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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장사(忠壯祠)
    일상생활속에서/나라사랑 2016. 6. 6. 06:28

    충장사(忠壯祠)


    이곳은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의병장(義兵將) 충장공(忠壯公) 김덕령 장군(金德齡 將軍, 1568~1596)의 사우(祠宇) 및 묘역(墓域)이다.

    김덕령 장군은 조선 선조(朝鮮 宣祖) 원년(1568)에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충효리)

    옛이름 석저촌(石底村)에서 김붕변(金鵬變)의 둘째아들로 태어났다.

    자라면서 당대석학 우계 성혼(牛溪 成渾)선생에게 수학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담양(潭陽)지방에서 의병 5000명을 모집하여 출정하였다.

    이에 당시 전주(全州)에 내려와 있던 광해군(光海君)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軍號)를 받았다.

    선조 28년(1595) 고성(固城) 지방에 상륙하려는 왜군을 격퇴하여 선조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군호를 받았다.

    이후 장문포에서 충무공 이순신(忠武公 李舜臣)과 수륙 연합전에 참가한 것을 비롯하여 진해(鎭海), 고성(固城)지방을 방어하였다.

    또한 의병장 곽재우(郭再祐) 장군과 여러 차례에 걸쳐 왜군을 무찌르니 장군의 위명(威名)은 날로 높아갔다.

    선조 29년(1596)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을 토벌하였으나 그와 내통한 충청도 순찰사(忠淸道 巡察使)의 무고로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현종(顯宗) 2년(1661) 장군의 억울함이 신원되어 관직이 복구되었다.

    그리고 현종 9년(1668)에는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숙종(肅宗) 6년(1680)에는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정조(正祖) 13년(1789)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 左贊成)에 추증(追贈)되었다.
    정조 12년(1788)에는 장군의 드높은 충효(忠孝)를 기리고자 사당(祠堂)을 건립하여 배향하는 한편 충장공(忠壯公)의 시호(諡號)를 내렸다.

    그리고 장군의 태어난 마을 석저촌을 충효리로 바꾸도록 하고, 표리비를 내려 이를 널리 알리도록하였다.

    본 사우와 묘역은 1975년 2월 정비되었다.


    = 광주광역시 북구 송강로 13 (금곡동) =







    충용문(忠勇門)


    외삼문은 선조께서 내린 충용장군을 따서 충용문이라 했다.
    1593년 12월 27일, 김덕령은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  (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이 글씨는 경암 김상필이 썼다.








    익호문(翼虎門)


    내삼문은 광해군께서 내린 익호장군을 따서 익호문이라 했다.
    1593년 12월 27일, 김덕령은 무과시험장에서 수많은 수험생들 앞에서 무예 시범을 보임으로써

    국가와 백성들이 인정하는 장수가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곧바로 세자(광해군)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의 군호를 받고, 왕(선조)으로부터 충용군(忠勇軍)이란 호칭을 받게 된다.
    이 글씨는 경암 김상필이 썼다.









    은륜비


    신 철영이 정조대왕의 윤음을 엎드려 읽고 김 충장 부부가 산실순국한 것을 알았으니

    신이 부인의 순절한 곳을 답사해 보지 못했더니 경자년에 담양부를 지키게 되어 추월산에 올라가니

    부로(나이많은 남자 어른)들이 한군데를 가리키며 ‘김 충장공의 부인이 이곳에서 왜놈을 꾸짖고서 순절하였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오래되면 아는 사람이 없을까 염려하여 석벽에다 큰 글자로

    ‘김 충장공 덕령의 부인 홍양이씨가 만력 정유에 왜적을 꾸짖고서 순절한 곳이니 담양 추월산이다.

    순절한 뒤 244년 경자에 부사 조철영이 기록하다’라고 깊이 음각하였다.
    명년 신축에 광주목사로 이임되어 충장공의 묘를 참배하였는데 표알이 여지껏 없음을 보고 개연히 눈물이 흐름을 금하지 못하였다.

