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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왕릉(朝鮮王陵)과 왕실계보(王室系譜)
    수원사랑/문화재(文化財) 2016. 12. 8. 19:54

    조선왕릉(朝鮮王陵)과 왕실계보(王室系譜)

     

     

     

     

    건원릉(建元陵) - 제1대 태조고황제(太祖高皇帝), 태조(太祖)


    재세: 1335~1408, 재위: 1392. 7~1398. 9 (6년 2개월)


    조선 제1대 임금 태조의 능이다. 태조는 생전에 계비 신덕왕후와 함께 묻히기를 원해

    신덕왕후의 능인 정릉에 자신의 묏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그러나 그의 뒤를 이는 태종은 부왕의 유언을 따르지 않고

    신덕왕후의 능을 도성 밖으로 이장하고태조의 능을 지금의 자리에 조성하였다.

    고려 왕릉 중 가장 화려하고 잘 정비된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현정릉 양식을 따랐르며, 이후 조선왕릉 제도의 표본이 되었다.

    건원릉은 특이하게도 봉분에 잔디가 아닌 억새풀을 심었는데 고향을 그리워하는 태조를 위해

    태종이 고향에서 흙과 억새를 가져다 봉분을 덮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동구릉

     



     

     

    후릉(厚陵) - 제2대 정종(定宗), 영안군(永安君)


    재세: 1357~1419, 재위: 1398. 9~1400. 11 (2년 2개월)


    조선 제2대 임금 정종과 왕비 정안왕후 김씨(定安王后 金氏, 1355~1412)의 능이다.

    1412년(태종12) 6월 25일 정인왕후가 58세의 나이로 승하하여 후릉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7년 뒤 정종이 승하하여 조선의 왕릉 가운데 최초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나란히 두 봉분을 연결하여 쌍릉을 이루었다.

    고려 공민왕의 형식을 따라 봉분에는 12면의 병풍석을 두르고 있으며, 석마를 동원한 문석인과 무석인을 각각 2쌍씩 배치하였다.


    위치: 경기도 개성시 판문군 령정리

     

     

     

     

    헌릉(獻陵) - 제3대 태종(太宗), 정안군(靖安君)


    재세: 1357~1422, 재위: 1400. 11~1418. 8 (17년 10개월)


    조선 제3대 임금 태종과 왕비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閔氏, 1365~1420)의 능이다.

    봉분이 같은 언덕에 조영된 쌍릉 형식으로 조선시대 쌍릉의 대표적인 왕릉이다.

    헌릉의 능 앞 석물들은 망주석만 빼고 모두 두 쌍씩 배치되었는데,

    이는 고려 왕조의 현릉(玄陵)과 정릉(正陵) 제도를 기본으로 한 것으로 조선시대에서는 유일한 두 쌍 배치 방법이다.

    헌릉에는 제례의 마지막 절차로 지방을 불태울 때 쓰던 소전대가 남아 있으며,

    봉분 앞 상석 아래 놓인 고석의 개수가 5개로 전형적인 조선 초기의 상설제도를 따르고 있다.


    위치: 서울 서초구 헌인릉길 42 헌인릉



     

     

    영릉(英陵) - 제4대 세종(世宗), 충녕대군(忠寧大君)


    재세: 1397~1450, 재위: 1418. 8~1450. 2 (31년 6개월)


    조선 제4대 임금 세종과 왕비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 沈氏, 1395~1446)의 능이다.

    1446년(세종 28)에 세종의 비 소헌왕후가 승하하자

    당시 광주(廣州, 현재의 서울 서초구 내곡동) 헌릉의 서쪽에 쌍실의 능을 조영하였다.

    이 때 오른쪽 석실은 세종을 위해 미리 만들어 놓았다가 세종이 승하하자 합장하였다.

    세조대의 영릉의 자리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능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469년(예종 1년)에 여주로 옮겨 왔다.


    위치: 경기도 여주시 능서면 왕대리 산83-1 영릉

     

     

     

     

    현릉(顯陵) - 제5대 문종(文宗)


    재세: 1414~1452, 재위: 1450. 3~1452. 5 (2년 3개월)


    조선 제5대 임금 문종과 왕비 현덕왕후 권씨(顯德王后 權氏, 1418~1441)의 능이다.

