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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충렬서원(忠烈書院) - 정몽주선생(鄭夢周先生)을 배향하는 서원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12. 24. 06:43

    충렬서원(忠烈書院) - 정몽주선생(鄭夢周先生)을 배향하는 서원
















    백로가


    까마귀 싸우는 골에 백로야 가지마라 성난 까마귀 흰빛을 새오나니 청강에 고이 씻은 몸을 더럽힐까 하노라.


    포은선생 모친변한국대부인영천이씨(圃隱 先生 母親卞韓國大夫人永川李氏)




    송석 정공덕화공적비(松石 鄭公德和功績碑)



    진사 김공학조유적불망비(進士 金公學祖遺績不忘碑)







    충렬서원(忠烈書院) -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호
     
    충렬서원은 동방성리학의 조종으로 추숭된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조선 선조 9년(1576)  이계(李棨)·이지(李贄)를 비롯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정몽주(鄭夢周)와

    조광조(趙光祖)의 학덕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처음에는 이 서원을 정몽주와 조광조의 묘소 중간 지역인 지금의 죽전리에 세웠으며, 서원 이름도 「죽전서원(竹田書院)」 이었다.

    임진왜란 때 서원 건물이 회진(灰塵)되어 선조 38년(1605)에 이정구(李廷龜)가 경기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현감 정종선(鄭從善), 이시윤(李時尹) 등과 함께 논의하여 정몽주의 묘소 아래에 중건하였다.

    3년여의 공사 끝에 사우 3칸, 동 서재 각 2칸, 문루(門樓) 3칸을 지었다. 문루 윗층은 강당이며,

    아래는 문주방(門廚房)과 고사(庫舍) 등을 갖추었다.
    이 때 조광조의 위패는 심곡서원(深谷書院)으로 옮겨 배향 하였다.

    중창과 함께 「충렬(忠烈)」이라 사액 되었으며, 설곡(雪谷) 정보(鄭保)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죽창(竹窓) 이시직(李時稷)을 추가 배향하였다.

    숙종 32년(1706)에 다시 후손 정제두(鄭齊斗)·정찬조(鄭纘祖)를 비롯한 여러 유림의 공의로 옛터 서쪽 가까운 곳에 이건하였다.

    그 후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고종 8년(1871)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없어졌다가

    1911년에 유림에서 사우(祠宇)를 중건하였고, 1956년에 강당을 복원하였으며, 1972년 전체를 보완 신축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경내에는 6칸의 사우(祠宇), 내삼문(內三門), 외삼문(外三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8칸의 강당 등이 있다.
    서원 입구에는 홍살문을 세워 신성시하였다. 강당은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특히 충렬서원은 일정한 중심 축이 없어 외삼문에 들어서면 강당과 사당이 동시에 보인다.

    한때 용인의 대학자 도암(陶巖) 이재(李縡) 선생이 여러 유림과 학문을 교류하던 곳이기도 하나,

    그 이후 교육공간으로서의 역할은 거의 없었다. 

    1997년 유림의 결의로 조선 중기의 문신이며 삼학사(三學士)의 한사람으로 추숭되고 있는

    추담(秋潭) 오달제(吳達濟 ) 선생을 추가 배향 하였다. 매년 3월과 9월 중정(中丁)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모현면 능원리 1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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