    어찌 충장의 묘로써 현각이 없을 수 있단 말인가? 후손에게 물어보니 옛적에 정조 무신에 임금이 비를 세워

    마을을 표하라고 교명이 계셨는데 돌을 다듬자 돌이 흠이 있어 다른 돌로 바꾸라고 명하셨다고 한다.

    그 돌이 아직도 있어 비명을 글 잘한 분에게 받으려고 하던 중이라는 것이다.
    아! 장군의 지극한 충성과 침통한 원한은 열성조께서 밝혀주고 씻어 주기를 다했다.

    그러나 정조때에 와서 더욱 유감이 없게 해주었다. 벼슬을 주고 시호를 내린 전교가 있었고

    마을을 표한 윤음이 있었으며, 제사를 내려 준 글이 있었고, 유사에는 서문도 지어주셨다.

    대성인께서 임금으로서의 포상이 백대에까지 취신을 할 것이니 세상의 입언가로는 감히 그 만에 하나도 바랄 수 없으랴.
    삼가 전후의 어제를 모아 연월대로 차례를 정해 그 돌에다 새기니 돌이 마치 오늘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
    네모진 좌대를 놓고서 묘에다 세우고 은륜비라 썼다.
    김덕령 장군의 충절을 기리는 비로, 충장사 신실 우측에 세워져있다.

    1842년 광주목사였던 조철영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비석 전, 측, 후면에 모두 40행의 비문이 새겨져있다.
    비신의 높이는 1.69m, 폭은 62cm, 두께는 35cm이다.

    대석은 가로 1.02m, 세로 73cm, 높이 12cm의 비신 받침 1단이 있다.

    은륜비 옆에는 작은 비석이 하나 더 있으며,

    이 비는 원래 충효동 배재마을 899번지에 있었던 것을 충장사로 옮겨 이곳에 같이 봉안하였다.
    비명은 [유명조선국 증숭정대부의정부좌찬성시충장행통정대부승정원승지충용장군김공덕령 은륜비]이며,

    전면에 39자 13행, 양측 면에 7행, 후면에 13행 등 모두 40행의 비문이 있다.
    은륜비 바로 옆에는 작은 비가 있는데 호패형으로 비명은 [유명조선국김충장공덕령 은륜비]이고, 새겨진 글은 33자 12행이다.

    이 비문 역시 광주목사 조철영이 짓고 썼다.

    그 앞에는 1979년 12월 은륜비가 한문으로 되어 있을 뿐 아니라,

    내용이 김덕령 장군의 치적을 알기에는 충분하지 못하므로

    박정희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내용을 보완하여 동판 위에 한글로 써 따로 세웠다.

    이 글은 임창순이 짓고 이규형이 썼다.
    조철영은 1840년 담양부사로 있을 때 김덕령의 이씨 부인 순절처를 찾아 바위에 대서로 표시하였는가 하면,

    1842년 광주목사로 부임해서는 은륜비와 각종 묘비를 직접 쓰고 세웠다.

    또한 정조 때 편찬한 유사 속편을 추간할 때도 그가 직접 편집 교정하고 비용도 지원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씨 부인 순절처는 담양 추월산 보리암 근처로 20m가 넘는 낭떠러지다.

    그곳을 알아낸 그는 이곳 바위에 [김충장공 덕령의 부인 흥양이씨가 만력 정유년에 왜적을 꾸짖고서 순절한 곳,

    그 뒤 244년 경자에 부사 조철영이 기록하다]라는 가로 27cm, 세로 27cm의 큰 글씨고 14m의 바위에 새겨놓았다.

    이러한 내용을 포함하여 정조가 호국정신과 충효사상을 기리기 위해 내린 윤음을 읽고 장군의 행적 등을 기록한 [은륜비]가 있다.















    김덕령 장군 묘(金德齡 將軍 墓)


    김덕령(金德齡) 장군의 묘소는 충장사(忠壯祠) 북쪽 구릉지대에 있다.

    묘소는 1974년 11월 9일 원래의 자리에서 정남쪽으로 약 500m 떨어진 곳으로 이장되었다.

    원 묘는 목관(木棺)을 안치한 뒤 삼물회(三物灰)로 쌓은 회격묘(灰隔墓)이었다.

