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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순교지, 남양성모성지국내 나들이/천주교(天主敎) 2016. 10. 4. 05:30
무명순교지, 남양성모성지
남양성모성지는 병인년(1866년) 대박해 때 많은 순교지들이 피 흘리며 죽어간 무명순교지이다.
이곳에서는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였는데 치명일기(致命日記)와 증언록에 기록이 전해지는 남양의 순교자는충청도 내포 사람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용인 덧옥돌 사람 정 필립보, 수원 걸매리 사람 김홍서 토마 네 사람뿐이다.
남양 순교지는 다른 순교지와는 달리 무명 순교자들의 치명터였기 때문에오랜 세월 동안 무관심 속에 방치되어 오다가, 1983년부터 성역화되기 시작하였다.
그 후로 많은 어려움 속에서 작은 정성들을 모아 가꾸어져 오던 남양 순교지는
1991년10월 7일 로사리오의 복되신 동정 마리아 축일에 성모께 봉헌되고 한국 천주교회 사상 처음으로 성모 순례지로 공식 선포되었다.
또한, 화성시에서 화성8경 중의 하나로 지정. 홍보하고 있을 만큼 아름답게 가꾸어져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은 남양순교성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화강암의 대형묵주알, 그리스도왕상, 성모동굴, 오솔길 소자상, 요셉성인상 등이 있으며,
아늑하고 성스러운 분위기 조성을 위한 성지 조성사업을 대대적으로 실시, 성모님 품 같이 아늑하고 포근한 경관을 지닌 곳으로
시민은 물론 전국의 천주교 신도들의 순례지 겸 휴식장소로도 잘 알려져 있다.
= 경기도 화성시 남양읍 남양성지로 112 (남양리) =
남양성모성지 묵주기도 길에 나타난
블라드미르의 성모(자비의 성모) 이콘 모습
세 차례(91년, 93년, 97년)의 대대적인 토목공사와 여러 번의 크고 작은 공사들을 거쳐 만들어진
남양성모성지의 환희의 신비 묵주기도 길과 광장은 아무런 설계도면 없이
그때 그때 상황에 따라 야산을 파내고 나무와 잔디를 심어 만든 것이다.
산을 깍아낼 때마다 고발을 당하는 등 많은 어려움 속에서 조성된 묵주의 길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 길의 모습이 자비의 성모(블라디미르의 성모) 이콘과 너무나 닮아 있다.
특히, 성모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아기 예수님의 머리 부분처럼 보이는 무덤의 모습은 더욱 놀랍다.
사실 산을 파낼 때 이 무덤도 다 파내고 싶었으나 무덤 주인이 끝까지 땅을 팔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무덤만 남기고 땅을 판 다음 그 무덤을 가리기 위해 주변을 빙 둘러 동그랗게 나무를 심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무덤의 위치가 자비의 성모님 이콘에서 성모님과 얼굴을 맞대고 있는 아기 예수님의 얼굴 위치와 정말 비슷하다.
마치, 자비의 성모 이콘의 아기 예수님처럼 보이도록 일부러 그렇게 만드려고 한 것처럼 말이다.
그동안 그렇게 계획을 세우고 일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안되었지만,
나는 단 한 번도 자비의 성모 이콘처럼 묵주기도 길을 만드려고 한 적이 없다.
자비로우신 어머니께서 “여기 우리와 함께 계심”을 보여주시기 위해 마련하신 섭리가 아닐까?
이 사진을 볼 때마다 성모님이 남양에 발현하시지는 않았지만 “여기 내가 너희와 함께 있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은 자비로운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져 깊은 감사를 드리게 된다.
남양성모성지 이상각 프란치스코 하비에르 신부
자비의 희년에 바치는 기도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님. 주님께서는 저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와 같이
자비로워지고 가르치시며 주님을 본 사람은 누구나 아버지를 뵌 것이라고 말씀하셨나이다.
저희에게 주님의 얼굴을 보여주소서. 저희가 구원을 받으리라
주님께서는 사랑이 넘치는 눈길로 자캐오와 마태오를 돈의 종살이에서 풀어주시고
피조물에서만 기쁨을 찾던 간음한 여인과 막달레나를 구원하셨으며 베드로가 배반을 한 뒤에
눈물을 흘리게 하시고 참회하는 강도에게 낙원을 약속 하셨나이다.
