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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나라 유일의 석굴사찰, 함월산 골굴사(含月山 骨窟寺)
    국내 나들이/사찰(寺刹), 불교(佛敎) 2016. 8. 4. 05:00

    우리나라 유일의 석굴사찰, 함월산 골굴사(含月山 骨窟寺)


    신라문화의 뿌리는 불교문화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으며 경주남산과 토함산,

    골굴사와 기림사가 있는 함월산은 그 대표적 유적지라고 할 수 있다.
    골굴사는 기림사로 들어가는 길목의 왼쪽 골짜기 안. 절벽을 이루며 솟아있는 응회암벽 아래에 있으며.

    화강암에 비해 강도가 낮은 응회암에 인공으로 여러 개의 석굴을 파고 불상을 모셨으나

    지금은 대부분 소실되거나 파손되고 주존불만 남아있는 신라의 고찰이다.

    불국사보다 약 200여년 먼저 조성된 골굴사는  신라의 불교가 성행하던 6세기경 인도에서 온 광유성인(光有聖人)이

    임정사(林井寺-지금의 기림사)를 건립한 뒤 다시  이곳 암반전산에 마애여래불을 조성하고

    인위적인 12개의 석굴을 조성하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해온 국내 유일의 석굴사원이다.
    함월산은 화강암 재질로 동굴 형성이 어려운 한국의 산들과 달리 석회암 재질로 이루어져 있어

    천생석굴(자연석굴)이 존재했고 거기다가 인공으로 석굴 조성이 가능했던 것이다.
    골굴암은 단순한 동굴에 불상을 조성한 것이 아니라 인도 당시의 석굴사원 양식을 그대로 적용하였으며

    당시 인도 사원의 생활 방식이 그대로 전해졌다는데서 그 의의를 가진다.
    또 하나 주목할 만 한 점은 12처 석굴이라는 점이다.

    한국에서는 감실을 만들고 부처님을 모신 곳이나 한 두 개의 동굴 속에 부처님을 모신 단순한 형태의

    동굴법당들은 몇 개 있으나 골굴사처럼 12개의 석굴 그 자체가 가람인 곳은 한 군데도 존재하지 않는다.

    이러한 12처 석굴의 유래도 인도 석굴사원의 양식에서 찾을 수 있다.

    골굴사는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含月山祇林寺事蹟. 1740년, 승려 방사파(方詞婆)편찬)에 나타난 골굴사 기록을 보면,

    "산 북쪽에 천생석굴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에서도 알 수 있듯이 12처 석굴의 모습이 남아 있었고,

    당시의 골굴사가 석굴사원으로서 병을 치유하는 종교적 측면이 강조 되어 있으며,

    현재의 관음굴 내부 마애불과 현재 보물 581호로 지정된 마애여래불의 상서로운 이적 등이 묘사 되어 있다.


    골굴사는 예로부터 인근 주민들의 기도처였으며 불교정신문화의 산실로 이어져왔으나 조선 후기 화재로 전소되어

    거의 폐사지로 남아있던 도량을 1933년 박석조 스님이 인법당을 신축하고(현재의 대적광전 자리) 법당과 요사채로 사용하였다.

    1972년에 태고종 사찰로 등록하여 1989년 11월 까지 태고종단의 소속 사찰로 유지되어 왔다.
    박석조 스님의 아들인 박굴보 스님은 골굴사에서 출생 선친으로부터 승려 교육을 받고

    골굴사를 이어 받아 1984년 입적할 때 까지 골굴사를 지켰다.

    박굴보 스님 입적이후 그의 장남인 박원수가 1985년에 태고종단으로부터 교임임명을 받았으나

    1987년에 이 사찰을 개인에게 매매를 하였다,

    이에 천년고찰이 사라질 위기를 느낀 신도들이 1989년 11월 25일에 당시 기림사 주지였던

    설적운스님(현 골굴사 주지)에 부탁하여 개인에게서 이를 매입하고,

    태고종단소유의 사찰을 1990년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등록 및 등기 이전하였다.