    관(棺)내에서는 이장시 입었던 수의(壽衣, 민속자료 제1호)와 육탈(肉脫)이 안된 뼈가 그대로 출토되었다.











    충장사건립공적비











    충장공 친필








    김덕령장군 의복


    우리나라의 전통 의복은 섬유가 쉽게 해지거나 썩는다는 재료의 한계 때문에

    문헌과 그림 등의 간접적인 자료를 통해 그 모양을 추측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최근에 출토복식(出土服飾)이 늘어남에 따라 실물을 통해 우리 조상들이 입었던 여러가지 옷의 모양을 알 수 있게 되었다.

    출토복식이란 옛사람의 무덤을 옮길 때 무덤속에서 시신과 함께 발견되는 옷가지를 말한다.

    이것은 시신에 입혔던 수의(壽衣)와 평소에 본인이나 가족이 입었던 옷을 관속의 빈 공간을 채우기 위해 넣은 것이 대부분이다.

    이런 출토복식은 옷 자체로서의 가치뿐만 아니라조상들의 장례제도(葬禮制度)를 알 수 있는 자료가 되기도 한다.

    또한 무덤이 아닌 불상(佛像)의 복장유물(腹臟遺物)에서 옷이 발견되는 사례도 있다.
    김덕령장군 의복도 무덤에서 출토된 것으로 1974년 11월 19일 장군의 묘를 이장할 때 발견되었다.

    이장할 때 고고학이나 역사학을 전공한 학자들이 참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발견 당시의 상황은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발견된 옷가지는 저고리 1점, 바지 2점, 철릭 2점, 직령(直領, 두루마기의 일종) 4점,

    버선 1켤레, 이불 1채 등 총 11점과 10여 점 이상의 명주와 무명 옷감이 있다.

    이 가운데 저고리 1점, 철릭 1점, 직령 3점만 보존상태가 좋고,

    나머지는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원래의 모양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이다.
    저고리와 직령의 옷길이나 소매의 길이가 길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옷들은 장군이 평소에 입었던 것임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이 옷들을 통해 조선중기의 사람들이 입었던 옷의 모양을 조금이나마 알 수 있게 되었다.

    이 의복에는 다른 지역에서 발견된 비슷한 시기의 옷들과 비교하여 몇가지 특이한 점도 있다.

    직령 소매의 배래 모양, 철릭의 주름형태와 주름잡기는 다른 옷에서는 보기 드문 현상이다.

    또한 바지의 통이 앞 시기보다 좁아져 바지의 구조가 변화하는 과정에 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현상이다.

    이밖에 겹직령과 누비직령의 정교한 바느질에서 당시 여인들의 바느질 솜씨와 정성도 엿볼 수 있다.
     이와같이 이 의복은 조선 중기의 복식사를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저고리 1점, 철릭 2점, 직령 4점, 바지 1점 등 총 8점은 1975년 4월 24일 전라남도 민속자료 제1호로 지정되었고,

    그후 1980년 4월 1일 중요민속자료 제111호로 지정되었다.



    의병장 김덕령(義兵將 金德齡)


    김덕령은 조선 선조임금이 즉위하던 1567년 현재의 광주광역시 북구 충효동에서

    아버지 광산김씨 붕변(鵬變)과 어머니 남평반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형 덕홍(德弘)과 함께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공부하였으며, 용기가 남달라 인근에 이름이 알려졌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고경명 의병에 가담하였으나, 형이 "돌아가서 어머니를 모시라"고 권하여 집으로 돌아왔다.

    그후 김덕홍은 금산전투에서 전사하고, 이듬해 8월에 어머니도 세상을 떠났다.

    1593년 11월 김덕령은 상중이었으나 주위의 권유와 협조로 의병을 모집하자 수 천명이 모여들었다.

    이를 전라도관찰사 이정암(李廷馣)이 추천하니, 조정에서는 의병을 충용군(忠勇軍), 그를 충용장(忠勇將)이라 하였다.