    왕과 왕비를 한 능에 묻는 경우에는 다양한 양식이 존재한다.

    현릉의 예처럼 같은 능의 이름 아래 있지만 왕과 왕비의 능을 각각 다른 언덕 위에 따로 만든 능을 동원이강릉(同原異岡陵)이라고 한다.

    정자각에서 능을 바라 보았을 때 왼쪽 위의 언덕에 있는 능이 문종의 능이고, 오른쪽 언덕의 능이 현덕왕후의 능이다.

    홍살문을 비롯하여 정자각, 비각 등을 하나씩만 만들어 놓아 이 능이 동원이강임을 나타내고 있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2 동구릉

     

     

     

     

    장릉(莊陵) - 제6대 단종(端宗)


    재세: 1441~1457, 재위: 1452. 5~1455. 윤6 (3년 2개월)


    조선 제6대 임금 단종의 능이며 단릉이다.

    1457년(세조3) 단종이 사약을 받고 숨을 거둔 뒤 시신은 영월의 동강에 버려졌다.

    그러나 충성심 강한 영월 호장 엄흥도가 시신을 거두어 동을지산 기슭에 암매장하였다.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1516년(중종 11) 여러 사람의 증언으로 묘를 찾아 1516년(중종 11) 12월 15일 봉분을 갖추게 되었다.

    그 뒤 1580년(선조 13) 상석, 표석, 장명등, 망주석을 세웠으며,

    1698년(숙종 24) 단종의 신위를 종묘에 모심과 동시에 이곳의 능호를 장릉이라 했다.


    위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90-1 장릉

     

     

     

     

    광릉(光陵) - 제7대 세조(世祖), 수양대군(首陽大君)


    재세: 1417~1468, 재위: 1455. 윤6~1468. 9 (13년 3개월)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와 왕비 정희왕후 윤씨(貞熹王后 尹氏, 1418~1483)의 능이다.

    1468년(예종 즉위) 11월 28일 주엽산 아래 세조를 예장하고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483년(성종14) 정희왕후가 승하하자 같은 해 6월 12일 광릉 동쪽 언덕에 예장하였다.

    세조의 유언에 따라 병풍석을 없애고 석실을 회격으로 바꾸는 등 검소하게 조영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설제도는 이후 왕릉 조성에 모범이 되었다.

    광릉은 같은 산줄기에 좌우 언덕을 달리하여 왕과 왕비를 각각 따로 봉안하고 두 능의 중간지점에

    하나의 정자각을 세우는 형식인 동원이강(同原異岡)릉으로써 이러한 형태의 능으로는 최초로 조영되었다.

    좌측 능선의 봉분이 세조의 능이며, 오른쪽의 봉분이 정희왕후의 능이다.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부평리 산100-1 광릉

     

     

     

     

    창릉(昌陵) - 제8대 예종(睿宗), 해양대군(海洋大君)


    재세: 1450~1469, 재위: 1468. 9~1469.11 (1년 2개월)


    조선 제8대 임금 예종과 그의 비 안순왕후 한씨(安順王后 韓氏, ?~1498)의 능이며,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으로 조영되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예종은 부왕 세조의 죽음을 슬퍼하다가 마침내 1469년(예종 2) 11월 28일 경복궁 자미당에서 20세의 나이에 승하하였다.

    1498년(연산군 4) 12월 23일에는 안순왕후가 승하하여 이듬해 2월 14일 창릉에 안장되었다.

    정자각 뒤로 왼쪽의 능이 예종의 능이고, 오른쪽이 안순왕후의 능이다.

    왕비릉의 문석인은 왕릉과 달리 왼손에 지물을 쥐고 있으며, 투구가 길고 그 위에 짧은 상모(象毛)가 있다.

    허리띠는 좌에서 우로 대각선을 이루고 있다.


    위치: 경기도 고양시 용두동 산 30-1 서오릉

     

     

     

     

    선릉(宣陵) - 제9대 성종(成宗), 자을산군(者乙山君)


    재세: 1457~1494, 재위: 1469.11~1494.12 (25년 1개월)


    조선 제9대 임금 성종과 그의 비 정현왕후 윤씨(貞顯王后 尹氏, 1462~1530)의 능이다.

    선릉은 동원이강(同原異岡) 형식으로 조영되었다.