    현재 골굴사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불국사 말사로 등록 되어 있다.


    = 경상북도 경주시 양북면 안동리 304번지 골굴사 =









    성 안내는 그 얼굴이 참다운 공양구요

    부드러운 말 한마디 미묘한 향이로다

     깨끗해 티가 없는 진실한 그 마음이

    언제나 한결 같은 부처님 마음일세





    동아보살 공덕기


    동아는 내가 골굴사 주지로 부임한 1990년 겨울에 태어나 나에게 입양되었으며 겨울에 태어난 아이라 하여 동아라 불렀다.
    강아지 때부터 새벽예불을 대중들과 함께했으며 모든 행이 예사롭지 않았다.
    참선을 하고 탑돌이도 따라 하며 기도객들을 안내했다.
    보통 진도견들은 가축이나 산짐승들을 해치는 습성이 변하지 않았지만 동아는 살생을 하지 않았다.
    KBS, MBC, SBS, 외국 TV 등에 여러 차례 방영되어 세간에 유명세를 타면서 20여 차례 강아지를 분양하여

    1200여만 원을 사중에 보시하여 대적광전과 선무도대학 건립에 공덕을 지었으며 유럽에까지 그의 강아지가 분양되었다.
    만년에는 치매와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하였으나 죽는 날 아침까지 새벽예불에 참석했다.
    지난 음력 2월 15일 극락보전의 아미타부처님 봉불식을 하루 앞둔 3월 29일 마지막 모습을 남기고

    그 나름의 생을 입적하기 위해 동아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 절을 떠났다.
    10여 일이 지난 뒤 오륜탑 언덕 넘어 양지바른 곳에서 동아의 죽음을 거두었다.
    사중에서는 동아의 49재를 기부하고 매년 음력 2월 15일을 동아의 기제사 일로 정했다.

    모든 불자들은 그를 동아 보살이라 불렀다.
    다음 생은 꼭 사람으로 환생하여 골굴사에 출가하는 인과를 간절히 축원하는 바이다.


    불기 2554년(2010년) 5월 16일


    함월산 골굴사 주지 설적운 합장 










    골굴사의 큰 법당인 대적광전과 삼존불(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골굴사 관음굴(骨窟寺 觀音窟)


    골굴사의 12개 석굴중에서 가장 넓은 석굴법당으로 관세음보살을 주불로 모시고 있으며,

    동굴의 벽면에는 108관음보살상을 모셨다.

    옛날에는 벽면에 마애불상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거의 흔적이 없으며,

    정동쪽을 향해 있는 입구에는 겸재 정선의 골굴석굴도에 있는 것처럼 목조전실을 조성해 놓았다.

    예전에는 온돌을 놓아 난방을 했으나 지금은 그냥 마루방으로 개조하였다.

    전설에 의하면 이 석굴볍당에서 잠을 자고나면 병들고 허약한 이가 생기를 얻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법당 안에서는 청량한 기감을 느낄 수 있다.

    이곳 함월산지역은 석회암지층으로서 제오라이트 등의 광산대가 형성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암반의 성분이 맥반석처럼 인체에 유효한 발산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골굴(骨窟)


    區分十二天生窟 (구분십이천생굴) - 열 두 개로 나뉘어진 천생(天生)의 굴은
    逈絶塵緣恒淨潔 (형절진연항정결) - 속세(塵緣)와 길이 끊겨져 항상 정결하도다
    縹緲危巒戴月高 (표묘위만대월고) - 멀리 보이는 험준한 산이 아스라하고, 머리 위 달은 높디 높구나
    崎嶇曲路彫崖出 (기구곡로조애불) - 험하디 험한 굽이굽이 구불한 길, 벼랑 위 바위에 여래가 새겨있고
    岩房不熱石還懊 (암방불열석환오) - 바위 속 돌방은 훈훈하여 그 속에 드니 일만 근심이 사라지는구나
    檀木無煙焄自鬱 (단목무연훈자울) - 불에 타 그을려 흔적 없는 곳에 박달나무만이 저 스스로 우거져있네
    休道天西驄嶺外 (휴도천서총령외) - 길조차 쉰 이곳이 달마대사 짚신 지고 넘던 총령 아닌가 하노라
    海東亦有眞闍堀 (해동역유진사굴) - 해동에서 참 부처님 모신 굴은 예뿐인가 하노라.

