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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절부암(節婦岩)
    국내 나들이/제주도(濟州道) 2016. 7. 7. 05:42

    절부암(節婦岩)


    열부(烈婦) 고씨(高氏)의 절개(節槪)를 기리기 위한 곳이다.
    조선 말기 여기에 사는 어부 강사철(康士喆)이 죽세공품(竹細工品)을 만들기 위해

    대나무를 베어 돌아오다 거센 풍랑을 만나 실종되었다.
    그의 아내 고씨는 며칠동안 남편을 찾아 헤매다가 남편을 찾지 못하자 마침내 소복을 갈아 입고

    곳 나무에 목매어 자살하자 남편의 시체가 이 바위 밑에 떠올랐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1866년(고종 3년) 판관(判官) 신재우(愼裁佑)가 이를 신통하게 여겨 조정에 알리고,

    이곳 바위에 절부암(節婦岩)이라 새겨 후대에 기리게 하였다.

    지금도 마을에서는 해마다 음력 3월 15일에 제사을 지내고 있다.
    절부암은 1981년 8월 26일 제주특별자치도 기념물 제9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한경면 용수리 =














    판관 신재우 지음



    절부암 전서체 서각(節婦岩 篆書體 書刻)


    監董金應河書洞首李八根刻 (감동김응하서동수이팔근각)
    감동을 맡은 김응하가 글을 쓰고 마을의 수장인 이팔근이 새겼다.




    절부암 명칭 유래


    조선말기 차귀촌(遮歸村) 출생의 고씨는 19세 되던 해 같은 마을에 사는

    어부 강사철(康士 喆)에게 출가하여 단란한 가정을 꾸려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하루는 남편이 고기잡이를 나갔다가 거센 풍랑을 만나 표류하고 말았다.

    고씨는 애통한 마음을 금치 못하고 식음을 잊은 채 시체나마 찾으려고

    며칠 동안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해안가를 배회하였으나 끝내 찾지 못하였다.

    그러자 남편의 뒤를 따르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하여 소복단장하고 용수리 바닷가, 속칭 ‘언덕동산’ 숲에서 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그러자 고씨가 목을 맨 바위의 나무 아래로 홀연히 남편의 시체가 떠올랐다고 전한다.

    이를 보고 사람들은 모두 중국 조아(曹娥)의 옛일 같다고 찬탄하였으며,

    1866년(고종3) 이를 신통히 여긴 판관(判官) 신재우(愼裁佑)가 바위에 ‘절부암(節婦岩)’이라 새기게 하고 부부를 합장하였다.

    그리고 넋을 위로하기 위해 제전을 마련하여 용수리 주민으로 하여금 해마다 3월 5일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오늘날에도 마을에서는 이들의 산소를 소분하고 제사를 지낸다.








    절부암과 같이 용수리포구 주변에 있는 성 김대건신부 제주표착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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