    성종은 추존된 덕종과 소혜왕후의 아들로 태어난지 두 달 만에 부친을 여의였다.

    세조의 뒤를 이은 예종이 즉위 1년 만에 승하하자 정희왕후의 명으로 1469년 왕위에 오른 성종은

    태조 이후 닦아온 모든 체제와 기반을 완성시켜 조선 초기의 문화를 꽃피웠다.


    위치: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 100길 1 (삼성동) 선릉정릉



     

     

    연산군묘(燕山君墓) - 제10대 연산군(燕山君)


    재세: 1476~1506, 재위: 1494.12~1506.9 (11년 10개월)


    조선 제10대 임금 연산군과 폐비 거창군부인 신씨(居昌郡夫人 愼氏, 1476~1537)의 묘이다.

    연산군은 성종의 큰 아들로 성종7년(1476)에 태어나 1494년 왕위에 올랐다.

    두 번씩이나 사화를 일으키는 등 성품의 광폭함이 드러나자 진성대군을 왕으로 추대하는 중종반정이 일어나

    1506년 왕직을 박탈당하고 연산군으로 강봉되어 강화 교동으로 추방되었다가 그 해에 승하했다.

    이 묘역은 능성 구씨인 사위의 선영으로 연산군의 딸과 사위도 이곳에 묻혀 있으며,

    폐비 신씨도 1537년(중종 32년) 연산군묘 옆에 묻혀 쌍분을 이루고 있다.

    연산군 부부의 묘는 대군의 예우로 장례를 하기 위하여 곡장과 장명등 혼유석 등의 석물과 비석이 배치되어 있다.


    위치: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정릉(靖陵) - 제11대 중종(中宗), 진성대군(晉城大君)


    재세: 1488~1544, 재위: 1506. 9~1544.11 (38년 2개월)


    조선 제11대 임금 중종의 능이다. 정릉은 원래 장경왕후의 무덤인 희릉의 오른쪽 언덕에 있었으나

    문정왕후 윤씨가 풍수지리상 불길하다고 하여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조선왕릉 중 왕만 단독으로 있는 무덤은 후대에 왕릉이 된 장릉을 제외하고 태조의 건원릉과 중종의 정릉뿐이다.

    중종은 성종의 둘째 아들로 1494년 진성대군에 봉해졌다.

    진성대군은 1506년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낸 뒤 왕으로 추대되었다.

    왕위에 오른 중종은 연산군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새로운 왕도정치를 실현하고자 노력했으나

    당파의 논쟁이 끊이지 않아 조정이 안정되지 못하였다.


    위치: 서울특별시 강남구 선릉로 100길1 (삼성동) 선릉정릉



     

     

    효릉(孝陵) - 제12대 인종(仁宗)


    재세: 1515~1545, 재위: 1544.11~1545.7 (9개월)


    조선 제12대 임금 인종과 인성왕후 박씨(人聖王后 朴氏, 1514~1577)의 능이다.

    인종이 먼저 승하하자, 인성왕후는 후일 자신도 인종과 함께 묻히기를 원하였으므로

    인종의 능을 조영할 때 왼쪽편에 왕비릉 자리를 비워놓았다.

    선조는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미리 비워 놓았던 능침 자리에 왕비릉을 조영하였으나

    난간석으로 인종의 능과 인성왕후의 능을 연결하였다.

    이때 인종의 능에는 병풍석을 세웠으나 왕비릉은 병풍석이 없이 난간석만 둘러져 있다.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동동 산38-4 서삼릉



     

     

    강릉(康陵) - 제13대 명종(明宗), 경원대군(慶原大君)


    재세:1534~1567, 재위: 1545. 7~1567. 6 (22년 11개월)


    조선 제13대 임금 명종과 왕비 인순왕후 심씨(仁順王后 沈氏, 1532~1575)의 능이다.

    명종은 유일한 아들이었던 순회세자를 이른 나이에 잃고, 2년 후에는 어머니인 문정왕후를 여의게 되었다.

    그로부터 2년 후 워낙 병약했던 명종은 34세의 나이로 1567년 6월 28일 경복궁 양심당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9월 22일 태릉 동쪽 언덕에 안장되었다.

    그로부터 다시 8년 후인 1575년(선조 8) 1월 2일 44세를 맞은 명종의 비 인순왕후가 승하하여

    그해 4월 28일 명종의 능인 강릉 옆에 쌍릉으로 조성하였다.