    또한 전주에 있던 세자 광해군(光海君)이 이끄는 무군사(撫軍司)에서는 그에게 익호장(翼虎將)이란 호칭을 주었다.
    1594년 진해와 고성사이에서 전라도를 넘보는 적과 대치하였다.

    이 무렵 조정에서 작전의 통솔과 군량의 조달을 원활히 하기 위해

    각처의 의병을 충용군에 속하도록 함에 따라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고성에 상륙하여 노략질하는 일본군을 격퇴하였고, 거제도의 일본군을 수군과 함께 공격할 때 선봉에 서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쟁은 강화회담의 진행으로 별다른 전투가 없이 장기전으로 변하였다.
    1596년 7월 충청도 홍산(현재의 부여)에서 이몽학(李夢鶴)이 군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키자, 권율(權慄)의 명을 받아 출정하였다.

    운봉(현재의 남원)에 이르렀을 때 반란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진주로 돌아갔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의 종사관 신경행(辛景行)과 반란군 한현(韓絢)에 의해 반란의 무리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임금의 심문에서 자신이 반란과 무관함을 주장하였으나, 6차례의 걸친 혹독한 고문을 견디지 못하고 감옥에서 죽고 말았다.

    김덕령이 억울하게 죽자 그를 소중히 여겼던 남도의 사람들은 모두 원통하게 여기고 가슴 아파하였다.

    특히 동생 덕보(德普)는 세상일에 뜻을 버리고 은둔생활을 하였다.

    부인 흥양이씨(興陽李氏)는 정유재란 때 담양 추월산에서 일본군에 쫓기다 절벽으로 몸을 던져 정절을 지켰다.
    그후 1661년(현종 2년)에 그의 억울함이 풀려 관직이 복구되었다. 1680년에 병조판서로 추중되고,

    년 충장공(忠壯公)이란 시호를 내리고, 그가 태어난 마을에 충효리라는 비석을 세우게 하였다.

    1678년 광주의 벽진서원(碧津書院)에 배향하였고, 이듬 해 의열사(義烈祠)라 사당 이름을 하사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의열사는 철거되고 1975년에 이곳에 충장사를 지어 배향하였다.

    또한 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광주의 가장 번화한 거리에 그의 시호를 붙여 1947년부터 "충장로"라 부르고 있다.




    김덕령 가계도


    광산김씨(光山金氏)의 명성
    광산김씨는 김알지에 뿌리로 두고 있지만, 신라 45대왕 신무왕(?-839)의 셋째아들 김흥광金興光을 시조로 한다.

    그는 서라벌을 떠나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에 터전을 잡았다.

    신라가 망하고 손자 김길金佶이 고려의 개국공신이 되었고, 고려태조로부터 광산부원군으로 봉해지면서 본관을 광산으로 하였다.

    광산김씨 13세손 김연金璉(양강공파조)의 후손에서 김장생(26세손), 김 집(27세손) 부자(父子)가 예학의 거두가 되어 문묘에 배향되었고,

    김 반(김집의 동생)의 아들 김익희, 손자 김만기ㆍ김만중, 증손자 김진규, 고손자 김양택이 모두 대제학을 역임하여

    광김의 대표적인 가문으로 우뚝선다.

    러나 18세손인 김약채가 논산으로 이주한 뒤로 근거지가 광산이 아닌 논산으로 바뀌었다.


    무등산의 광산김씨(낭장공파)

    13세손 김규(金珪, 낭장공파조)의 후손 김한로(漢老, 20세손, 대제학)는 양녕대군의 장인이었다.

    태종 이방원의 눈 밖에 난 양녕대군이 폐세자 되자, 탄핵을 받아 직첩이 몰수되었으며 지방에 안치되었다.

    그리고 자손의 벼슬길을 막는 자손금고(子孫禁錮)에 처해졌고, 증손자 김부金ㆍ(23세손)는 고향으로 낙남(落南)한다.

    김한로가 복권이 된 후에야 김후(金珝, 27세손, 호조정랑)는 벼슬길에 오른다.

    아들 윤효(允孝)는 병절교위, 손자 붕섭(鵬燮)은 선무랑에 올랐다. 붕섭의 아들이 덕령이다.

