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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성 쌍수정(公山城 雙樹亭)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5. 20. 05:41

    공산성 쌍수정(公山城 雙樹亭) - 문화재자료 제49호


    1734년(영조 10년) 에 관찰사 이수항이 인조를 기리기 위하여 세운 정자이다.

    인조는 이괄의 반란(1624년)을 피하여 공주로 피난을 와 6일간 공산성에 머물렸는데,

    인조는 이곳에 서있던 두 그루의 나무(雙樹)밑에서 반란이 진압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한 인조는 자신이 기대고 있었던 쌍수에 정삼품의 작위를 내리고, 서울로 돌아갔다.

    이때부터 공산성을 "쌍수산성"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수항이 관찰사로 부임하여 나무가 늙어 없어진 자리에 삼가정(三架亭)을 건립하였는데 이 건물이 쌍수정이다.


    =  충남 공주시 웅진로 280 (금성동) 공산성 =














    인절미의 고향 공주(公州)


    인절미는 찹쌀을 시루에 익힌 다음 그것을 절구에 찧고 조그맣게 네모지게 잘라 콩고물에 무쳐 먹는 떡이다.

    그런데 왜 인절미라 불렀을까?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인조는 이괄의 난을 피해 1624년 잠시 공주에 피난 온 적이 있었다.

    피난 중네 우성면 목천리 근처 임씨 댁에서 콩고물을 무친 떡을 진상하였다.

    "맛이 있구나. 그런데 떡은 떡인 모양인데, 대체 이름이 무엇이오?" 하고 물으니,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떡 이름이 있을텐데 아무도 모르니, 그것참 기이한 일이오​. 근데, 이 떡은 어느 댁에서 만들어 왔소?"

    "임씨 댁에서 만들어 진상했습니다." 왕은 한동안 생각에 잠기는 듯하더니, "임씨라... 임씨라.. 그것참 맛이 절미(絶味)로다"

    그리하여 임씨가 진상했다하여 이때부터 임절미(任絶味)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세월이 흐르면서 "임절미" 는 발음하기 편하게 "인절미" 바뀌고, 공주사람들의 입으로 전해져 "공주떡" 이 되었다.

     



    인조와 쌍수정 이야기


    1624년 인조임금이 ​왕위에 오른 직후 나라에서 주는 상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란 장수가 반란을 일으켰어요.

    그래서 인조는 왕이 된지 1년도 못되어 도성을 떠나 공주로 피난을 오게 되었습니다.

    인조는 공산성의 두 그루의 큰 나무에 기대어 시름을 달래곤 했는데, 얼마 후 반란군을 완전히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음을 놓인 인조는 버팀목이 되어주었던 나무에 정3품의 벼슬을 내리고 금대를 걸어주면서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고 해요.

    훗날 이곳에 지은 정자가 바로 쌍수정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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