    위치: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233-19 태릉강릉



     

     

    목릉(穆陵) - 제14대 선조(宣祖), 하성군(河城君)


    재세: 1552~1608, 재위: 1567. 7~1608. 2 (40년 7개월)


    조선 제14대 임금 선조와 왕비인 의인왕후 박씨(懿仁王后 朴氏, 1555~1600)

    그리고 계비 인목왕후 김씨(仁穆王后 金氏, 1584~1632)의 능이다.
    선조는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덕흥대원군의 셋째 아들로 하성군에 봉해졌다가 명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1567년 즉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을 겪은 선조는 전후 복구작업에 힘을 기울였으나 거듭된 흉년과 정치의 불안정으로 인해 큰 성과를 이루지 못했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동구릉



     

     

    광해군묘(光海君墓) - 제15대 광해군(光海君)


    재세: 1575~1641, 재위: 1608. 2~1623. 3 (15년 1개월)


    조선 제15대 임금이자 두 번째 폐위 임금인 광해군과 그의 부인 문성군부인 류씨(文城君夫人 柳氏, 1576~1623)의 묘이다.
    광해군묘는 쌍분으로 조영되었는데 왼쪽이 광해군의 묘이며, 오른쪽이 문성군부인 유씨의 묘이다.
    제주도로 유배지가 옮겨진 광해군은 그곳에서 67세의 천수를 다하고
    1641년(인조 19) 어머니 무덤 발치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그 때문에 1643년(인조 21) 제주도에서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에 위치한 지금의 묘소로 옮겨졌으며,
    건너다 보이는 곳에 어머니의 묘소인 성묘가 자리한다.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사릉리 산65번지



     

     

    장릉(長陵) - 제16대 인조(仁祖), 능양군(綾陽君)


    재세: 1595~1649, 재위: 1623. 3~1649. 5 (26년 3개월)


    조선 제16대 임금 인조와 그의 비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1594~1635)의 합장릉이다.

    1635년(인조13) 12월 9일 인렬왕후가 승하하자, 능호를 장릉이라 하여 이듬해 4월 12일 파주 운천리의 언덕에 능을 조영하였다.

    인조는 장릉을 조영하면서 오른쪽에 미리 자신의 능을 마련해 두었다가 승하 후 그곳에 묻혔다.

    그러나 후에 화재가 일어나고 뱀과 전갈이 능 주위로 무리를 이루고 석물 틈에 집을 짓는 등의 이변이 계속되었다.

    따라서 1731년(영조 7) 8월 30일 천장을 결정하고 현재의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로 옮겼다.

    처음에 만든 석물을 새 능으로 옮길 때 옛 능의 병풍석, 난간석 등이 새 능과 규모가 맞지 않아 그대로 이전하지 못하고 새로 만들었다.

    따라서 장릉에서는 처음 조성한 석물과 천장할 때 서로 조성한 석물이 함께 어우러져 17세기, 18세기의 왕릉 석물을 동시에 볼 수 있다.

    병풍석에 기존의 구름문양과 십이지신상을 대신하여 모란꽃과 연꽃 문양을 새긴 것이 특이하다.


    위치: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  파주장릉



     

     

    영릉(寧陵) - 제17대 효종(孝宗), 봉림대군(鳳林大君)


    재세: 1619~1659, 재위: 1649. 5~1659. 5 (10년)


    조선 제17대 임금 효종과 왕비인선왕후 장씨(仁宣王后 張氏, 1618~1674)의 능이다.

    왕릉과 왕비릉이 한 언덕에 같이 있는 경우는 대개는 봉분을 나란히 두는 쌍릉의 형식을 택하는데,

    영릉은 특이하게도 왕릉과 왕비릉이 상하로 조영되어 있다.

    이는 풍수지리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으로 왕릉과 왕비릉을 좌우로 나란히 놓을 경우 생기가 왕성한 정혈을 비켜 가야 하기 때문에

    좌우 쌍릉을 쓰지 않고 상하열 자리에 왕릉과 왕비릉을 조영한 것이다.

    이러한 배치를 동원상하능이라고 하는데, 동원상하능 중에서는 영릉이 조선 최초이다.