"네가 하느님의 선물을 알았더라면"!
주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하신 이 말씀을 저희가 한 사람 한사람이 듣게 해 주소서.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으시는 아버지의 보이는 얼굴이시며 용서와 자비로 모든 이를 다스리시는 하느님의 얼굴이시니
이 세상에서 교회가 부활하시고 영광을 받으신 주님의 보이는 얼굴이 되게 하소서.
주님께서는 주님을 섬기는 이들도 나약함으로 갈아입고
무지와 잘못에 빠진 이들과 함께 아파하기를 바라셨으니
주님을 섬기는 이들을 만나는 모든 이가 하느님의 보살핌과
사랑과 용서를 받고 있음을 느끼게 해 주소서.
주님의 영광을 보내시고 그 기름을 부어 주시여 저희한
저희 한사람을 한사람을 거룩하게 하시며 자비의 희년이
주님의 은혜로운 해가 되어 주님의 해가 새로운 열정으로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며 억압받은 이들과 갇힌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고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해주소서.
자비의 어머니신 성모마리아의 전구를 통하여 비나이다.
주님께서는 성부와 성령과 함께 영원히 살아 계시며 다스리시나이다. 아멘.
남양성모성지
한국 천주교회의 역사는 박해의 역사라고 해도 될 만큼, 교회가 창설된 이래로 100여 년 동안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 병인박해(1866년)를 비롯한 많은 박해가 있었다.
특히, 병인년 대박해 때에는 1만 명을 헤아리는 순교자가 났는데,
당시 교우의 총 수가 2만 3천 여명이었음을 감안해 볼 때 얼마나 잔학한 박해였는지를 알 수 있다.
바로 이 병인년 대박해 때 남양 도호부에도 많은 천주교 신자들이 끌려와 순교하였다.
묵주기도 가운데 이름없이 죽어간 무명 순교자들의 순교자
조선조 당시 남양은 도호부가 있던 곳으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삼품의 도호부사가 다스렸다.박해 당시, 남양 포교들이 잡아들인 천주교인들 중, 양반 신분인 분들은 한양이나 공주로 이첩이 되어
그곳에서 재판을 받고 처형되었지만, 신분이 낮은 분들은 남양부사의 재량에 맡겨졌다.
남양 부사는 모진 매질로 배교를 강요하다가 이에 응하지 않는 신자들을 바로 지금의 남양성모성지 자리에서 목매달아 죽였다.
치명일기와 증언록에는 남양의 순교자들로 김 필립보와 박 마리아 부부, 정 필립보, 김홍서 토마 네 분의 이름만이 기록되어 전하고 있지만,
다음의 몇 가지 사실들로 미루어 더 많은 신자들이 남양에서 순교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첫째, 한국 최초의 신학생으로 선발되어, 중국 마카오에서 공부하다가 열병으로 숨진 최방제 프란치스코 신학생이 남양 사람이었다.
둘째, 한국 최초의 영세자 이승훈 베드로의 손자로 1868년, 외국인 주교와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국내 인도를 도왔다는 죄로 체포되어서소문 밖에서 참수 당한 이재의 토마 순교자가 성장한 곳이 남양부의 백학 교우촌이었다.
셋째,황사영 알렉산델의 전교로 입교하여 주문모 야고보 신부에게 세례를 받은 제관득도 남양 구포의 조카 집에서숨어 지내다가 1801년 5월에 체포되어 1803년에 순교했다.
넷째, 백학과 활초리 등 주변에 교우촌이 형성되어 있었다.남양 지역내에 있는 백학 교우촌은 앵베르 주교의 의견으로 성당을 짓기 위해 닦았다는 성당터가 오늘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여러 곳에 교우들이 살았던 흔적들이 발견되고 있어 1839년 이전 갓등이와 동시대에 교우촌이 형성되었으며,
남양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천주교 전래지역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상의 사실들로 남양에는 일찍부터 신앙이 전파되었다는 것과,조선조 당시 이곳에 많은 천주교인들이 살거나 왕래했었다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또한 남양 포졸들이 멀리 충청도에까지 가서 신자들을 붙잡아다 처형했던 것으로 보아 기록에 남아있지는 않지만,
분명 더 많은 순교자들이 남양에서 처형되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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