       
    - 신라함월산기림사사적 중 골굴사 부분 -






    경주 골굴암 마애여래좌상(慶州 骨窟庵 磨崖如來坐像) -  보물 제581호


    이 불상은 골굴암의 주존불로 동남쪽(문무대왕암)을 향한 암벽의 약 4m높이에 새겨져 있다.

    높다란 상투모양의 머리와 뚜렸한 얼굴, 가는 눈, 작은 입, 좁고 긴 코의 독특한 이목구비(耳目口鼻)와

    얼굴 전체에 웃음을 띤 형태 등은 형식화가 진행된 9세기 신라불상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건장하지만 평면화된 신체, 얇게 빚은 듯 계단식으로 평행되게 한 옷 주름,

    무릎에서 형식적으로 나타낸 물결모양의 옷 주름과 겨드랑이 사이에 팔과 몸의 굴곡을 표시한 V자형 무늬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광배(光背)는 불꽃무늬로 장식되어 있다.

    기림사사적기(祇林寺事蹟記)에는 골굴암에 열두 굴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 불상은 그 주불인 듯하며 만든 시기는 9세기경으로 보인다.

    조선시대 겸재(謙齋) 정선(鄭善)이 그린 "경주 골굴 석굴도(慶州 骨窟 石窟圖)"에는 목조전실(木造前室)이 묘사되어 있으나

    지금은 곳곳에 가구(架構)의 흔적만 남아 있다.




    원효성사 열반성지 골굴사(혈사) 석굴사원과 마애불의 기적


    “산 북쪽에 천생석굴(天生石窟)이 있으니 옛적에 십이구로 나뉘어 각기 이름을 지었던 것이다.

    돌 빛이 결백하여 혹은 설산(雪山)이라 하며 혹은 단특산(檀特山)이라고도 한다.
    매우 기구하고 험준하여 발붙일 곳이 없다 한다. 돌을 갈아 발 디딜 자리를 만들고 굴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 속에 돌이 편편하여 방처럼 생긴 곳이 있어 돌을 베개하고 누우면 차지도 않고 훈훈하며 병자가 거주하면 병이 낫기도 한다.
    그리고 굴벽에는 조각한 석불도 있는데 어느 때의 조성인지 알 수 없으나 연기에 끄슬려서 알아 볼 수가 없다.
    또 굴 위에 조각한 석불에서는 자주 서광이 빛나며 산곡과 동천석굴에 비친다고 한다. 이러한 기적이 해마다 있는 것이다."
    신라 함월산기림사사적(新羅 含月山祇林寺事蹟) 중 골굴사(1740년)


    원효성사의 마지막 혼이 깃든 열반처인 관음굴의 병자 치유 기적과 골굴사 마애여래불의 서광과 기적에 대한 조선시대 자료이다.
    사료에서 보듯이 골굴사는 인도 당시 석가모니 부처님이 수행하시고 설법하신 장소인

    히말라야(설산, 단특산)와 영축산으로 명명할 만큼 12처 석굴과 마애여래불의 가피 공덕이 높았다 한다.

    신라 창건 당시부터 골굴사(혈사)는 원효스님의 마지막 수행처이자 열반지였고,

    현재까지도 경주 지역민들에겐 치유와 기적을 행하는 신비롭고 영험한 도량으로 알려져 있다.







    골국사 산신당 여궁(女宮)과 남근(男根)바위


    한반도에 유입된 불교는 한민족의 전통적인 신앙을 수용하면서 발전 해왔다.
    산 전체가 하나의 암반으로 이루어진 골국사는 불교가 정착하기 이전부터

    바위를 신성의 대상으로 삼아 기원하는 샤머니즘신앙이 발달했다.
    이러한 연유로 좌측의 남근바위와 정면의 산신여궁은 삼신을 빌어 자손을 기원하는 동경주지방정신문화의 산실이었다.