    영릉의 재실은 현존하는 조선왕릉 재실 중 원형을 가장 잘 간직하고 있어 보물 제1532호로 지정되어 있다.


    위치: 경기도 여주군 능서면 왕대리 산8 영릉



     

     

    숭릉(崇陵) - 제18대 현종(顯宗)


    재세: 1641~1674, 재위: 1659. 5~1674. 8 (15년 3개월)


    조선 제18대 임금 현종과 왕비 명성왕후 김씨(明聖王后 金氏, 1642~1683)의 능이다.

    높지 않은 언덕 위에 쌍릉으로 조영된 숭릉은 왕릉과 왕비릉 모두 병풍석 없이 난간석만으로 연결되었고,

    능침 앞에 혼유석이 하나씩 놓여 있다.

    곡장 안의 석양과 석호 각 2쌍과 망주석 1쌍이 초계를 이루었고,

    중계에는 장명등, 문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으며, 하계에는 무석인 1쌍과 석마 1쌍이 배치되었다.

    봉분 앞의 장명등과 망주석에는 인조의 장릉처럼 꽃무늬가 새겨져 있으며,

    망주석 위쪽에 "세호"라고 불리우는 작은 동물 조각이 뚜렷하게 조각되어 눈길을 끈다.

    문석인은 미소를 머금고 온화한 모습이고 무석인은 입을 굳게 다물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 절도있는 모습이다.

    숭릉의 정자각은 다른 왕릉의 정자각과 달리 팔작지붕에 익랑이 좌우에 붙어있어 그 규모가 크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11-2  동구릉



     

     

    명릉(明陵) - 제19대 숙종(肅宗)


    재세: 1661~1720, 재위: 1674. 8~1720. 6 (45년 10개월)


    조선 제19대 임금 숙종과 그의 첫번째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1701),

    두번째 계비인 인원왕후 김씨(仁元王后 金氏, 1687~1757) 세 사람을 모신 능이다.

    숙종과 인현왕후의 능이 쌍릉으로 나란히 조영되고,

    인원왕후의 능은 다른편 언덕에 단릉 형식으로 모셔져 동원이강의 배치를 보이고 있다.

    그런데 보통 우상좌하의 원칙에 따라 동원이강릉의 오른쪽 언덕을 왕이 차지하는 일반적인 왕릉과 달리

    명릉에서 가장 낮은 서열의 인원왕후의 능이 가장 높은 자리인 오른쪽 언덕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이하다.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서오릉



     

     

    의릉(懿陵) - 제20대 경종(景宗)


    재세: 1688~1724, 재위: 1720. 6~1724. 8 (4년 2개월)


    조선 제20대 임금 경종과 그의 비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 魚氏, 1705~1730)의 능으로,

    왕과 왕비의 봉분을 한 언덕에 앞뒤로 나란히 배치한 동원상하봉(同原上下封) 능이다.
    위쪽에 있는 경종의 능침에만 곡장을 둘렀고, 왕릉과 왕후릉 모두 혼유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석물은 별도로 배치하였다.

    이러한 배치 양식은 능혈의 폭이 좁아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 이유이며 자연의 지형을 훼손하지 않으면서 능원을 조성하려는 우리 민족만의 자연관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능묘 조각들은 규모가 작고 왜소한 편이다.


    위치: 서울 성북구 화랑로32길 146-37 (석관동)



     

     

    원릉(元陵) - 제21대 영조(英祖), 연잉군


    재세: 1694~1776, 재위: 1724. 8~1776. 3 (51년 7개월)


    조선 제21대 임금 영조와 그의 비 정순왕후 김씨(貞純王后 金氏, 1745~1805)의 능이다.

    영조는 무려 52년에 이르는 긴 재위 기간동안 여덟차례에 걸쳐 산릉원을 조성하거나 천장하는 등 산릉제도에 관심이 컸다.

    원비 정성왕후 서씨(貞聖王后 徐氏, 1692~1757)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을 자신의 자리로 정해 쌍릉으로 조영하기를 바랐으나,

    손자인 정조는 영조가 승하한 그 해 7월 27일 건원을 서쪽 두 번째 산줄기에 그를 안장하고 원릉이라고 했다.

