·이진산(李震山)·전덕명(全德明) 등에게도 군자금을 조달하였다 한다.

    그리고 이 극을 통하여 전덕원(全德元)·오동진(吳東振)·오광선(吳光鮮) 등에게도 군자금을 전달하다가 수차 투옥되었다 한다.

    그후에도 현금과 패물 등을 모집하여 송병조(宋秉祚)목사를 통해 임시정부의 이시영(李始榮)에게 전달하게 하였다고 한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기 위하여 1963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하였다.





    순국열사 김마리아 선생 어록


    독립이 성취될 때까지 우리 자신의 다리로 서야 하고 우리 자신의 투지로 싸워야 한다.


    김마리아(金瑪利亞,1892 ~ 1944)
    황해도 장연군 출신으로 기독교학교인 소래학교와 정신여학교를 거쳐

    수피아여학교ㆍ정신여학교 교사로 재직하며 교육을 통한 국권회복운동에 동참하였다.

    일본 유학 중 2ㆍ8독립선언에 참여하고 귀국하여 3ㆍ1운동에도 참여하였다가 일경에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를 전국적 조직으로 확대하여

    국권회복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노력 중 또 다시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혹독한 고문과 악형으로 병보석으로 풀려 난 후 상해로 망명하여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ㆍ임시의정원 의원ㆍ국민대표회 대표로 활동하다가 1923년 6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파크대학ㆍ시카고대학원ㆍ뉴욕신학교 등에서 수학하면서 한편으로는 1928년 근화회를 결성하여 꾸준히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33년 귀국하여 원산의 마르다윌슨신학교와 장로교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 등을 역임하며

    민족의식의 고취와 신사참배 거부운동을 전개하였다.

    1944년 3월 고문의 후유증이 악화되어 평양 기독병원에서 순국하였다.




    호암(湖巖) 문일평 선생


    (1888~1939), 독립운동가, 민족사학자

    조선 독립은 민족이 요구하는 정의 인도로서 대세 필연의 공리요 철칙이다.


    애원서(哀願書) 중에서



    문일평(文一平,1888 ~ 1939)
    호는 호암(湖岩). 평안북도 의주군 출신으로 1905년까지 의주에서 한학을 수학하였다.

    의주에서 서양문화와 러일전쟁을 목격하고 신학문의 필요성을 절감하고 일본으로 유학하였다.

    메이지학원(明治學院) 중학부에서 공부하면서 재일유학생단체인 태극학회의 임원으로 활동하면서

    기관지인 『태극학회(太極學會)』에도 많은 글들을 기고하였다.

    1910년 귀국하여 대성학교ㆍ경신학교 등에서 교사로 재직하면서 비밀결사인 신민회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12년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 단체인 동제사(同濟社)와 박달학원(博達學院)에서 교사로 활동하면서

    박은식(朴殷植)ㆍ신채호(申采浩)와 교유하였다.

    1914년 귀국 후 고향에 은거하였고 1919년 3ㆍ1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피체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중동학교ㆍ송도고보 등 여러 학교에서 역사교사로 재직하면서

    신간회(新幹會) 중앙위원ㆍ조선물산장려회 이사 등으로 민족운동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4월부터 조선일보 편집고문으로 재직하며 여러 편의 사론과 수필 등 한국사 관련 글을 발표하였고,

    특히 ‘조선심(朝鮮心)’과 ‘조선정신’을 강조하여 민족주의 역사학의 확립에 기여하였다.

    1934년 5월 진단학회(震檀學會)의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39년 4월 52세를 일기로 별세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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