    예로부터 자손이 귀한집안의 부녀들이 남근바위를 참배하고  난뒤 산신당의 여궁을 깨끗이 소재하고

    그 위에 앉아 밤새 기도를 하면 이튿날 아침 여궁에 정수(精水)가 가득히 고이는 신비한 현상이 일어나는데,

    이는  곧 소원성취의 징표이기도 했다고 기록에 전해진다.
    지금도 매년 정월이면 그 인연으로 태어난 자손들과 가족들의 참배가 줄을 잇는다.








    대적광전의 왼쪽 산등성이에 있는 오륜탑





     

    원효가 다녀간 그길 위에 서다.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


    원효대사(元曉大師, 617~686)는 신라시대의 고승으로, 속성은 설 씨, 법명은 원효, 법호는 화쟁(和諍), 초명은 서당(誓幢)이다.
    신라 진평왕 39년 압량군 불지촌(현재 경북 경산시)에서 태어났으며 설총의 아버지이다.
    젊은 시절 의상과 함께 당나라에 가서 수학하고자 요동까지 갔지만,

    고구려군에게 첩자로 몰려 갇혀 있다가 겨우 풀려나 신라로 되돌아왔다.
    십 년 후 두 번째로 의상과 함께 당나라로 가기 위해 백제국 항구로 가던 도중

    하룻밤을 지내게 된 토굴에서 갈증이 나 토굴 속에서 고여 있는 물을 마셨는데 물맛이 매우 달고 시원하였다.

    그러나 아침에 깨어보니 토굴이 아니고 오래된 공동묘지였고 물을 마셨던 그릇은 바로 해골이었다.
    이를 계기로 대오(大悟)한 원효대사는 발길을 되돌려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로 돌아온 원효대사는 미친 사람이나 거지 행세를 하면서 거리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민중 포교에 들어갔다.

    이후 요석 공주와 인연을 맺어 설총(薛聰)을 낳았고 그 후 파계하였다.

    파계(破戒)한 후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스스로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면서

    천촌만락(千村萬落)을 돌아다니면서 노래하고 춤추며 교화하였다.

    이로 인하여 가난한 사람, 어린아이들까지도 모두 부처님의 이름을 알고 염불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원효대사가 교화한 사상으로는 인간의 원래 본성인 일심(一心)으로 돌아가자는 일심사상(一心思想),

    모두가 실제의 모습으로 돌아가면 하나로 만난다는 화쟁사상(和諍思想), 모든 것에 대한 집착을 버리는 무애사상(無碍思想)이 대표적이다.
    말년에는 왕궁에서 금강삼매경(金剛三昧經)을 강의하였고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을 찬술하였다.
    분황사(芬皇寺)에서 화엄경(華嚴經), 사십회향품소(四十廻向 品疎)를 지었다.
    원효대사는 신라 신문왕 6년 70세의 나이로 穴寺에서 입적(入寂)하였다.
    입적 후 아들 설총이 원효대사의 유해로 소상(塑像)을 조성하여 분황사에 봉안하였다.





    경북 동해안 지질공원 골굴암


    보물 제581호 마애여래좌상을 소장하고 있는 골굴암은 통일신라 시대에 지어진 사찰이다.

    골굴암 일대의 암석은 뜨거운 화산재가 굳어서 만들어진 응회암(凝灰巖)이며,

    이 암석에는 갈라진 틈이나 크고 작은 구멍이 있다.

    갈라진 틈에 의해 생성된 절벽 면에 마애여래좌상을 조각하였고, 큰 구멍은 석실로,

    큰 구멍 안팎의 작은 구멍들은 작은 불상을 놓아두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다.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편평한 면은 응회암에 생긴 절리면이고,

    석실이나 불상을 놓는 자리로 쓰이는 구멍들은 타포니에 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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