    원래 이곳은 1660년(현종 1) 10월 효종 능인 영릉이 조영되었던 곳인데,

    1673년(현종 14) 석물에 틈이나 빗물이 스며들 염려가 있다고 하여 천봉하기로 하고 봉분을 열었으나

    깨끗하여 끝내는 당론으로 번져 전날의 영릉도감의 책임자까지 파직되었던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원릉을 조성한지 29년이 지난 1805년(순조 5)에는 61세 나이로 승하한 영조 계비 정순왕후 김씨를 원릉의 옆에 모셨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동구릉



     

     

    건릉(健陵) - 제22대 정조(正祖), 정조선황제(正祖先皇帝)


    재세: 1752~1800, 재위: 1776. 3~1800. 6 (24년 3개월)


    조선 제22대 임금 정조와 왕비 효의왕후 김씨(孝懿王后 金氏, 1753~1821)의 합장릉이다.

    1800년 6월 28일 정조가 49세로 승하하자 유언대로 같은 해 11월 6일

    아버지의 능인 현륭원(훗날 융릉) 동남쪽 두 번째 언덕에 안장하였다.

    그로부터 21년 후인 1821년(순조 21) 3월 9일 효의왕후가 승하하였다.

    효의왕후를 건릉 부근에 안장하려고 하자 훗날 딸이 순조의 비 순원왕후가 됨으로써

    영안부원군에 오르게 되는 영돈령부사 김조순이 현재의 건릉이 풍수지리상 좋지 않으므로

    길지를 찾아 천장해야 한다는 주장을 제기하였다.

    그리하여 길지를 물색한 결과 현륭원 서쪽의 산줄기를 찾아냈으며,

    1821년(순조 21) 정조의 능을 현 위치인 현륭원 서쪽 언덕으로 이장하고 효의왕후와 합장해서 오늘날의 건릉이 되었다.


    위치: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481번길 21 (안녕동) 건릉



     

     

    인릉(仁陵) - 제23대 순조숙황제(純祖肅皇帝)


    재세: 1790~1834, 재위: 1800. 7~1834.11 (34년 4개월)


    조선 제23대 임금 순조와 왕비 순원왕후 김씨(純元王后 金氏, 1789~1857)의 합장릉이다.
    순조는 1834년 11월 13일 경희궁 회상정에서 승하하여 1835년 4월 19일 파주 교하 구후(舊後) 장릉(長陵) 국내에 안장하였고,

    능호를 인릉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풍수지리상의 불길론이 대두되어 천장을 결정하게 되었다.
    논의가 있은 다음 해인 1856년(철종 7) 인릉은 현재의 위치인 서초구 내곡동 헌릉 서쪽 언덕으로 천장되었다.

    1857년(철종 8) 창덕궁 양심각에서 순원왕후 김씨가 승하하여 같은 해 12월 17일에 인릉에 합장하였다.
    겉으로 보아서는 혼유석을 하나만 설치하여 단릉과 같은 형식이다.


    위치: 서울특별시 서초구 내곡동 13-1 헌인릉



     

     

    경릉(景陵) - 제24대 헌종성황제(憲宗成皇帝)


    재세: 1827~1849, 재위: 1834.11~1849. 6 (14년 7개월)


    조선 제24대 임금 헌종과 왕비 효현왕후 김씨(孝顯王后 金氏, 1828~1843),

    그의 비 효정왕후 홍씨(孝定王后 洪氏, 1831~1904)의 능이다.
    세 개의 봉분이 나란히 있는 조선왕릉 중 유일한 3연릉 형태이다.
    제일 우측의 능침이 헌종의 것이고, 가운데가 효현왕후 능침이며, 좌측이 계비 효정왕후 능침이다.

    이는 우왕좌비의 원칙에 따른 것으로 중국 등과는 다르게 배치되어 있어 조선왕릉의 특징을 볼 수 있다.


    위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9-2 동구릉



     

     

    예릉(睿陵) - 제25대 철종장황제(哲宗章皇帝), 덕완군(德完君)


    재세: 1831~1863, 재위:1849. 6~1863.12 (14년 6개월)


    조선 제25대 임금 철종과 왕비 철인왕후 김씨(哲仁王后 金氏, 1837~1878)의 능이다.
    조선시대 "국조오례의", "국조속오례의", "국조상례보편"에 의거한 상설제도로서는  마지막 능이다.

