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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 및 기념관
    카테고리 없음 2016. 7. 13. 05:30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제주표착기념성당 및 기념관







    聖 김대건 신부


    증조부 김진후(金震厚)가 10년 동안의 옥고 끝에 순교하자,

    할아버지 김택현(金澤鉉)이 경기도 용인군 내사면 남곡리로 이사함에 따라 그곳에서 성장하였다.

    아버지도 독실한 천주교신자였으며, 1839년 기해박해 때 서울 서소문 밖에서 순교했다.
    1831년 조선교구 설정 후 신부 모방(Maubant,P.) 의해 신학생으로 발탁, 최방제(崔方濟)·최양업(崔良業)과 함께

    15세 때 마카오에 있는 파리외방전교회 동양경리부(巴里外邦傳敎會東洋經理部)로 가게 되었다.

    그 곳 책임자인 신부 리부아(Libois,N.)의 배려로 마카오에서 중등 과정의 교육을 마친 뒤 다시 철학과 신학 과정을 이수하였다.
    그 뒤 조선교구 제2대 교구장 주교 페레올(Ferreol, J.J .J. B.)의 지시로, 동북국경을 통하는 새로운 잠입로를 개척하고자

    남만주를 거쳐 두만강을 건너 함경도 땅에 잠입했으나 여의치 못하여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 동안에도 꾸준히 신학을 공부하고, 1844년에 부제(副祭)가 되었다.
    그 해 말에 서북국경선을 돌파하고, 1845년 1월 10년 만에 귀국하였다.

    서울에 자리잡은 뒤 박해의 타격을 받은 천주교회를 재수습하고, 다시 상해로 건너가서 완당신학교(萬堂神學校) 교회에서

    주교 페레올의 집전하에 신품성사(神品聖事)를 받고 우리 나라 최초의 신부가 되었다.
    같은 해 8월에 주교 페레올, 신부 다블뤼(Daveluy,M.N.A.)와 서울에 돌아와서 활발한 전교할동을 폈다.

    1846년 5월 서양성직자 잠입해로를 개척하다가 순위도(巡威島)에서 체포되었다.

    서울로 압송된 뒤 문초를 통하여 국금(國禁)을 어기고 해외에 유학한 사실 및 천주교회의 중요한 지도자임이 밝혀졌다.

    이에 정부는 그에게 염사지죄반국지율(染邪之罪反國之律)을 적용, 군문효수형(軍門梟首刑)을 선고하고 9월 16일 새남터에서 처형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 25세였다. 그의 시체는 교인들이 비밀리에 거두어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미산리에 안장했다.

    한국 천주교회의 수선탁덕(首先鐸德:첫번째의 성직자라는 칭호)이라 불리는 김대건의 성직자로서의 활동은 1년 여의 단기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 기간에 한국인 성직자의 자질과 사목능력을 입증하여 조선교구의 부교구장이 되었고,

    투철한 신앙과 신념으로 성직자로서의 진면목을 보여 주었다.

    따라서, 오늘날 한국천주교회는 그를 성직자들의 대주보(大主保)로 삼고 있다.

    1925년 로마교황 비오11세에 의해 복자로 선포되었고, 1984년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옥중에서 정부의 요청을 받아 세계지리의 개략을 편술하였고, 영국제의 세계지도를 번역, 색도화(色圖化)해서 정부에 제출하였다.















    성 김대건(안드레아)신부 제주표착 기념성당


    최초의 한국인 사제이며 순교자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는 1845년 8월17일 중국 상해 김가황 성당에서

    조선교구 제3대 교구장으로 임명된 페레올 주교로부터 사제품을 받은 후, 페레올 주교와 다블뤼 신부 등 일행 13명과 함께

    라파엘호를 타고 귀국하는 도중에 폭풍을 만나 표류하다가 이곳 용수리 해안에 표착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김대건 신부는 죽을 위험에서 구해주신 하느님의 섭리와 성모님의 도우심에 감사하면서 고국 땅에서 감격의 첫 미사를 올렸다.
    천주교 제주교구는 김대건 신부의 재주표착을 뜻 깊게 생각하여 여기에 기념성당과 기념관을 세웠다.

    성당의 정면은 김대건 신부가 사제품을 받은 김가황 성당 정면 모습이며, 지붕은 파도와 라파엘호를 형상화한 것이다.

    등대모양의 종탑은 어둠에 빛을 비추는 교회와 김대건 신부의 상징이다.
    이 성당은 천주교 제주교구와 전국의 여러 성당 신자들의 정성으로 지어져 하느님께 봉헌 되었다.

     
    2008년 9월20일   천주교 제주교구














    "저는 그리스도의 힘을 믿습니다. 그 분의 이름 때문에 묶였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서 만일 우리의 죄악을 살피신다면 누가 과연 당할 수 있으리이까 !"
    - 김대건 신부의 열아홉번째 서한 -




    김대건신부 흉상


    '김대건 신부 흉상'은 김신부의 얼굴에 대한 과학적 분석을 통해 뼈대에 제작한 뒤

    19세기 당시 남성의 윤곽에 맞춰 찰흙을 붙여 청동 모형을 제작한 것이라 한다.

    (1999∼2001. 가톨릭대 해부학교실팀 복원 자료)








    한국에서의 첫 미사


    라파엘호를 타고 상해를 떠난 선장 김대건신부와 페레올 주교, 다블뤼신부 일행이 20여일을 표류한 끝에

    1845년 9월28일 이곳 용수리 앞의 죽도(현 차귀도)에 정박하여 감사 미사를 봉헌하는 장면.
    폐레올 주교는 조선 땅을 밟을 수 있게 되었다는 기쁨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바랑 신부님, 우리가 얼마나 기뻐했겠는가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 모두는 여행의 목적지에 닿았고, 고생도 끝났다고 믿었습니다."





    제주에 뿌린 신앙의 씨앗, 정난주 마리아


    '정난주(丁蘭珠, 마리아, 1773∼1838)'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처형된 황사영의 부인이다.

    그녀는 일찍이 복음을 받아들인 정씨 집안에서 정약현(정약종과 정약용의 큰형)의 장녀로 태어났다.

    정난주는 18세가 되던 1790년 무렵에 황사영(알렉시오)과 혼인하여 1800년에 아들 경한(景漢)을 낳았다.

    러나 이듬해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모든 가족이 수난을 겪어야 했다.
    황사영은 박해를 피해 충청도 배론에 은거하면서 북경의 구베아 주교에게 전달할 장문의 보고 서한인 '백서(帛書)'를 작성하였다.

    1801년 9월29일 황사영이 배론에서 체포되고 '백서'가 입수되면서 조정에서는

    이를 대역부도죄(大逆部道罪)로 다루어 그에게 능지처사의 판결을 내렸다.

    이어서 부인 정난주와 남은 가족들에게도 연좌죄가 적용되어 모두 유배형을 받게 되었다.

    정난주는 제주목 대정현의 노비로, 아들 경한은 추자도의 노비로 가게 되었다.
    그녀는 37년 동안 관비(官婢)로 제주도 대정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38년 66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녀를 양모처럼 봉양하던 김상집이 모슬봉 북쪽에 있는 한굴왓에 안장하였다.

    제주의 천주교 신자들은 정난주 마리아를 '신앙의 증인'으로 섬기고 있다.





    제주도에 표착했던 주교님과 성인들

    페레올(고 요셉) 주교, 다블뤼(안 안토니오) 신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 현석문(카를로), 최형(베드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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