    아버지 : 김붕섭 / 어머니 : 남평반씨, 직장 반계종의 딸
        형 : 김덕홍, 동생 : 김덕보
        부인 : 흥양이씨, 처남 : 이인경, 외조부 : 반계종

    충효마을에 덕령의 선대가 최초로 들어와 살게 된 것은 1470년 무렵이다.

    증직으로 병조참판을 지낸 덕령의 4대조부인 문손이 현재 광주광역시 서구 금호동에서 살다가 원래 이곳에 살고 있던

    광주노씨의 부인과 혼인하여 처가마을로 옮겨와 살면서 광산김씨 낭장공파 집성촌으로 발전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덕령의 10대조로 한로(1367~?)는 태종의 장남인 양녕대군의 장인으로서 1383년(고려 우왕 9년)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1409년 예조판서가 되어 광산군에 봉군되었으며, 이어 ‘대사헌 참찬의정부사 예문관대제학겸판의용순금사사 의정부찬성’을 지냈다.

    한로의 증손자인 부때 광주 서구 금호동에 정착한 것으로 보인다.

    덕령의 증조부인 사촌 김윤제(1501~1572)거 문과에 급제하여 정3품 관직인 나주목사를 역임하였고,

    종증조부인 김함(1476~?) 또한 문과에 급제했다.

    그가 태어난 해에 죽은 석천 임억령 (1496~1568)의 사위이자 임진왜란 때 동복현감을 지낸 바 있는

    서하당 김성원(1525~1597)도 재종숙으로 가까운 친척이다.

    또한 당시 이 고장의 명문가로 알려졌던 소쇄처사 양산보(1503~1557)와

    해광 송제민(1549~1601)의 아버지 송정황이 이 지역 광산김씨와 혼인 관계를 맺고 있다.

    특히 담양 창평의 문화인 유강항에게 시집간 사촌의 딸은 송강 정철을 사위로 삼고,

    장성의 울산인 김백균에게 시집간 김씨 부인은 제봉 고경명(1533~1592)을 사위로 삼은 것을 볼 때,

    대대로 유업의 가통을 이어온 사대부 집안으로서 이 고을에서는 상당한 세력을 차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덕령의 가문이 부흥기를 맞이하는 시점은 할아버지 때인 것으로 판단된다.

    형제가 일곱으로 여기에서의 자손만도 52명이나 되고 걸출한 인물들을 많이 배출하게 된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김함과 김윤제를 비롯, 종조부 사위인 송정황이 문과에 급제하였고,

    형 덕홍, 자형 김응회(1555~1597), 사촌형 덕유(1564~1597), 사촌동생 덕휴, 고종사촌 김언욱과 그의 아들 존경,

    그리고 송정황의 아들인 제민과 손자인 타와 장 등은 임진왜란을 당하여

    관군과 의병에 참여하거나 일본군에 잡혀 갖은 고초를 겪은 인물들이다.

    특히 덕령의 인척이면서 후원자로서 당시 이 지역에서 명망가로 널리 알려져있던 김응회와 송제민은

    덕령에게 의병장이 될 것을 적극 권유하여 의병장으로 나서도록 하였고,

    덕령의 참모로서 직접 참여하거나, 의병 모집과 의병들이 먹을 군량미 보급에 힘써 주었다.

    [광산김씨 세보]에 의하면, [예지종국장난 복거우광서동 잉위관 자손다출평장 고동호평장동]이라는 구절이 보이는데,

    이 뜻은 시조께서 나라에 난리가 있을 것을 미리 알고 광주의 서쪽 고을에 터전을 잡고 살면서 이곳을 관향으로 삼았는데,

    자손들 가운데서 평장사가 많이 나와 동네이름을 평장동이라 하였다.”는 것이다.

    평장사는 고려시대 정2품의 고위관직으로 광산김씨 가문에서 8명을 배출해 냈다.

    위의 구절은 시조 흥광이 광주의 서쪽 모퉁이에 마을을 이루어 산 곳이 평장동이 되었다는 내용으로

    평장동은 현재 전남 담양군 대전면 대치리 뒤편에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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