    봉분은 병풍석을 세우지 않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이는 쌍릉으로 연결되어 있다.

    난간석의 석주에는 음각 세로선과 원문을 새기고 원문 안에 방위를 나타내는 문자인 십이간지를 새겨 넣었다.

    일반적으로 조선의 능침은 상중하계의 3단으로 되어 있는데,

    영조의 원릉부터는 중계, 하계의 구분을 두지 않고 문무석인을 같은 단에 배치하였다.

    특히 예릉은 하계 앞 강(岡)이 길며 장명등을 중계가 아닌 하계의 끝에 배치한 것이 특이한데 이는 조선시대 유일한 배치방법이다.


    위치: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동동 산38-4 서삼릉



     

     

    홍릉(洪陵) - 제26대 고종태황제(高宗太皇帝), 익성군(翼成君)


    재세: 1852~1919, 왕재위: 1863.12~1897, 황제재위: 1897~1907.7 (43년 7개월)


    조선 제26대 고종황제와 명성태황후 민씨(明成太皇后 閔氏, 1851~1895)의 능이다.

    조선시대 말기에 조성된 능역으로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랐기 때문에

    황제릉의 양식을 따라 명나라 태조의 효릉을 본떠 조영하였다.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침전의 앞으로 배치하고, 정자각 대신에 일자형 건물의 침전을 세웠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되어 있다.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유릉(裕陵) - 제27대 순종효황제(純宗孝皇帝)


    재세: 1874~1926, 재위: 1907. 7~1910. 8 (3년 1개월)


    조선 제27대 순종황제와 원비 순명효황후 민씨(純明孝皇后 閔氏, 1872~1904),

    그리고 그의 비 순정효황후 윤씨(純貞孝皇后 尹氏, 1894~1966)의 능으로

    조선왕릉 중 한 능침에 세 명의 수장자를 합장한 유일한 동봉삼실릉(同封三室陵)이다.

    겉으로 보기에는 봉분이 하나여서 단릉처럼 보이지만, 그 아래 순종과 그의 두 왕비가 잠들어 있다.

    홍릉과 같은 황제릉 양식으로 조성하여 정자각 대신 침전이 자리하고

    기린, 낙타, 코끼리 등 이전에 볼 수 없었던 다양한 형태의 석물이 있다.
    홍릉에 비해 능역 규모가 다소 좁긴 하지만 문무인석을 비롯하여

    전체 석물의 조각은 홍릉의 것보다 사실적이면서 뛰어난 수법이 보인다.


    위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홍유릉



     

     

    조선왕릉 주요 상설. 명칭

     

     1) 곡장(曲墻) 봉분을 보호하기위하여 삼면에 둘러 놓은 담장
     2) 능침(능침) 왕이나 왕비의 봉분, 능상이라고도 하며 병풍석, 난간석 등으로 구성.
     3) 석양(石羊) 4)석호(石虎) 돌로 만든 양과 호랑이.

    온순함을 상징하는 양과 사나움을 나타내는 호랑이를 무덤 양쪽에 두 기씩 번갈아 설치하여

    음양의 조화를 이룸과 동시에 악귀들의 접근을 막는 수호신

     5)혼유석(魂遊石) 상석에 해당하며, 영혼이 나와 놀다가는 곳

     6)망주석(望柱石) 혼이 봉분을 찾을 수 있도록 하는 표지석.
     7)장명등(長明燈) 묘역에 불을 밝혀 사악한 기운을 쫓는 등.

     8)문인석(文人石) 장명등 좌우에 있으며 두 손으로 홀(笏)을 쥐고있다

     9)석마(石馬) 문인석이나 무인석의 뒤나 옆에는 말이 서 있다. 중국 왕릉에는 없는 조선 왕릉 고유의 형식.
    10)무인석(武人石) 문인석 아래에서 왕을 호위하고있으며, 두손으로 장검을 짚고 위엄 있는 자세로 서있다
     11)산신석(山神石) 시신을 모신 후에 3년 동안 토지를 관장하는 신인 후토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

    주로 정자각의 오른쪽 위, 예감과 마주 보는 곳에 설치.

