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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
    국내 나들이/문화재(文化財)를 찾아 2017. 1. 15. 05:09

    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










    충선공 삼우당 문선생(忠宣公 三憂堂 文先生)


    문익점(文益漸, 1329~1400)
    문익점은 고려 말인 1329년(충숙왕 19) 경상남도 산청에서 문숙선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영특하기로 소문난 문익점은 11살 때, 충청도 한산으로 가서 이곡 스승에게 글을 배웠고,

    32살 때인 1360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김해부 사록이라는 벼슬을 받았다.

    그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사간원 좌정언에 올랐다가 1363년 이공수를 따라 원나라에 사신으로 가게 되었다.
    그러나 원에 사신으로 갔던 문익점은 공민왕 제거 음모에 연루되어 중국에서 뜻하지 않은 귀양살이를 하게 되었다.

    3년 동안 귀양살이를 하면서 고려에서는 볼수도 없는 무명옷을 일반 백성이나 귀족 모두 입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문익점은 넓은 벌판에 하얗게 핀 목화를 보았다.
    그리고 목화에서 실을 뽑아 무명천을 만들고, 그것으로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따뜻하고 질기고 깨끗한 것이 목화라는 풀에서 나온다는 것을 안 문익점은
    "우리 고려도 저런 목화를 재배하기만 하면 백성들이 따뜻하고 질긴 무명옷을 입을 수 있겠구나.
    저 목화씨를 우리나라로 가지고 가야겠다." 이런 결심을 하였다.

    그때까지 고려에는 무명천으로 만든 옷이 없었다.
    그 당시 고려에서는 누에고치로 만든 명주(비단)옷과 마로 만든 삼베옷을 주로 입었다.

    그런데 명주옷은 귀하고 비싼 옷이어서 귀족이나 부자들만 입을 수 있었고, 일반 백성들은 삼베옷을 주로 입었다.

    한편 삼베옷은 겨울에 입기에는 매우 얇아서 일반 백성들은 겨울이 되면 추위에 떨며 지내는 형편이었다.

    문익점은 가난과 추위로 고통 받는 고려 백성들을 추위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은 뜻을 가슴깊이 품었다.

    그래서 귀양지 운남에서 고려로 돌아갈 때 반드시 목화씨를 가져가야겠다고 결심을 하였다.

    그러나 당시 원나라에서는 목화씨와 그 재배 방법이 나라 밖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법으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1363년 귀양이 풀려 고국으로 돌아가게 된 문익점은 관리들의 삼엄한 감시를 피해

    붓 뚜껑 속에다 목화씨를 숨겨 갖고 나오는 데 성공하였다.

    고려로 돌아온 문익점은 예문관 재학의 벼슬을 받았지만 벼슬보다도 더 중요한 사명을 성취하고자 고향으로 내려갔다.
    고향 경상도의 봄은 중국 윈난(雲南) 지방처럼 따뜻했다.

    고향 산청으로 간 문익점은 장인 정천익을 찾아갔다.
    문익점은 중국에서 어렵게 가져온 목화씨 10개 중에 다섯 개는 자신의 밭에 심고

    나머지 다섯 개는 그의 장인인 정천익에게 주어 심게 했다.

    만일의 경우에 대비해 씨를 나누어 심었던 것이었다. 그의 염려는 현실로 드러났다.
    문익점이 심은 씨는 모두 썩었고 정천익이 심은 것은 겨우 한 개만 싹을 틔웠던 것이다.

    두 사람은 정성껏 그 싹을 키웠다. 초가을 드디어 한 개의 목화가 피어올랐다.

    그들은 거기에서다시 싹을 얻었고 이를 해마다 늘려 심었다.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목화 재배에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를 퍼지게 하였다.

    그런데 목화 재배에는 성공했지만 목화에서 씨를 빼고 실을 뽑아내는 법을 알 수 없었다.

    그래서 손으로 씨를 발리고 솜을 얻어 이불이나 베게에 넣어서 사용하였다.

    그러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무르던 원에서 온 승려로부터 목화에서 씨를 뽑는 법과 실을 뽑을 수 있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되었고, 비로소 이때부터 무명옷을 만들어 입을 수 있게 되었다.

    이때가 정천익과 문익점이 목화씨를 심은 지 5년쯤 뒤의 일이었다.

    이제 백성들은 올이 성글고 시원한 삼베옷과 모시옷은 여름철에나 입었고

    겨울이 되면 무명옷에 솜을 넣어 따뜻하게 겨울을 나게 될수 있었다.

    이렇듯 문익점이 최초로 우리나라에 목화씨를 들여옴으로써 한민족의 의생활에 일대 변혁을 일으키게 되었다.





    고려 전객령 치사 퇴헌 정천익선생 영정(高麗 典客令 致仕 退軒 鄭天益 先生 影幀)

    정천익 선생은 정3품 당상관을 지내고 문익점 선생의 장인이시며, 목화씨를 산청땅에 심어 문래와 옷 짜는 법을 연구 전수한 분이다.





    산청 목면시배 유지 (山淸 木棉始培 遺址)


    고려 후기에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면화(棉花)를 재배한 곳이다.
    공민왕 12년(1363) 문익점(文益漸, 1329~1400)은 중국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올 때,

    밭을 지키던 노인이 말리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씨앗을 붓통에 넣어가지고 왔다.

    장인 정천익과 함께 시험재배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다.

    그러다가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재배를 널리 퍼지게 하였다.

    문익점이 태어난 곳인 배양마을은 지금까지도 목화재배의 역사를 간직해오고 있으며,

    지리산으로 향하는 길가 오른쪽에는 낮은 돌담으로 둘러싼 백여 평의 밭이 있다.

    밭 옆에는 기와지붕을 한 비각 안에 ‘삼우당선생면화시배지’라는 제목의 비석이 서 있다.

    이곳에서는 지금도 문익점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옛터에 밭을 일구어 해마다 면화를 재배하고 있다.
    목면시배 유지는 1963년 1월 21일 사적 제108호로 지정, 관리하고 있다.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목화로 887 (사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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