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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충비각(旌忠碑閣)과 충노비각(忠奴碑閣)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6. 10. 24. 04:30
정충비각(旌忠碑閣)과 충노비각(忠奴碑閣)
정충비각(旌忠碑閣)과 충노비각(忠奴碑閣)
이 비각은 손종로(孫宗老, 1598~1636)와 그의 노비였던 억부(億夫)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영조의 명으로 세워졌다.
손종로는 우재(愚齋) 손중돈(孫仲暾, 1463~1529)의 고손(高孫)으로 인조 때 남포현감을 지냈다.
인조 14년(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억부와 같이 전쟁에 나갔다가 경기도 이천의 쌍령 전투에서 전사했는데
시체를 찾지 못하여 옷가지만으로 장사를 지냈다고 한다.
정충각(旌忠閣)은 손종로를 기리는 것이고, 오른쪽의 충노각(忠奴閣)은 노비 억부를 기리는 것이다.
손종로(孫宗老, 1598~1636)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고경(考卿). 우참찬 중돈(仲暾)의 현손이다.어려서는 문학에 뜻을 두었으나 장성하여서는 무과에 급제하였다. 1
618년(광해군 10)에 광해군이 인목대비(仁穆大妃)를 서궁(西宮)에 유폐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농사일에 종사하다가 다시 관직에 나아가 1634년(인조 12) 남포현감이 되었다.
이 때 도체찰사(都體察使) 김류(金瑬)로부터 치적이 별로 없다 하여 탄핵(彈劾)을 받고 파직되었다.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 왕이 남한산성에 피신하였다는 말을 듣고 이에 따르고자 하였으나,
이천(利川)에 이르러 길이 막혀 나아가지 못하고 경상좌병사 허완(許完)이 쌍령(雙嶺)에 주둔하고 있음을 듣고
이에 투신하여 막하에서 활동하다가 쌍령싸움에서 전사하였다.
훈련원정(訓鍊院正)을 증직받았고, 1784년(정조 8)에 정려가 세워졌으며
1816년(순조 16) 8월에 충절로써 가증(加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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