     12)예감(瘞坎) 제사를 지낸 후에 축문을 태우는 돌함으로 ‘망료위’라고도 함. 정자각 뒤 왼쪽에 있다
     13)비각(碑閣) 왕의 생전 업적을 기록한 비석이나 신도비를 안치한곳
     14)정자각(丁字閣) 제향을 올리는 곳으로 신주를 이곳에 모신다.
     ‘丁(정)’ 자 모양의 집이어서 정자각이라 하고,

    제사를 지내는 사람이 이곳에 오르내릴 때는 ‘동입서출(東入西出)’의 원칙을 지켜야 한다.

    즉, 동쪽 계단으로 오르고 서쪽 계단으로 내려와야 한다. 황제는 일(日)자, 왕은 정(丁)자 모양이라한다.
     15)참도(參道) 홍살문에서 정자각까지 이어진 돌길로 왼쪽은 높게, 오른쪽은 낮게 만들어져 있다.

    높은 쪽은 혼이 다니는 길로 ‘신도(神道)’, 낮은 곳은 임금이 다니는 길로 ‘어도(御道)’라 한다.
     16)수복방(守僕房) 능을 관리하는 사람이 거주하는 곳.
     17)수라간(水刺間) 제사 음식을 만들고 제기에 나누어 담는 주방.
     18)배위(拜位) 왕이나 제관이 무덤을 참배하러 오면 이곳에서 먼저

    무덤을 향해 절을 올리면서 ‘참배하러 왔음’을 무덤의 주인공에게 알림.

    홍살문 옆에 3.3㎡ 정도로 돌을 깔아 놓고, 이곳에서 4배를 하며 제향을 올리러 온 것을 알림.
     19)홍살문(紅箭門) 신성 구역을 표시하는 문으로 붉은 칠을 한 둥근 기둥 2개를 세우고 위에 살을 박아 놓음.

    홍문, 홍전문으로도 불림

     20)금천교(禁川橋) 왕릉의 금천을 건너는 다리로, 속세와 성역의  경계 역할을 한다.
     21)재실(齋室) 능 제사 준비를 하고, 왕릉을 관리하는 능참봉이 상주하는 곳

     22)병풍석(屛風石) 능의 주위를 병풍처럼 빙 둘러서 무덤을 보호하고 12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신상이 해당 방위에 맞게 새겨져 있어 잡귀들이 무덤 안에 들어올 수 없게 함.

    ‘둘레돌’, ‘호석’이라고도 한다.

     

     

     

     

    세계유산 조선왕릉(世界遺産 朝鮮王陵)


    조선왕릉은 인류의 문화유산으로서 탁월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의 보호에 관한 협약"에 따라 2009년 6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519년의 역사를 지닌 조선은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았다.

    조상에 대한 존경과 숭모(崇慕)를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긴 조선은 역대 왕과 왕비의 능을 엄격하게 관리했다.

    그리하여 42기 능 어느 하나도 훼손되거나 인멸되지 않고 모두 제자리에 완전하게 보존되었다.
    조선왕릉은 우리의 전통문화를 담은 독특한 건축 양식과 아름다운 자연이 어우러진 공간으로

    600여 년 전의 제례가 오늘날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살아있는 문화유산이다.

    특히, 조선왕조의 신분에 따른 왕실의 무덤은 능(陵), 원(圓), 묘(墓)로 분류하고 있다.

    또한, 신분에 따라 무덤의 규모나 석물의 수를 제한한 것이 특징이다.

     


    조선왕릉 분포


    조선 왕족의 무덤은 모두 119기에 이르며, 이 가운데 능(陵)이 42기, 원(園)이 13기이며, 묘(墓)가 64기이다.

    조선 왕족의 무덤은 무덤 주인의 신분에 따라 그 명칭을 달리하는데, 능(陵)은 왕(王)과 왕비(王妃)의 무덤이고,

    원(園)은 왕세자(王世子)와 왕세자빈(王世子嬪) 또는 왕의 사진(私親) 무덤을 말하고

    그와 왕족의 무덤은 일반인의 무덤처럼 묘(墓)라고 한다.

    42기의 능 가운데 북한 개성에 있는 제릉(태조 원비 신의왕후의 능), 후릉(정종과 정인왕후의 능)을 제외한 40기의 능이 남한에 있다.

    500년이 넘는 한 왕조의 무덤이 이처럼 온전하게 보존된 것은 세계에서 그 유례를 찾기 힘들며 문화사적 가치가 매우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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